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총소리가 들리고 우방국 헬기가 공항 위를 맴돌았다. 흔히 영화에서 봤던 전쟁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군중들이 군 활주로까지 들어와서 군용기에 매달리면서 군항기 운영이 지연됐다. 다시 대합실로 이동해서 무한정 대기했다."
“타고 온 군용기는 우방국에서 운영하는 큰 수송기였다. 모두 바닥에 오밀조밀 모여앉아 있었다.”
최태호 주 아프가니스탄 대사는 지난 17일 오전(현지시간)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 카불을 탈출한 과정을 “마치 전쟁 같은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현재 카타르 수도 도하에서 아프가니스탄 대사관 업무를 임시로 수행하고 있는 그는 18일 오후 기자들과 간담회를 갖기 위해 화상으로 연결돼 “가져갈 수 있는 가방이 30x30x20(㎝)으로 아주 작은 가방이기 때문에, 필수적인 물품만 넣어 가지고 오느라 양복은 못 챙겼다”고 밝혔다. 최 대사를 비롯한 공관원 3명이 마지막 우리교민 1명을 데리고 카불을 삐져나온 상황이 분초를 다퉜음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최 대사는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던 마지막 교민 1명이 17일 아프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을 이륙하기까지 현장에서 2박3일의 소개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대사관에서 위기를 처음 감지한 것은 15일 오전 11시 30분쯤으로 당시 외교부 본부와 영상회의를 하던 최 대사는 대사관 경비업체로부터 탈레반부대가 차로 20분 거리까지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후 우방국 대사관에서 ‘바로 모두 탈출하라’는 긴급공지를 받았다고 한다.
최태호 주아프가니스탄 대사가 18일(현지시간) 카타르의 임시공관에서 기자들에게 영상으로 브리핑하고 있다./사진=외교부 제공
최 대사는 정의용 외교부 장관 지시를 받고 철수를 시작했다. 매뉴얼대로 대사관 내 주요 문서 등을 파기하고 잠금장치를 한 뒤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우방국 대사관으로 이동했다. 대사관의 현지인 직원들에게는 자택 등 안전한 장소로 가라고 지시했다.
미군 헬기로 카불 공항까지 이동했을 때엔 이미 여러 국가 대사관 직원들이 밀려드는 상황이었다. 최 대사는 아프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교민 A씨에게 철수를 설득하러 직원들을 보냈다. 그동안 여러 번의 권고에도 A씨는 현지 사업장 때문에 더 있어보겠고 했었다. 무작정 기다릴 수 없는 상황에서 최 대사는 공관원 2명만 남기고 나머지를 먼저 철수시킨 상태였다.
상황이 급변하자 A씨도 생각을 바꿔 철수를 결정했다. 자기 때문에 대사관 직원들이 고생해 미안하다고 했다고 최 대사는 전했다. 최 대사를 비롯한 우리 외교관 3명은 A씨의 16일 탑승 수속을 도와준 뒤 같은 군용기에 탑승하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이날 세 차례에 걸쳐 열린 주요국 대사관들과의 현지 상황 관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6일 오전부터 군중이 군 활주로로 넘어오면서 군용기들의 운항이 전부 취소됐고, A씨도 출국하지 못한 채 무한정 대기하게 됐다.
최 대사는 16일 출발하는 군용기에 교민 자리도 확보했다. 하지만 민간공항을 점거했던 아프간 군중이 군 공항으로까지 몰려들면서 결국 군용기 운항이 중단됐다. 다음날인 17일 미군이 군 활주로까지 들어온 군중을 민간공항 쪽을 밀어내고 나서야 군용기 이륙이 가능했다. 최 대사 등 남은 대사관 직원들은 A씨와 함께 같은 군용기에 타고 드디어 아프간을 빠져나왔다.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으로 그동안 우리정부가 기존 아프간 정부와 협력했던 사업들은 대부분 중단될 것으로 전망된다. 앞으로 탈레반이 정식으로 공식 정부를 세우게 되면 국제사회는 국제규범 준수나 인권 사항 준수 등을 기준으로 정부를 인정할지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이번 아프간 사태와 관련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성급한 철수에 대해 비난 여론이 높다. 지난 20년간 연합군 차원에서 아프간에 관여해온 것들이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아프간에 투자한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현 아프간 국민의 60~65%가 탈레반 치하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인 것이 사실이고, 이들은 이미 서구 문명에 대한 호감도가 높고, 여성인권 문제 등 인권 의식도 높아졌다. 아프간 국민들이 조금 더 용기를 낸다면 탈레반 정권이 이전처럼 공포의 통치를 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탈레반이 예전처럼 통치하려 했다간 이젠 민중봉기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관측이 있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