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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冊任)만 있고 책임(責任)은 없는 정부 우수도서

2015-01-30 17:37 | 이원우 차장 | wonwoops@mediapen.com

   
▲ 이원우 기자
시작은 2014년 초 휴대폰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다. 체 게바라의 일생을 홍보하고 미화하는 아동용 도서가 ‘정부추천 우수교양도서’라는 이름으로 전국서점 및 도서관에 대량 유통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체 게바라와 랄랄라 라틴아메리카’라고 하는 제목의 이 책을 문화체육관광부가 ‘우수교양도서’로 지정한 순간 대한민국 정부는 공산주의자를 미화하는 작업에 동참한 셈이 됐다.

취재 결과 문제는 여기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지정 우수교양도서 11개 분야 420권 중에는 김일성도 있었고 극렬 반미주의도 있었고 민주노총도 있었다.

재작년 문체부는 도합 24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일련의 책들을 종당 각각 500만원(최우수도서의 경우 750만원) 이내로 20만여 권 구입했다. 그리고 공공도서관, 전국 각지의 작은도서관, 벽지 초‧중‧고등학교, 병영도서관, 지역아동센터 등 2500여 곳에 배포했다.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의 흐름은 상징적이다.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직접 시정을 지시했다는 얘기가 들려온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문제는 즉시 인사(人事) 문제로 비화됐다. 즉, 담당자 누구를 교체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모든 사안이 귀결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나아가 정부가 우수교양도서를 지정해서 대량구매한 뒤 배포하는 것이 적합한 일인 것인지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이런 부분을 정리하는 것까지도 언론과 시민사회의 역할인 걸까.

그리고 2015년, 세종도서를 둘러싼 논란

해가 바뀌었어도 논란은 이어진다. 최근 문체부는 ‘2015년 우수도서(세종도서) 선정사업 추진 방향 운영지침’을 발표했다. 이 기준 안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추가됐다.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문학 작품’이라는 표현이 첫 번째, ‘인문학 등 지식정보화 시대에 부응하며,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는 도서’라는 표현이 두 번째다.

항목이 추가된 계기는 물론 있다. ‘종북콘서트’ 논란을 촉발시켰던 신은미의 책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가 2013년 문체부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됐다가 종북 논란에 휘말려 최근 선정취소 및 회수조치 당한 사건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 ‘종북 콘서트’ 논란에 휩싸인 재미교포 신은미가 지난 10일 오후 법무부로부터 강제퇴거 명령을 받은 뒤 인천 중구 공항로 인천국제공항정부합동청사 출입국사무소에 도착해 마중 나온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른바 문학계는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26일 한국작가회의, 한국출판인회의 등의 단체들은 “세종도서 우수문학도서’ 운영 방침에는 현 정부의 문학에 대한 몰이해와 구시대적 발상이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새로운 기준을 정부의 ‘규제’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약자’로 묘사하겠다는 뉘앙스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 문학계에서 점하고 있는 위상은 결코 약자의 그것이 아니다.

일단 문체부는 조심스러운 대응을 하고 있다. “이번에 내놓은 기준은 대안 중의 하나”라며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오는 3월 사업공고 때 구체적인 심사 기준을 제시할 것”이라고 반발 여론을 달래려는 시도를 진행 중이다. 이 기준이 끝내 포함되느냐 마느냐의 논쟁은 대단히 중요하고 상징적인 싸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부는 책에 관해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가

‘책’에 대해 대한민국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몇 가지 논쟁이 있다. 세종도서(우수도서) 논쟁 이전에는 도서정가제 논쟁이 있었다. ‘책=마음의 양식’이라는 인식은 국민들로 하여금 정부가 책에 대해 항상 어떤 방식으로든 지원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정부의 지원이 아낌없이 쏟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많다.

모두가 잊고 있으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일단 한국인들이 놀라울 정도로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난 2일 한국문화관광연구원(KCTI)이 발표한 ‘2013년 4분기 오락·문화비 지출 경향과 시사점’ 자료에 따르면 작년 4분기 가구당 서적 구입비용은 월평균 1만5001원이다. 참고서 구입이나 취업용 수험도서가 모두 포함된 비용이므로 실제 교양을 위한 도서 구입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거기에 비하면 정부가 출판업계에 투입하는 지원책은 결코 부족하지 않은 형편이다. 박근혜 정부의 경우 ‘문화강국’이라는 표현을 취임사와 신년사에 모두 포함시킬 정도로 문화 분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문체부는 ‘출판인재 양성 공공 프로그램 시행계획’을 발표해 국고 28억 원 규모의 금액을 투입하는 프로그램 시행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출판회사 창업과 출판계의 각종 사업들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 무턱대고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독서라는 것은 공급자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결코 ‘진흥’될 수 있는 게 아님을 환기시키는 일도 중요하다. 공급자들이 많다고 해서, 서점에 다양한 책들이 깔렸다고 해서 국민들이 다시 책을 집어 드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무가지마저 읽는 사람이 없어 폐간을 하는 게 현재 대한민국의 실정이다.

책에 관한 문제는 응당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한쪽으로 치우쳤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도서시장의 기형적 상황을 국가가 승인하고 급기야 활성화시키는 기묘한 풍경을 촉발시키고 있다. 올해 세종도서 사업은 총 142억 원 규모로 진행될 예정이다. 도서 시장의 현실과는 관계없이 지원 프로그램의 스케일은 점점 커지고만 있다.

반(反)시장적‧반(反)정부적‧반(反)체제적 책들이 유통되는 것이야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당연한 일이다. 허나 스스로를 부정하는 그 책들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된다. 정부가 도서산업을 진흥하는 데 이토록 많은 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까?

2015년 대한민국에서 정부는 ‘책’에 관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할까. 무거운 질문들이 끝도 없이 떠오르는 이 와중에도 예산은 차곡차곡 집행되고 있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

(이 글은 푸른도서관운동본부 출범기념 토론회에서 이원우 기자가 발표한 토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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