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in Book] 1988년 겨울,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테레사 수녀는 사우스 브롱크스에 있는 화재가 나서 버려진 건물을 노숙자 보호시설로 쓰기 위해 뉴욕시에 절차를 문의했다. 테레사 수녀는 몇 해 전 에드 코크 뉴욕 시장을 병원에서 만나 의견 일치를 본 상태였다.
▲ 사진=노스페이스 홈페이지 캡처. |
뉴욕시는 버려진 빌딩 한 채당 1달러를 제의했고, 선교회는 50만 달러를 개축비로 떼어놓았다. 뉴욕시에 건물 소유권이 있었지만 건물의 양도 권한을 가진 담당 공무원이 없었기 때문에 소유권 이전은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단지 수도자적 봉사 활동을 하며 살고 싶었던 수녀들은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1년 반 동안 계속되는 공청회에 참석했고 그 후로도 뉴욕시의 상급 공무원과 세부 조항을 다시 논의했다. 1989년 10월, 뉴욕시는 드디어 계획을 승인했고 건물은 복구에 들어갔다.
그런데 승인된 지 거의 2년이 지난 시점에 수녀회는 ‘새로 짓거나 개조하는 2층 이상의 건물에 승강기를 설치해야 한다’는 뉴욕시의 건축 규정을 통보받았다. 수녀회는 수도자적 신념에 따라 승강기를 이용하지 않을뿐더러, 이를 설치하는 데 드는 10만달러도 없다고 뉴욕시에 말했다. 하지만 수녀들은 법을 예외 적용할 수는 없다는 연락을 받았을 뿐이다.
테레사 수녀는 노숙자 보호시설을 포기했다. 그녀는 진정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닌 일에 비용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수녀회의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수녀회는 그 비용을 수프나 샌드위치 등을 제공하는 데 훨씬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규제는 국민의 시간·돈과 직결
규제는 그냥 두면 계속 늘어나는 속성을 가진다. 정부의 규제 담당 부서에서 규제의 절차와 기준 설정은 물론 집행의 모든 과정을 독점해, 규제가 공무원의 관점에서 만들어지고 집행되기 때문이다. ‘고비용 불량 규제’가 만연하게 된 원인이다.
정부 규제는 결국 국민의 시간과 돈의 문제다. 아무리 간단한 규제라도 그 규제가 적용되기까지는 국민의 세금이 든다. 규제라는 안 보이는 세금은 독점적 규제 담당 부서의 권한에 따라 견제를 거의 받지 않는다.
미국 내 규제 완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온 지식인 가운데 하나인 필립 K. 하워드는 <노스페이스의 지퍼는 왜 길어졌을까?>를 통해 오늘날 미국 사회의 규제가 그들의 건국이념인 ‘자유와 책임’이라는 가치를 파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국책 사업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부터 개인의 판단이 필요한 일상적 행위에 이르는 다양한 사례를 들어, 규제가 불러일으킨 폐해를 진단한다.
저자는 관료 조직의 규제 맹신 뒤편에는 ‘법은 일률적이고 공정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음을 강조하고, 이 실현할 수 없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두려움에서 유래한 관료주의적 규제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이런 식의 ‘법 만능주의’, ‘규제 제일주의’가 미국인들의 자율성을 침해해, 그들의 본래적 활력과 창의성을 갉아먹는다고 하며, 이를 ‘상식의 죽음’이라고 선언한다. 규제가 만사의 상식적 판단을 대처하게 된 사회에서 개인의 상식을 되살려야 한다는 설명이다.
◇규제의 사슬에 찢긴 '노스페이스'
오직 객관성만을 신봉하는 정부 체계에서 공익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는, 정부의 조달 업무를 들여다보면 이해가 쉽다. 조달 업무는 물품과 서비스 구매가 주된 목적이라 간단하고 비교적 평가하기도 쉽다.
정부의 절차적 관례는 모든 공급자에게 공평한 기회를 부여한다는 구실을 가지고 있지만 “서류 작업으로 부담이 가중되고, 규정은 헷갈리거나 종종 앞뒤가 맞지 않고 공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업체들은 정부와 일하기를 기피한다.
때문에 업체들은 정부와 일할 때는 현저히 높은 금액으로 입찰하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로 한 업체 관계자는 “서류 작업이 적어도 8배는 많기 때문에, 정부와 일을 할 때는 일반적으로 민간부문에서 비슷한 일을 할 때보다 입찰가를 10~30퍼센트 가량 높인다”고 증언했다. 상거래에 필수적인, 쌍방 간의 정상적 협의를 배제하는 엄격한 절차 때문에, 정부는 결점이 있거나 적합하지 않은 물품을 정기적으로 구입하게 된다.
하버드대학의 케네디 행정대학원은 이러한 비효율성을 낱낱이 파헤치는 조사를 실시했다. 가령 방한 피복과 장비 제조사인 노스페이스(North Face)는 방한복 세트를 정부에 납품하면서 정부 품질 규격을 준수하려고 하다 보니 옷감의 조각들이 서로 맞지 않았다. 지퍼는 너무 길었고 재봉실이 터져서 옷이 분리되는 문제가 발생해 논란을 빚었다.
▲ <노스페이스의 지퍼는 왜 길어졌을까?-일상을 위협하는 법 만능주의> 필립 K. 하워드 / 인물과사상사 |
한국에서는 김대중 정부가 1998년 4월, 규제개혁위원회를 신설해서 취임 1년 만에 규제 총량의 50퍼센트를 감축한 전력이 있다. 이후 세계은행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이를 모범 사례로 들어 다른 나라에 권장하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정부 조직의 ‘비효율’을 지탄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역 없는 온라인 정보 민주주의의 시대에 들어서 그 폐해를 더 자주 접하다 보니, 과잉 규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 책은 비록 미국의 사례들을 예로 들고는 있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크게 불거지고 있는 규제 완화 및 개혁 논의에 참고할 수 있는 유용한 지적들을 담고 있다. [미디어펜=김세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