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석명 기자] 12년이 지났다. 피해자는 30대 중반의 산전수전 다 겪은 대표팀 경력의 베테랑 선수, 가해자는 50대 중반의 현직 프로팀 감독이다. 피해자가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가해자의 폭력 행위를 작심 폭로하고 분노를 쏟아냈다.
프로배구 스타 박철우(36·한국전력)가 이상열(56) KB손해보험 감독에게 과거 자신이 당했던 폭행은 물론 주변 동료의 폭행 피해까지 폭로했다.
박철우는 18일 안산 상록수체육관에서 열린 OK금융그룹과 경기 후 인터뷰에 나서 이상열 감독 얘기를 꺼냈다. 앞서 박철우는 이날 경기 전 개인 SNS를 통해 "정말 피꺼솟이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라는 의미심장한 글을 올려 이상열 감독에게 뭔가 할 얘기가 있음을 예고한 바 있다.
박철우는 국가대표로 활동하던 2009년, 당시 대표팀 코치였던 이상열 감독에게 태릉선수촌에서 구타를 당한 적이 있다. 박철우는 대표팀 내부적으로 이 구타 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자 기자회견을 통해 폭행 피해를 호소했고, 이 코치는 무기한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후 이상열 감독은 징계 2년 만인 2011년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운영위원으로 배구계에 복귀했고, 대학배구 지도자와 해설위원을 거쳐 지난해부터 KB손해보험에서 지휘봉을 휘두르고 있다.
박철우은 이날 "그분(이상열)이 감독이 되셨단 이야기를 듣고부터 힘들었다. (경기장에서) 마주칠 때마다 쉽지 않았다. 조용히 지내고 싶었는데 그런 기사를 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과거 폭행 건을 다시 들추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런 기사'란 이상열 감독이 최근 배구계의 핫 이슈가 된 이다영-이재영(흥국생명), 송명근-심경섭(OK금융그룹)의 학교폭력과 관련해 과거 자신의 잘못 했던 행동(폭행)을 반성한 매체 인터뷰를 말한다. 이 감독은 폭력에는 '인과응보'가 따른다며 항상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는 취지로 얘기한 것이지만, 피해 당사자인 박철우는 이 감독의 발언이 폭행 가해를 이미 지나간 일이나 한때의 실수 정도로 치부하는 것처럼 보여 묵혀뒀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박철우는 과거 폭행이 만연했던 스포츠계의 현실을 되짚으면서 "사랑의 매도 정도가 있다. 이상열 감독에게 맞아서 기절하고 고막 나간 선수도 있다. 다 내 친구고 동기"라며 이 감독의 상습적이었던 폭행을 폭로했다.
박철우는 "그 일이 있었을 때(2009년) 이미 고소를 취하했다.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다. 진정 반성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걸 마치 한 번의 실수 혹은 감정에 의해서 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라며 "그분께서 정말 좋은 지도자가 되어 돌아오셨다면 내가 이런 감정이 남아 있겠나. 그분이 진정으로 변하고 사과하셨다면 내가 감정이 아직 남아 있겠느냐"고 이 감독의 진정한 반성이나 사과가 없었음을 강조했다.
12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폭력의 '피해자' 박철우는 '가해자' 이상열 감독과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가해자의 한 마디 말에도 애써 덮어뒀던 과거의 상처가 되살아나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다. 사건 당시보다 나이도 많아졌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까지 뒀지만, 폭행 피해의 트라우마는 이렇게 깊고 무섭게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용기를 내 폭로에 나섰다고 밝힌 박철우는 "처벌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이상열 감독이)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또 "배구가 이런 나쁜 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이 너무 싫다. 이번 기회에 뿌리 뽑아야 한다"고도 했다.
이재영-이다영 자매의 과거 학교폭력 논란이 불씨가 돼 배구계의 어두운 민낯이 드러났다. 이후 (학교)폭력 문제가 폭발적인 화력으로 배구뿐 아니라 스포츠계 전체를 강타하고 있다. 쉬쉬 하며 넘어왔던 스포츠계 폭력의 사슬을 선수, 지도자, 팀, 관계기관이 뜻을 모아 박철우의 말처럼 이번에는 뿌리 뽑아야 한다. 지금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는 또 다른 폭력 피해자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디어펜=석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