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해운시장이 코로나19에도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가운데, HMM을 주축으로 정부의 해운재건 5개년 계획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2017년 한진해운 파산 이후 정부의 강화된 공적금융이 국가 해운경쟁력을 신장한 모습이다. 이에 미디어펜은 우리나라 선박금융의 현주소를 돌이켜보고, 미래 정책금융이 나아갈 길을 4회(➀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해운물류시장…“수출 포기할 판” ➁집행률 ‘1.5%’…산은 기안기금 안 쓰나, 못 쓰나 ➂HMM, 국적 중소선사보다 141배 금융수혜…격차 배경은? ➃K-선박금융의 길, ‘금융-해운-조선’ 상생 패키지 마련해야)에 걸쳐 되짚어본다. [편집자주]
[미디어펜=류준현 기자] “기간산업안정기금(기안기금)이요? 기안기금을 활용하기엔 금리조건이 너무 안 좋습니다. 돈을 끌어쓰면 대주주가 바뀔 수도 있고요. 지원을 받는 순간 지배구조가 바뀌다보니 도산 직전 상태인 기업들 외에는 관심도 안 가질 거예요.”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한국산업은행이 운용 중인 기안기금에 대해 이 같이 밝혔다. 정부가 코로나19로 유동성 위기를 겪는 국가기간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산은을 통해 기금을 조성했지만 사실상 ‘고리대금‘을 이용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산은은 세계무역기구(WTO)의 보조금 이슈와 시혜성 자금지원 의혹 등이 불거질 수 있는 만큼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18일 해운업계와 금융권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해 5월 코로나19 여파로 유동성 위기에 놓인 해운‧항공 등 국가기간산업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겠다며 산은법과 시행령을 개정해 기안기금을 편성했다.
같은 해 7월부터 본격적으로 신청을 받았지만 이날까지 신청‧수혜를 누린 곳은 아시아나항공과 제주항공 등 항공업계 두 곳과 일부 기간산업 협력업체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로나19로 여객수요가 사실상 ‘0’에 수렴하면서 대규모 적자와 실직사태가 우려됐기 때문이다.
지원액은 아시아나 3000억원, 제주항공 321억원, 협력업체 2821억원 등 총 6140억원. 심의회가 조성한 기금액 40조원에 견주면 집행률은 단 ‘1.5%’에 불과한 셈이다. 기안기금은 당초 지난달 30일을 끝으로 지원기한이 종료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가 지속되고 있는 점을 고려해 올 연말까지로 연장했다.
기간산업안정기금 운영체계 / 자료=한국산업은행 홈페이지 캡처
국내 해운업계는 왜 수혜를 누리지 못했을까. 해운업계 일각에서는 △까다로운 신청조건 및 지원기준 부족 △시중은행보다 높은 금리조건 △기금운용기간이 짧은 점 △지배구조 문제 등을 들어 기금 신청이 사실상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다고 평가했다.
기안기금은 산은법 시행령에서 정한 기간산업을 영위하는 기업을 지원하도록 돼 있다. 대표적으로 항공업‧해운업을 비롯해 자동차‧조선업‧기계‧석유화학 등 고용안정 및 국가안보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9개 업종이다. 여기에 총차입금 5000억원 이상, 근로자수 300인 이상을 충족해야 한다. 국내 해운업계는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기업체가 사실상 국적 원양선사인 HMM 외엔 없을 거로 보고 있다.
또 기안기금의 수혜를 누린 기업은 △5월1일 기준 근로자 수 최소 90% 이상 유지 △총 지원액의 20% 범위에서 출자에 따른 자금지원 포함할 것 △경영개선 노력 △이익배당, 자사주 매입 금지 △고소득 임직원 보수 인상 및 계열사 지원 등의 목적 사용금지 등의 요건을 지켜야 한다.
이 허들을 충족한 기업은 주채권은행에서 △코로나19로 인한 피해여부 △코로나19 이전 구조적 부실 여부 △자금 지원신청 전 유동성 확보 노력 △기금지원을 통한 경영개선 가능여부 등을 검토해 기금운용심의회가 지원여부를 거쳐 최종적으로 지원한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피해여부’를 입증해야 하는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동안 글로벌 해운업계의 오랜 치킨게임으로 장기 불황을 겪어온 국내 해운업계로선 피해 원인을 코로나19 때문으로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
HMM을 제외한 한일‧한중‧동남아항로 등 아시아역내항로를 취항하는 국적선사들은 대체로 1000~5000TEU급의 중소형 컨테이너선을 핵심 선대(보유 선박)로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 1위 머스크라인의 자회사 MCC트랜스포트, 세계 2위 MSC, 일본 ONE 등 글로벌 선사들이 중소형급 유휴선박들을 대거 역내항로로 캐스케이딩(선박의 전환배치)하면서 상황은 악화됐다.
이들은 수심 문제가 없는 노선을 중심으로 ‘역마진’을 방불케 하는 운임과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물량을 대거 빨아들였다. 아시아노선만 뛰는 국적선사와 달리 북미 유럽 등 전 세계로 화물을 보내다보니 컨테이너 회전을 위한 수단으로 ‘역마진’을 이용한 것이다. 결국 치킨게임으로 이어졌고, 곧 ‘적자항로’로 변질됐다.
동남아항로에서 두각을 보인 흥아해운(現 흥아라인)이 오랜 적자 끝에 국내 3위 컨테이너 선사인 장금상선에 흡수된 배경이기도 하다. 한 선사 관계자는 “외국적 선사들이 대형 선박들을 인도하면서 남는 선박들을 역내항로로 보내다보니 장기 불황은 불가피했다”면서도 “기안기금이 이런 업계 사정과 흐름을 고려하지 않는다. 최근 선복난에 따른 고운임과 물류대란에 국내 화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해운업계는 과거에도 정부 주도의 정책금융이 이름만 바꿔 성대하게 조성됐지만 실제 집행된 사례는 사실상 전무했다고 밝혔다.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지난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 때도 이름은 달랐지만 정책금융이 조성됐었다. 하지만 실제 지원한 사례는 없었다”며 “정부가 시장을 안정화하기 위한 일종의 ‘시그널’만 던진 셈”이라고 말했다.
한편 기안기금의 저조한 집행률과 해운업계의 불만에 대해 산은은 기안기금이 일종의 ‘2차 방어선’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산은 관계자는 “기안기금은 정부의 ‘135조원+a’로 조성된 민생‧금융안정 패키지 프로그램 중 기존 정책자금으로 코로나 영향을 차단하지 못할 때 활용되는 2차 방어선 역할”이라며 “다양한 정책프로그램에 힘입어 기업들의 자금조달 여건이 개선되다보니, 기금을 신청한 기업은 현재까지 제한적이다”고 말했다.
기금운용기간이 짧은 탓에 대출기간이 3년에 불과하다는 지적에 대해 산은은 “코로나19로 발생한 기간산업의 일시적 유동성 위기를 지원하기 위해 기금을 조성한 만큼, 법상 운용기한은 2025년 말로 정해져 있다”며 “(수혜기업의) 상환완료와 청산 등을 고려하면 대출기간은 3년이 적정하며, 당초 기금 설립취지에 부합한 수준으로 판단된다”고 전했다.
기안기금을 신청하지 않으려는 이유로 꼽히는 고금리 논란은 업계 화젯거리다. 실제 기안기금에서 3000억원을 지원받은 아시아나의 대출금리는 3년 만기 기준 연 7% 후반으로 책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민간채권평가사가 책정한 금리(민평금리)보다 높은 수준이다.
제주항공이 필요한 자금 1900억원 중 321억원만 기안기금에서 조달한 배경도 고금리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진에어는 총차입금이 4098억원인 탓에 조건 불충분으로 지원받지 못했다. 이날까지 해운업계에서 기안기금을 신청한 곳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시중은행보다 높은 금리를 자랑하는 기안기금의 힘을 빌리는 것 자체가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보고 있다.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기안기금 금리조건이 너무 안 좋다. 자금을 지원받는 순간 대주주가 바뀌는 등 지배구조가 흔들릴 위험이 있다”고 평가했다.
업계의 불만에 대해 산은 관계자는 “기금 지원금리는 운용심의회에서 의결한 기금운용방안에 따라 시중금리+a 수준에서 결정된다”며 “WTO 보조금 이슈나 시혜성 자금지원 의혹 등에 대한 불가피한 방어조치”라고 말했다. 산은이 말하는 시중금리는 기금 신청기업이 직접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때의 금리 수준으로, 회사채조달금리를 지표로 삼는다.
이어 ‘형평성’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산은 관계자는 “금리가 민평금리보다 높은데 (민간에서) 금융을 조달하지 못하는 업체들이 (기금으로) 지원받는 것”이라며 “(수혜 기업이) 금리까지 낮다면 민간시장에서 신용도에 따른 금리로 정상적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기업들과 형평성 이슈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산은의 HMM에 몰린 금융지원이 ‘특혜시비’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점을 들어 기금지원에 인색한 것으로 내다봤다. 전준수 서강대 경영학부 석좌교수는 “산은이 전력으로 HMM을 도와줬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보니 타 선사에게 기금을 지원할 생각은 없을 것으로 본다”며 “기금이 거창해보이지만 실질금리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최근 해운호황으로 해운업계의 현금흐름이 좋아진 만큼 당분간 국적선사들이 기금을 이용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미디어펜=류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