[미디어펜=김규태 기자] 지난 2018년 월성 1호기 원자력발전소의 조기 폐쇄 과정에서 경제성 평가 조작과 증거 인멸까지 조직적으로 있었다는 의혹과 관련해, 여론을 둘러싼 상황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문건 자료를 삭제해 감사원 감사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된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 공무원들의 공소장이 전면 공개되면서부터다.
공소장에 담긴 공소사실은 검찰수사 내용을 정리해 법원에 제출한 것으로 재판에 의해 확정된 사실은 아니지만 사건의 내막을 읽을 수 있다.
백운규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2017년 10월 13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현안 보고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9일 언론보도를 통해 공개된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삭제된 문건은 530개에 달한다. 그 내용도 위중하다.
검찰은 문건과 관련해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가 월성1호기 조기 폐쇄 및 즉시 가동중단을 결정할 예정 등을 청와대에 미리 보고한 문건"이라며 "한수원 이사회 보도자료에 고용보장을 포함한 계획 등을 청와대 산업비서관과 협의하는 내용"이라고 적시했다.
검찰 공소장과 감사원이 앞서 밝힌 감사 결과를 종합하면, 산업부 공무원들이 삭제한 문건에는 청와대와 산업부가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결정을 사전에 논의한 정황이 담겨 있다.
사건을 맡은 대전지검 형사5부(이상현 부장검사)는 혐의를 인정한 1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2명을 구속시켰고, 핵심 피의자로 꼽히는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을 지난 25일 직권남용 등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백 전 장관은 "가동중단을 추진한 것은 맞으나 그 과정에서 불법행위는 없었다"고 항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공소장 공개를 계기로 법조계는 검찰이 백운규 전 장관의 구속영장을 조만간 청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변수는 당시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이었던 채희봉 한국가스공사 사장을 소환 조사하는 등 청와대와의 연결고리를 검찰이 어디까지 규명하느냐다.
특히 세간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은 청와대 윗선 어디까지 원전 조기 폐쇄 결정 과정에 깊게 관여했는지 여부다. 검찰이 그에 대한 확증을 확보했는지, 피의자들의 향후 법정진술 내용에 따라 다른 시나리오가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공소장에 따르면, 경제수석 산하 산업정책비서관을 비롯해 사회수석 등 사건에 연루된 청와대 윗선은 한두 곳이 아니다. 삭제한 문건 목록에는 국무총리지시사항, 대통령 에너지전환 보고(BH 수정요청) 등 논란의 소지가 될 제목이 많아 법조계 주목을 더 끌고 있다.
여야는 이번 공소장 공개를 계기로 정면충돌하는 모양새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이적행위 국기문란 프로젝트가 일부 공무원 차원이 아닌 정권 차원에서 극비리에 추진돼온 여러 정황이 드러났다"며 날을 세웠고,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춘추관 브리핑을 통해 "정부는 법적조치를 포함해 강력히 대응하겠다"며 이례적으로 강경한 대응 방침을 밝혔다.
또다른 시각에서 법조계 일각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고위공직자수사처(공수처)가 향후 본격 발동된 후 제 1호 수사대상으로 청와대 윗선을 정면으로 겨냥해 이번 사건을 이첩 받을지 여부다.
담당 수사팀이 최대한 수사를 마치고 추가 기소하겠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공수처가 나설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는 관측도 나온다.
김진욱 공수처장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말을 아끼고 있다. 지난 29일 출근길에서 기자들의 관련 질문이 쏟아지자 "차장이 임명되면 의논할 내용이다. 사찰은 처음 듣는 얘기지만 검토는 해보겠다"며 선을 긋고 나섰다.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원전 조기 폐쇄 사건에서 칼자루를 쥔 건 공수처가 아니라 검찰이다. 검찰이 백 전 장관에 이어 청와대 윗선 어디까지 겨눌지 주목된다. 윗선의 수위에 따라 정국이 요동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