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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 경제회복, 사적자치 회복부터

2015-01-17 11:25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 조동근 명지대교수
프랑스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레데릭 바스티아(Frederic Bastiat, 1801~1850)는 거의 두 세기 전 사람이지만 놀라운 관찰과 예지의 소유자다. 그는 일명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 비유로도 유명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동네 불량배가 제과점 유리창을 고의로 깼다. 제과점 주인은 불량배가 깨뜨린 유리창을 250달러에 갈아 끼웠다. 덕분에 유리가게 주인은 250달러를 벌고 이를 다른 데 지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돈이 계속 지출되고 그때마다 다양한 소득이 창출됐다. 결국 불량배는 대중의 ‘은인’인 셈이다.

물론 잘못된 추론이다. 무엇을 간과했을까? 처음 유리가게 주인이 돈을 번 건 맞는다. 하지만 제과점 주인이 유리창을 갈아 끼우기 위해 지불한 돈은 사실 양복을 사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결국 양복점 재단사는 유리창이 깨지는 바람에 돈 벌 기회를 잃었다. 이 같은 ‘기회 상실’은 무한한 순환 과정을 밟는다. 유리가게 주인의 사업 이득은 재단사의 사업 손실이고 그 과정에선 어떤 고용도 창출되지 않았다. 구경꾼들은 빵집 주인과 유리가게 주인만 생각했을 뿐 (잠재적 제3자인) 양복점 재단사의 존재는 처음부터 머릿속에 없었다. 만들어지지 않아 실체조차 없는 양복을 못 본 것이다.

   
대중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 깨진 유리창 에피소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은유하고 있다. 경제문제는 조각으로 보지말고, 전체로 봐야 한다.  규제는 세금이다. 사적 자치를 공적규제로 치환하면서 기업가정신이 부활하길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대중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 깨진 유리창 에피소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what is seen and what is not seen)’의 은유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이 일화를 통해 바스티아는 말한다, 문제를 ‘조각’으로 보지 말고 ‘전체’로 보라고.

경기가 조금만 나빠지면 대중은 ‘이 위중한 시기에 정부는 대체 뭘 하고 있나’라며 불만을 제기한다. 정부는 경기 회복을 위해 부족분만큼의 지출을 계획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친다. 그게 뭘까?

예컨대 ‘다리 건설’이란 공공사업 프로젝트로 300개의 일자리가 생긴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다리 건설로 창출된 일자리는 다른 민간 일자리를 파괴한다. 일자리의 ‘전환’만 일어나는 것이다. 공공 프로젝트 때문에 상실된 일자리, 건설되지 않은 집, 생산되지 않은 승용차와 세탁기를 보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대중의 눈엔 다리 건설 공사를 위해 고용된 사람만 보인다. 당연히 정부 발주 대형 프로젝트는 ‘기적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농부·자영업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신용 공여는 생산을 감소시킬 수 있다. 명칭 자체가 ‘신용 증대’가 아니라 ‘부채 증대’였더라면 빌리는 쪽도, 빌려주는 쪽도 보다 신중했을 것이다. 정부의 대출 업무 참여는 ‘납세자 돈’으로 감행하는 정부의 모험이다. 정부 신용 옹호자는 “신용 약자에게 대출해줌으로써 그들을 생산적 사회 구성원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부 대출 종사자는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했을 때 “그들(대출 종사자)의 잘못이 아니다”란 사실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정부 대출은 민간 대출에 비해 자본과 재원을 낭비할 공산이 크다. ‘빌려준 돈으로 자본을 지니게 된 사람’은 보지만 ‘당초 대출 대상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을 때 자본을 쥘 수 있는 사람’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부 대출은 민간 대출에 비해 자본과 재원을 낭비할 공산이 크다. ‘빌려준 돈으로 자본을 지니게 된 사람’은 보지만 ‘당초 대출 대상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을 때 자본을 쥘 수 있는 사람’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주 공평한 사람조차 ‘공급 증가와 새로운 발견’이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는 이익보다 좁은 곳에 집중된 손실을 더 잘 본다. “손실 난 산업을 죽도록 내버려두면 해당 산업 종사자는 길거리로 쫓겨날 것”이란 주장이 먹힌다. 정치인의 신속한 행동으로 특정 산업 구제 법안이 마련된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기술 발전이란 없다. 마찬가지로 대중의 기호나 공중도덕의 변화 역시 아무리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해도 누군가는 반드시 손해를 입게 마련이다. 모든 산업이 동시에 확장되는 건 불가능하다. 새로운 산업이 충분히 성장하려면 오래된 사업의 위축이나 소멸을 허용해야 한다. 하지만 대중은 여전히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정부 조직이 비대해지고 예산이 팽창할수록 ‘사적(私的) 자치’로서의 시장 영역은 점차 좁아진다. 정부 예산은 그 자체가 기회비용을 갖는다. 정부가 세금을 1원 덜 걷으면 그 돈은 내 주머니에 남아 있다. 누가 그 1원을 목적에 맞게 잘 쓸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GDP 대비 정부 지출 비중은 점차 느는 추세다. “소득 증대와 부(富)의 축적, 인구 증가 등으로 공공재의 사회 수요가 커지고 있어 정부 지출 증가는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투표 같은 공공선택(public choice)엔 내재적 함정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공공 지출 규모를 주제로 투표가 진행될 때, 투표자는 ‘지출에 필요한 자금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부담할 것’이라고 믿는다. 투표 자체가 그렇게 고안돼 있다.

좋은 세금이 되려면 부담 주체와 지출에 따른 수혜 대상이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세금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책임이 강화된다.

좋은 세금의 조건으로 ‘정치적 책임’을 언급한 경제학자는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다. 그에 따르면 좋은 세금이 되려면 부담 주체와 지출에 따른 수혜 대상이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세금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책임이 강화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부담과 혜택의 귀속을 분명히 하려는 노력은 간데없고 형평성과 공동선 따위의 정치 논리가 그 자리를 채운다.

우리나라는 7년째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에 갇혀 있다. 최근엔 ‘저성장의 구조화’ 조짐마저 뚜렷해지는 실정이다. 이는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휘몰아친 ‘경제 민주화’ 광풍, 그에 편승한 반(反)시장적 덩어리 규제의 역기능과 무관하지 않다.

규제를 지키려면 시간과 돈이 든다. 말하자면 규제는 ‘감춰진 세금’이다. 국민이 내는 세금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나마 기준과 절차가 법으로 통제되지만, ‘안 보이는 세금’인 규제는 담당 부서가 사실상 백지위임을 받은 것이어서 부과나 집행에 견제를 거의 받지 않는다. 자연히 대부분의 규제는 ‘공무원 관점’에서 제정, 집행된다.

규제는 ‘감춰진 세금’이다. 국민이 내는 세금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나마 기준과 절차가 법으로 통제되지만, ‘안 보이는 세금’인 규제는 담당 부서가 사실상 백지위임을 받은 것이어서 부과나 집행에 견제를 거의 받지 않는다.

사회가 진화하려면 자연선택의 소재가 되는 ‘변이(variation)’가 끊임없이, 풍성하게 나와야 한다. 변이는 개개인의 다양한 실험을 통해 도출되며 시장은 크고 작은 실험이 시도될 수 있는 무대 역할을 한다. 시장의 자유를 제한하고 ‘사적 자치’를 ‘공적 규제’로 치환하면서 기업가정신이 살아나길, 시장이 활력을 띠길 바라는 건 난센스다.

우리 경제를 옥죄고 있는 마찰과 간섭, 규제와 그로 인한 간접 손실(potential loss)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미 두 세기 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은유로 설파한 바스티아의 예지가 놀라울 뿐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출처:삼성투모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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