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의 돌풍이 거세다. 이미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에는 자신과 우리네 부모의 삶이, 할아버지 세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는 가족을 위해 살아온 옛 세대의 기억을 뒤돌아본다. 주인공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하나의 가족을 일군다. 반면 영화 국제시장에 대해 못마땅하고 불편한 이들이 있다. 좌편향 일색의 영화계 사람들이다. 영화평론가들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양쪽의 시선을 자유경제원이 다루어보았다. 자유경제원은 20일 자유경제원 회의실에서 '국제시장, 우리 시대에 주는 의미' 토론회를 개최한다. 자유경제원은 영화 국제시장이 우리 시대에 전하는 의미에 대해서 탐색한다. 아래 글은 발표자인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의 발제문이다. |
국제시장, 덕수는 왜 서독.베트남으로 가야 했을까
▲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
영화 국제시장의 경제적 의미
-‘덕수’를 통해서 본 대한민국 성공 신화의 시작-
I. 배경: 덕수는 왜 서독으로 베트남으로 가야만 했을까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는 10대의 어린 시절부터 가장의 역할을 떠맡는다. 어머니와 두 명의 동생 등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구두닦이부터 시작해 열심히 살아간다. 남동생이 대학에 입학한 것을 계기로 학자금 마련을 위해 서독에 광부로, 이후에는 여동생의 결혼자금 마련을 위해 베트남에 근로자로 파견된다. 서독에서의 광부생활이나 총알이 빗발치듯하는 전쟁터였던 베트남에서의 근로자생활이나 덕수는 생사를 넘나드는 고초를 겪어가며 돈을 벌어야만 했다. 덕수는 왜 그 힘들고 험한 서독에서의 광부생활과 전쟁터인 베트남에서의 근로자생활을 택해야만 했을까.
(1) 미국 무상원조의 감소
정부 수립 이래 대한민국은 재정의 상당부분을 미국의 무상원조에 의존했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적인 유동성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해외무상원조 등을 통해 달러화를 해외로 방출했다. 달러화의 가치를 금에 고정한 상태에서 달러화의 무제한 태환도 보장했다.
그런데, 1958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국제수지가 사상 처음 적자를 기록하고, 해외에 방출한 달러가 미국의 금보유량에 육박하자 달러화에 대한 신뢰가 하락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미국은 국제수지대책의 일환으로 개도국에 대한 무상원조를 유상원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지정학적인 위치 등의 이유로 단일국가로 가장 많은 무상원조를 받고 있던 한국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미국의 대한 원조는 1957년 3억8920만 달러를 정점으로 1958년 3억2127만 달러, 1959년 2억2220만 달러, 1960년 2억4539만 달러, 1961년 1억9910만 달러로 감소하게 된다.
▲ 독일 광부로 가고자 열심히 면접에 응하고 있는 덕수.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
(2) 한국의 상황
1960년대 초기 한국의 경제상황은 참혹한 수준이었다. 6.25 전쟁을 치르며 그나마 있었던 산업시설은 붕괴되었고, 경제가 침체되어 경제성장의 기반을 형성할 아무 것도 없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70달러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125개 국가 중에서도 최하위 국가에 속했다. 전체 노동력의 60%가 명목상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농업의 노동생산성이 극히 낮았던 것을 고려하면 농업종사자의 대부분이 은폐실업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도시지역의 공식 실업률은 16~17%에 달했다. 도시와 농촌을 모두 고려할 경우 전체 노동력의 약 절반 가까이가 사실상 실업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의 노동공급 상황은 “무제한적” 노동공급 상태에 있다고 할 정도로 실업문제는 심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경제를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그것이 또한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서둘러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지만, 자원도 빈약하고 자본도 없는 나라에서 경제개발은 난제 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핵심은 수입대체 공업화전략을 통한 자립경제기반 구축이었고 목표성장률은 연평균 7.1%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우선 국내시장의 협소함을 무시하고 추진하려했던 수입대체 공업화전략의 문제도 문제였지만, 자금조달의 문제는 더욱 큰 난관이 아닐 수 없었다. 1961년 11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아직 발표도 하지 않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들고 미국을 방문하여 지원을 얻어내려 했다. 하지만 미국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한국에는 경제지원을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을 인정하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연쇄적으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금조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1961년 일반은행을 국유화하고 이어 1962년 6월 10일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고소득층의 유휴자금을 밖으로 끌어내 경제개발 계획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자 한 것이다.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숨겨져 있던 돈이 예상했던 것처럼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중에 유동성 부족 현상이 나타나 산업활동이 더욱 위축되고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국내자본 확보에 실패한 정부는 외자유치에 노력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1962년도 외자유치 목표는 5천만 달러였으나, 실제 도입액은 목표의 12%에 불과한 6백만 달러에 그쳤다. 1963년에는 목표의 절반 정도만 도입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실시된 지 3년 후 목표성장률을 7.1%에서 5.0%로 하향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함께 수입대체 공업화전략은 수출주도형 전략으로 전환된다. 시행착오를 거쳐 수출주도형 전략으로 선회를 하지만, 자금조달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군사정권을 연장했다고 보는 미국의 시각은 여전히 차가웠다. 아직 국교정상화가 되지 않은 일본으로부터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량실업과 빈곤, 그리고 저성장에서 탈출할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 독일 광부로 일하고 있는 덕수.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
(3) 파독: 실업해소와 외화획득
미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일본으로부터의 외자도입은 아직 시기상조인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으로 눈을 돌렸다. 서독과 한국은 같은 분단국가라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었지만, 서독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위를 보여주는 모델이었으며, 박정희는 이점을 높게 평가했고, 서독도 박정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1964년 12월 서독 방문 출국인사에서 방문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종전 후의 그 폐허 위에서, 더구나 공산주의 세력과 대치하면서, 오늘의 위대한 경제건설과 번영을 이룩한 독일연방공화국의 부흥상을 샅샅이 시찰할 것이며...” 서독 수상 에르하르트 또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진정한 반공이란 공산주의를 경제적으로 압도하는 것이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고, 박정희는 이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인강의 기적’을 통해 눈부신 성장을 이뤘고, 그 과정에서 노동력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초기에는 동독 탈출자와 동유럽에서 추방된 독일인들로 부족한 노동력을 채웠으나, 동유럽 독일인의 유입은 지속될 수 없었고 동독인의 유입 역시 1961년 베를린장벽 설치와 함께 중단되었다. 통상 노조는 노동력 유입으로 인한 임금하락을 우려해 노동력 유입에 반대하지만, 당시 서독에서는 노동력 부족으로 인한 경제성장의 둔화를 막아야 한다는 데 노사가 의견을 같이할 정도로 노동력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량실업과 빈곤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인력송출을 통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화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절실한 필요성도 있었다.
나아가 서독에 진출한 노동력을 담보로 상업차관을 받을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정래혁 당시 상공부장관이 서독에 날아가 우여곡절 끝에 3천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받기로 했지만, 이 차관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 지급보증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빈곤국 중의 빈곤국인 한국의 은행이나 정부를 믿을 수 없었고, 국제사회도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 독일 측에서 한국의 광부 5천 명과 간호사 2천 명을 독일로 파견하고 그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가져가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63년 12월 21일 제1진 247명이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독으로 향했다. 이후 1977년까지 7,968명의 광부가 파견되었고, 아울러 1966년~1976년까지 약 1만2000여 명의 간호사/간호조무사가 파견되는 등 총 2만여 명이 서독에 파견되었다.
당시의 한국과 서독의 경제상황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5년 유엔이 작성한 경제통계에 따르면 대만의 1인당 GNP가 200달러, 태국이 113달러, 필리핀 237달러인데 반해 한국은 필리핀의 절반도 되지 않는 107달러였다. 경제개발의 성과가 가시화된 1970년 한국의 1인당 GNP가 251달러였을 때, 서독은 한국의 11배인 2,748달러에 달했다. 파독근로자들이 받은 임금은 한국 임금수준의 약 10배 이상이었다. 1964년에 서독에 파견된 한 근로자의 한 달 실수령액은 약 66,360원(789.62마르크)였다. 그는 1년 반 동안 송금하여 미아리에 70만원 상당의 주택 한 채를 구입했다고 한다. 주택구입비 70만원은 1년 반 동안의 실수령액의 약 59%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그는 수입의 약 60%를 저축하여 1년 반 만에 주택 한 채를 구입한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실업과 가난에서의 탈출을 꿈꾸던 젊은이들은 기꺼이 서독으로 향했다. 최초의 광부 모집은 1963년 8월 전국에서 실시되었는데, 총2,895명이 응모해 15:1의 경쟁률을 뚫고 194명이 최종 선발되었다. 1964년 11월 공모에는 총 3,158명이 응모해 791명이 최종 선발되어 4:1의 경쟁률을 보였다. 광부 모집에 수만 명의 지원자가 몰려 높은 경쟁률을 보였고, 탄광 노동과는 어울리지 않을 대졸출신 고학력자들까지 몰려들었다는 사실은 당시 국내의 실업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다른 한편, 언론이 파독 공모 1차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마치 고시합격자처럼 각 신문에 명단이 게재될 정도로 서독에 근로자로 파견되는 것이 대단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 베트남에서 일하던 중 휴식을 취하고 있는 덕수.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
II. 경제성장의 밀알이 되었던 파독 근로자들의 외화송금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은 많은 고생을 하였다. 40도C를 넘나드는 지하 1천 미터 막장에서 채탄에 나섰고, 간호사들은 시체 닦는 일에서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였다. 탄광 입구에는 ‘글뤽아우프(Glueckauf)’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고, 광산촌에서의 아침 인사 역시 ‘글뤽아우프’였다고 한다. ‘죽지 말고 살아서 올라오라’는 뜻으로 매일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극심한 공포감에 떨며 일해야 했다. 파독기간 중 광부 사망자는 78명, 탄광 근무 중 사망자는 26명이었다. 거의 매일 2~3명씩 막장에서 부상을 당했다. 두렵고도 힘든 작업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 근로자들은 견디지 못하고 달아났지만, 우리나라 근로자들은 묵묵히 채탄을 하고 환자를 돌봄으로써 독일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독일인들은 한국 간호사들을 ‘코리안 엔젤’로 불렀다. 이러한 감동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 최초로 서독을 국빈방문할 때 길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한 사람들 대다수가 독일 국민들일 정도로 컸다. 그만큼 우리나라 근로자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절박함이 컸던 것이다.
이렇게 악착같이 일해서 번 돈은 국내로 송금했다. 정부가 내걸었던 파독 조건은 “3년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 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3년 순환제도는 정부가 파독 인력송출의 주요 목적인 송금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제안한 제도였다. 하지만, 이 조건은 강제가 따르는 의무는 아니었다. 광부와 간호사들은 본인이 직접 수령한 임금 중 일부를 본인의 의지에 따라 송금했다. 다시 말해, 외화획득이라는 국가의 목표 실현 여부는 전적으로 파독근로자의 개인적인 결정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렇지만 파독된 근로자의 60% 이상이 자신이 번 외화를 국내로 송금했다. 수도 없이 야근을 하며 벌어들인 돈 중 ‘김치 담글 돈만 빼고 송금했다’고 할 정도로 최소한의 생계비를 제외하고 절약하여 송금했다. 수입의 80% 이상을 송금하기도 했다.
이들이 송금한 외화의 규모는 아래 <표 1>과 <표 2>에 나와 있다.
▲ 총수출액 대비 파독 노동자의 외화송금액. (단위: 천 달러) |
<표 1>을 보면 1965년 273만4000달로, 1966년 477만9000달러, 그리고 1967년 579만1000달러를 송금했다. 1965년부터 1967년까지 3년 간 파독근로자의 송금액은 총 1300만 달러가 넘었고, 송금이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78%에 달한다. 수출의 경우 원자재와 인건비 등 제반 비용과 보조금 지급 등의 비용을 발생시키는 반면, 파독근로자의 송금은 이런 손실비용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순이익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총수출액 대비 송금액 비중은 3%에 육박할 정도로 크게 늘어난다.
<표 2>는 1964년부터 1975년까지 10여년 간 파독근로자들이 국내로 송금한 송금액을 국민총생산(GNP)과 대비시켜 본 것이다. 1964년부터 1975년까지 파독근로자의 총 송금액은 1억 달러가 넘는다. <표 2>에서의 송금액을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품수출액수로 환산하기 위해 송금액에 1.66을 곱해 보면 총 송금액은 약 1억7000만 달러에 달한다.
▲ GNP 대비 파독노동자 송금액 (단위: 천 달러) |
물론 GNP 대비 송금액 비중이 눈에 띄게 많은 것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1960년대 당시의 한국의 자본상황을 살펴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6.25 전쟁 직후 1957년까지 연간 약 3억 달러에 달러의 미국의 무상원조는 대부분 생필품이나 전쟁복구에 쓰여졌다. 이후 1961년까지 연간 2-3억 달러의 미국의 원조는 대부분 소비재 수입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 막대한 자금이 요구되었고, 이 자금 중 일부는 외자도입 등을 통해 조달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로 인해 정통성 문제를 안고 있는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정치적으로 매우 부담스러운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까지도 감내하는 모험을 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외자도입은 그만큼 절박하고 절실했던 문제였다.
더구나 상환부담이 따르는 차관과 비교해보면 해외근로자의 송금이 갖는 이점은 분명하다. 과거 우리나라 경제개발 과정에서 종종 논란이 되었던 ‘외채 상환부담’ ‘외채망국론’ 등을 상기한다면, 경제개발의 결과를 알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상환부담이 없는 파독근로자들이 송금한 외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파독 근로자의 국내송금은 그 규모에 상관없이 한국경제의 ‘종자돈’으로 평가된다.
파독근로자들이 국내로 송금한 약 1억 달러 이상의 금액이 실제로 경제개발에 얼마나 커다란 도움이 되었는지는 한국이 잘 활용하여 성공했다고 하는 외자유치 금액과 비교하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래 <표 3>은 1952년부터 1969년까지의 공공차관 제공 현황을 나타낸 것이다.
▲ <1952-1969>년 국가별 공공차관 제공 현황, (단위: 10만 달러) |
1952년부터 1969년까지 약 20년 간 국제사회가 한국에 제공한 공공차관은 약 7억 달러였다. 그 중 미국이 4억5880만 달러로 가장 많았고, 우리 근로자들이 파견되었던 서독의 공공차관은 약 20년에 걸쳐 3770만 달러였다. 이와 비교해본다면 파독근로자들이 10년에 걸쳐 국내에 송금한 1억 달러 이상의 외화가 어느 정도 큰 규모였으며, 그것이 한국의 경제개발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었을 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외화가 귀했던 당시의 대한민국에게는 파독근로자들이 국내로 송금한 외화야말로 너무도 소중한 경제도약의 씨앗이 되었다.
III. 베트남 특수: 경제도약의 발판
베트남 파병은 1964년 9월 1차 파병을 시작으로 휴전협정이 조인되는 1973년까지 8년 8개월 간 이어졌다. 파독근로자들이 국내로 송금한 외화가 대한민국 경제도약의 씨앗의 역할을 했다면, 파월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경제도약의 발판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1960년~1964년까지의 실질 GDP 성장률은 5.6%였던데 반해, 1965년 이후 베트남 파병기간 동안의 실질 GDP 성장률은 10.0%에 달했다는 사실로부터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래 <표 4>에서 보듯이 베트남에는 군인만 파병된 것이 아니다. 군인은 연인원 35만 명이 파병되었고, 같은 기간 동안 영화 속의 ‘덕수’처럼 기술근로자로 파견된 인원이 56,000여 명에 달했다.
▲ 베트남 파병과 인력수출 추이 (단위: 백 명) |
한국은 베트남전에 참전하면서 베트남 특수를 누리게 된다. 베트남 특수를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고 또 연구자에 따라 각기 구분하기도 한다. 한 연구(박근호: 1993: 19)는 베트남 특수를 베트남에 대한 수출, 한국군에 대한 군납 그리고 무역외수입(용역 및 건설군납, 군인 및 기술자 송금, 특별보상지원, 보험금) 등을 베트남 특수로 정의하고, 1965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이 받은 베트남 특수 총액을 10억2200만 달러로 추정된다. 또 다른 연구(佐野孝治: 1992: 213)에 의하면 파병기간 중 한국에 주둔한 미군에 대한 군납을 포함하여 파월장병 및 기술자 송금액 등 베트남 특수 총액을 약 17억 달러로 추정되고 있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파병된 한국군이 해외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2억3500만 달러였고, 이 중 82.8%인 1억9500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다.
▲ 베트남 특수와 한국의 경제성장 (단위: 백만 달러) |
<표 5>에 따르면 국내총생산에서 베트남 특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연구자 및 연도에 따라 최고 5.29%(1967년, GDP 비율 (B))에서 최저 0.65%(1965년, GDP 비율 (A)) 수준이었다. 높낮이의 차이는 있지만 베트남 특수는 8년간 꾸준히 우리나라 경제에 커다란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편 한국군에 대한 지출과 파월장병 및 기술자의 송금, 외국으로부터 받은 운임 보험료 등이 급증하면서 무역외수지가 급증하여 1969년도에 최대 규모 약 2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외국의 무상원조와 기부금 및 구호물자 등이 지속적으로 도입되어 이전거래도 안정적으로 흑자를 기록하였다. 무역외수지와 이전거래의 증가는 당시 경상수지 적자를 감소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이로 인해 외환보유고도 증가하였다. 베트남 파병기간 동안 외환보유고는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1965년 1억3800만 달러에서 1972년 약 7억 달러 수준으로 증가하였다.”(조재호)
다른 한편 베트남 특수와 수출확대는 대기업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 베트남에 진출했던 현대건설, 한진상사, 대림산업 등이 베트남에서 자본축적의 기회를 잡았다. 현대건설은 베트남 항만공사에 참여하여 큰 부를 축적하면서 한국 건설업계 1위로 도약하였고, 여기서 축적한 기술력은 이후 중동건설 진출에 큰 힘이 되었다. 한진상사는 66년 이후 베트남의 미군 군수물자 하역 및 수송을 독점하면서 연간 2,500만 달러의 이익을 냈다. 한진상사는 베트남 진출을 계기로 대한항공을 흡수하는 등 이후 국내 최대의 수송회사로 성장한다.
수출 역시 파병을 기점으로 급증한다. 1965년 수출증가율은 전년도 대비 47.0% 증가하였으며, 특히 대미 수출증가율은 73.5%를 기록하였다. “당시 대미 수출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미국이 베트남 파병 요구에 응했던 한국에게만 독점적으로 부여한 우호적인 수출조건, 즉 보답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대미수출은 1964년 약 3,600만 달러에서 1972년 7억6,000만 달러로 21배 증가했다. “산업기반이 극히 취약했던 한국경제의 상황을 고려할 때, 급격한 대미수출 증가는 한국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한국의 전체 수출은 1965년 1억7500만 달러에서 1972년 16억2400만 달러로 연평균 37.5% 증가하였다.
베트남 파병은 베트남 특수를 통해 경제성장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고, 경상수지 적자해소 및 외환보유고 확충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함께 수출의 급격한 증가와 우리나라 기업들의 대기업으로의 성장은 우리나라 경제가 도약하는 데 튼튼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경제도약의 발판 역시 총알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피와 땀으로 일궈낸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군수품 납품을 위해 베트남 정글지대를 헤치면서 지나가는 덕수와 일행.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
IV. 덕수의 삶은
파독과 파월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무게는 주인공 덕수가 돌아가신 아버지 사진 앞에서 흐느끼며 하는 말로 대변된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파독근로자와 파월장병 및 파월근로자들의 경제적 기여는 상징적으로 주인공 덕수의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내는 그래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기 참 다행이라꼬.”
이 말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 방문 중 파독근로자들 앞에서 했던 다음과 같은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우리 열심히 일합시다.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잘 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선배 세대들은 지독하게 가난한 나라를 물려주지 않으려 피와 땀으로 부를 일구었다. 파독근로자와 월남파병의 경제적 의미는 바로 이 말에 함축되어 있지 않을까.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