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영예의 오스카 여우조연상까지 38개의 트로피를 수상하는 동안 윤여정이 보여준 언행은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솔직하고 가감 없이 허를 찌르면서도, 결코 불쾌한 느낌을 주지 않는 여배우. 러블리한 할머니 연기에 흠뻑 빠졌던 관객들은 연이은 수상 낭보 속 윤여정이 뽐낸 위트에 더 깊이 매료됐고, 이제 그녀의 인터뷰 한마디 한마디가 화제가 될 정도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사진=TV조선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 방송 캡처
▲ 아만다 사이프리드도 사랑에 빠지게 한 오스카 수상 소감
한국 영화계 102년 역사상 배우로는 처음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안은 윤여정은 유머가 돋보이는 수상 소감으로 딱딱한 시상식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먼저 윤여정은 "제 이름은 윤여정인데, 유럽분들은 많은 분이 제 이름을 '여여'라고 하거나 그냥 '정'이라고 부른다. 여러분 모두 용서해드리겠다"고 인사했다. 백인들이 아시아 배우의 이름을 자신의 편의대로 부르는 모습을 귀엽게 일침한 것.
함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들에게는 예를 갖추고 그들의 연기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난 이런 자리에서 경쟁을 믿지 않는다. 제가 어떻게 글렌 클로즈와 같은 대배우와 경쟁을 하겠나. 글렌 클로즈의 훌륭한 연기를 너무 많이 봐왔다. 다섯 명의 후보가 있지만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경쟁이란 있을 수 없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그냥 운이 좀 더 좋아서 서 있는 것 같다. 또 미국분들이 한국배우들에게 굉장히 환대를 해주시는 것 같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이 같은 윤여정의 소감에 글렌 클로즈는 미소로 화답했고,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감동한 듯 두 손을 모으고 눈시울을 붉혔다. 특히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윤여정의 소감 중 "I love her"라는 말을 내뱉으며 박수를 치는 모습도 포착됐다.
이어 윤여정은 "저희 두 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두 아들이 제게 일하러 나가라고 종용을 한다. 그래서 감사하다. 아이들의 잔소리 덕분에 엄마가 열심히 일했더니 이런 상을 받게 되었다"며 두 아들의 이야기를 전해 또 한 번 웃음을 안겼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을 영화계에 데뷔하게 한 故 김기영 감독에게 감사를 전해 현장을 감동으로 물들였다.
이날 오스카 시상식이 끝난 뒤 뉴욕타임스는 윤여정을 '최고의 수상 소감'을 한 수상자로 꼽았고, CNN 방송은 "쇼를 훔쳤다"고 표현했다. ABC뉴스 윌 갠스 기자는 "(윤여정 씨는) 진실하고 아주 재미있다. 연설하는 동안 아만다 사이프리드 입을 봤나.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다. 우리 모두 그녀를 사랑한다. 그 연설을 37번이나 봤는데 9번이나 '와' 하는 순간이 있었다. 이번은 그녀의 오스카였다"고 전했다.
▲ 직설적이고 노련한 말솜씨, 고상한 체하는 영국인들도 사로잡았다
오스카 시상식이 있기 전 영화계의 관심이 집중됐던 '2021 영국 아카데미상'에서 윤여정은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지난 12일 윤여정은 '종말'의 니암 알가르, '어느 소녀 이야기' 코라 알리, '보랏 서브시퀀트 무비필름'의 마리아 바칼로바, '주다스 앤 더 블랙 메시아' 도미니크 피시백, '카운티 라인스' 애슐리 매더퀴 등 쟁쟁한 후보들과 경합 끝에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한국 배우가 수상자로 호명된 건 윤여정이 처음이라는 사실도 화제를 모았으나 윤여정의 직설적이면서도 재치 있는 수상 소감이 영국인들을 사로잡았다. 윤여정은 수상 소감에 앞서 "에든버러 공작(필립공)의 별세에 애도의 마음을 보낸다"며 지난 9일 타계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 필립공을 추모했다.
이어 전해진 수상 소감이 웃음과 박수를 이끌어냈다. 윤여정은 "이번 시상식은 특별히 고맙다"며 "고상한 체한다(snobbish)고 알려진 영국인들이 좋은 배우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있고 영광이다"라고 전한 것.
익히 알려진 영국인들의 성향을 짚으면서도 이를 깎아내리거나 과장하지 않고, 깊은 영광을 표함으로써 영화제의 위상도 드높인 소감이었다. 이에 영국 더타임스는 "올해 영화제 시상식 시즌에서 공식 연설 챔피언"이라며 "최고의 연설을 했다"고 극찬했다.
▲ TPO(Time, Place, Ocaasion) 따른 화법, 더욱 와닿는 윤여정의 말말말
윤여정은 자신이 참석한 시상식의 성격에 따라, 때와 장소에 맞게 수상 소감을 달리하며 의미를 더했다. 미국 대표 독립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에서는 "사실 이 영화 안 하고 싶었다. 고생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라는 멘트로 어려운 독립영화 현장을 전해 공감과 웃음을 이끌어냈다.
이 같은 재치는 준비된 시상식이나 현장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오스카 시상식 후 이어진 백스테이지 인터뷰에서 터진 논란의 상황에서도 윤여정은 우문현답의 모범을 보여 화제를 모으고 있다. 윤여정은 "브래드 피트에게서 무슨 냄새가 났느냐"며 브래드 피트를 가까이서 만난 소감을 묻는 말에 "냄새는 맡지 않았다. 나는 개가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윤여정은 브래드 피트가 젊었을 때 촬영한 영화 등을 봤다며 주제를 돌렸고, "그는 나에게 영화 스타다. 그가 내 이름을 호명한 것이 믿을 수 없다"고 무례한 인터뷰를 너무나도 매끄럽게 마무리했다. 현지에서는 해당 질문을 한 기자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한편, 윤여정의 임기응변이 돋보인 답변에 뜨거운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전 세계가 윤여정에게 열광하는 이유다. 순수하면서도 노련하고, 적정선을 지키면서도 한없이 속시원한, 'Lovely'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해외 매체들이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라고 자신을 소개할 때 윤여정은 "메릴 스트립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이고, 전 단지 한국의 윤여정"이라고 되짚었다. 언중유골이다. 놀라운 호연으로 전 세계를 수놓은 하나의 배우와 비견되는 것도 영광스러운 일이나, 자신을 비롯해 많은 팬들이 '윤여정은 독보적인 브랜드로서 사랑받았으면 하는' 마음일 테다.
[미디어펜=이동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