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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아·부자 증세…위험수위 치닫는 '대기업 죽이기'

2015-02-04 11:38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한국사회만큼 반기업심리가 우심한 곳도 없다. 경제가 어려운 것도 결국 경제주체인 기업이 맥을 못 추며, 성공하는 기업이 드물어진 탓이다. 요즘 새누리당이 시동 거는 중인 부자 증세, 대한항공 조현아 사태가 보여주듯 2015년 지금은 기업에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기업을 이토록 박해해도 될까? 이에 미디어펜은 좌승희경제학의 기업론을 소개한다. 주류경제학의 변화를 외쳐온 좌승희 경제학의 하이라이트가 기업론이기 때문이다. 상, 하 두 차례로 연재될 시리즈는 한국경제의 회생을 돕고, '기업 없는 경제학'이던 주류경제학의 학문적 틀을 바꾸는 이중의 작업이다. <편집자주>

좌승희경제학의 기업론 <상>

   
▲ 조우석 문화평론가
사회번영을 이끄는 원리는 무엇인가? 그 질문을 던졌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세상은 위대한 고전으로 떠받든다. 분업화를 통한 국부 증대의 요체를 전했던 이 책을 바라보는 좌승희경제학의 시각은 좀 다르다.
혹시 그게 농경사회의 경제학은 아닌가? 그래서 21세기 지금 상황과는 거리가 있지 않을까? 결정적 이유는 <국부론>이 ‘기업이 빠진 경제학’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 책이 출간된 게 1776년인데, 당시 등장해 활동하던 주식회사란 지금의 기업조직(corporate)과 영판 달랐다. 동인도회사처럼 정부의 기능 일부를 수행하던 조직 위주였다.
그러던 주식회사가 근대적 기업으로 활성화된 건 19세기 초. 그때를 전후해 경제발전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산업혁명과 맞물려 인류사 최초로 부(富)의 창출이 이뤄졌다. 그게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위대한 출발이다.

아담 스미스가 막상 잘 몰랐던 것, ‘기업’

그래서 기업이란 자본주의의 발명품이다. 달리 말해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가능케 한 핵심동력이 기업이다. 이런 역사발전의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던 아담 스미스가 이 메커니즘을 알 리 없다. 때문에 그는 초기 주식회사의 독점행위와 착취를 비판했고, 가족기업 정도만을 찬양하는데 그쳤다.

아담 스미스는 그렇다해도 하이예크, 미제스 등 20세기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좀 다르지 않을까? 통념이 다시 깨진다. 하이예크의 경우 태초에 로고스가 존재하듯 “태초에 시장이 존재했다”고 선언했다. 시장 지상주의자인 그에게 시장은 자생적 질서의 표본이다. 그러고 보니 기업이란 하이예크 경제학에서 좀 걸리적대는 존재다.

그는 대기업은 나쁘다며 비판까지 했는데, 경제주체로서의 기업을 몰랐다는 얘기다. 창조적 파괴란 말로 유명한 슘페터도 그랬다. 창조적 파괴를 수행하는 기업가의 역할을 강조하던 그가 막상 기업 얘기를 한 바는 없다. 외려 “대기업이 등장하면 자본주의는 소멸할 것이다”며 칼 마르크스 비슷한 예언을 했다.

이런 경제사의 진실은 좌승희 박사의 9년 전 저술 <신국부론>(굿인포메이션)에도 보이는데, 조심스러운 문제제기에 그쳤다. 이후 저작인 <발전경제학의 새 패러다임>(율곡출판사) 등에서 탄력을 받아 “시장경제란 말을 이제는 기업경제란 용어로 바꾸자”는 대담한 제안을 한다.

좌승희 박사이니까 이런 말을 한다. 개발연대 대한민국의 ‘한강의 기적’을 경제학의 일반이론으로 끌어올리고, 그래서 주류경제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큰 그림을 그리는 그가 아닌가? 맞다. 사대(事大) 훈고학에서 벗어나려는 꿈을 품어야 서구경제학의 거두들과 맞설 수 있는 법이다.

   
▲ 부자 증세 움직임과 박해 수준까지 가는 대한항공 조현아 전 대항항공 부사장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눈먼 마녀사냥은 결국 대기업 죽이기로 제 발등을 찍고 있다. /뉴시스
하이예크나 미제스도 자본주의 몰랐다?

문제는 ‘기업이 빠진 경제학’이 주류경제학에 깊숙이 스며들어있고, 특히 한국풍토에서는 더 나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즉 강단 경제학은 ‘한국에서 경제학을 한다’는 자각이 없다. 그들이 하는 건 통계나 돌리고, 수치를 만지는 경제학인데, 점점 수학을 닮아간다. 과학 콤플렉스 때문이다.

맨큐-피케티 논쟁을 넘어선 제3의 목소리가 없는 것도 당연하지만, 무엇보다 세계경제사의 돌연변이인 한국경제의 성공을 분석할 능력이 없다. 한강의 기적은 주류경제학의 교과서와 무관하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저번에 밝혔듯 우리는 주류경제학에서 권하지 않는 관치(官治)경제 아래서 도약을 이루었고, 경제학이 우려하는 경제력 집중과 불균형을 쌓으면서 성장하지 않았던가? 강단 경제학은 기업이 빠진 경제학이기 때문에 반기업정서를 은근히 부채질을 한다.

그들이 기껏 하는 건 기업을 자본-노동-기술의 3요소로 분해해 계량화시킨다. 경제학은 회계학으로 추락한 셈이다. 그런 그들의 눈에는 이 3요소를 능동적으로 콜라보레이션해 부(富)를 창출해내는 마법의 존재인 기업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시장은 태초부터 자생적 질서라고 봤던 하이예크의 주술에 걸린 나머지 왕왕 기업을 시장에 이질적 존재 혹은 ‘공공의 적’으로까지 본다. 상황이 이러하니 일반인들의 반기업심리는 당연한 것일까? 이 대목에서 좌 박사 저술 <신국부론>에 등장하는 힘찬 명제를 되새겨보자. “기업은 시장의 이단자가 아닌 시장의 육성자이다.”

반기업정서란 이름의 제 발등찍기

좌승희경제학이 흥미로운 건 그동안 경제학의 ‘잃어버린 연결고리’였던 기업을 자리매김한 뒤 경제학을 전면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그래 그래, 기업도 뭐 중요하지”라면서 경제학의 부록(附錄)으로 끼워넣은 정도가 아니다. 그의 경제학에서 기업이 빠지면 와르르 무너진다. 필자와의 대화에서 그는 말했다.

“하이예크 식으로 시장이 본래적 질서이고, 완전하다고 하자구요. 그럼 왜 19세기 서구사회에서 기업이 생겨난 겁니까? 주류경제학은 그걸 도저히 설명 못할 겁니다. 그러니 공론(空論)이죠.”

이제 물어보자. 지금 한국사회의 이 지독한 반기업정서란 무얼까?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구호에서,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이라는 거대한 허구, 그리고 지금 태동 중인 부자 증세의 움직임에서 대한항공 조현아 사태는 뭐란 말인가? 대기업을 때리고, 이젠 거의 박해까지 하는 대중과 언론의 이 눈먼 마녀사냥은 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

서구사회도 기업이란 200년 역사밖에 안된다. 아담 스미스를 포함한 경제학자들이 기업을 빼놓고 경제학을 만들고, 지금도 대중의 오해가 생기는 것을 이해 못할 건 아니다. 그렇다고 시장경제 70년, 기업사 70년에 불과한 한국 땅에서 벌어지는 반기업정서란 이름의 자기 발등찍기가 용서되는 건 아니다.

경제학자에서 대중-언론까지 무얼 모르니 이 따위 일을 무시로 벌인다. 그래서 한강의 기적을 없었던 일로 치부하려는 가공할 움직임이 이 땅에서는 경제민주화, 보편복지 그리고 사회적 경제 등의 이름 아래 맹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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