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변화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살 곳을 잃은 '북극곰의 눈물'이 이제 우리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경고음도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상황이다. 강대국과 글로벌 리더, 기업들은 기후 재앙을 피하자는 대원칙 속에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기후가 바꾸고 있는 세상은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 새로운 시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강대국들의 헤게모니 다툼, 기회를 잡기 위한 기업들의 전략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우리 역시 기후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재편되는 국제질서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정책과 냉철한 전략이 요구된다. 미디어펜은 '기후위기 리포트' 심층 기획시리즈를 통해 '신기후 시대'에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을 짚어보고 급변하는 환경에서 도약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주>
[미디어펜=박규빈 기자]국내외에서 ESG(환경·사회·지배 구조) 경영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가운데 환경 제일주의에 발목이 잡혀 기업 경영이 어려워지면 안된다는 목소리가 현장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지난해 10월, 더불어민주당은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환경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게 이유였다. 이에 재계는 코로나19발 경기 침체 탓에 규제까지 더해져 기업들이 힘겨워 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관련, 화학 물질을 다루는 중소기업들이 제재 대상에 오를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고, 관련 업계는 "환경 보호·안전 장치 강화 취지에는 공감하나 현실과 동떨어진 현행 규제는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며 읍소하는 형편이다.
중소기업중앙회는 화평법 개정에 따른 소요 비용이 최대 1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관련 업계는 염색 원료에 쓰이는 화학 물질 한 종류를 분류하고 등록하는 데에만 약 2억원이 드는 것으로 보고 있다. 취급 물질이 많다면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을 추가로 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염료나 안료 등 화학 물질 사용량이 많은 국내 중소기업들과 화학 기업들은 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이중 규제를 받고 있다. 화평법이 도입된 계기는 2011년 발생한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이다. 이에 따라 화학 물질 관리를 정부 차원에서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고, 이에 당국은 연간 1톤 이상 제조·수입·판매하는 화학물질을 의무적으로 등록하도록 조치했다.
이를 위반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지거나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한다.
화관법의 취지는 안전사고를 막는 등 산업 현장에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에 있다. 그러나 현행 화관법 제21조(취급시설의 배치·설치 및 관리 기준)는 방류벽이나 실내 탱크 간 거리 등을 1.5m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어 중소기업들에겐 사실상 적용하기 어렵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이 외에도 동법 제25조는 개선 명령서를 받은 기업으로 하여금 △취급 시설 개선 명세서 △이행 계획 △공사비 △이행 기간 동안의 유해 화학 물질 안전 관리 계획안을 지방환경관서장에게 제출토록 한다.
법조계에서는 화관법이 산업 육성이 아닌 규제를 위한 악법이라고 평가한다. 해당 법률 내 조문 수가 6장 61조로 구성돼 있어 지나치게 많은 만큼 산업 성장을 가로막을 것으로 보고 있어서다.
전삼현 숭실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법 도입 목적이 기업 징벌에 있어보여 중소 화학 기업들에겐 치명타로 작용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서승원 중기중앙회 상근부회장은 "중소기업은 화평법이나 화관법 등 환경법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인력을 따로 두지 않는다"며 "법령 자체가 워낙 많고, 세부내용이 고시로 복잡하게 구성돼 있어 이해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금호폴리켐 공장 야경./사진=금호석유화학그룹 제공
대기업들도 골머리를 앓기는 마찬가지다. 자사 생산 시설 외에도 협력사들에 대한 관리·점검 의무를 지게 됐기 때문이다. 사실상 연대 책임을 물리는 것과 다름 없는 셈이다.
더욱 큰 문제는 국내 기업들에게 각종 화학 물질을 납품하는 외국 공급사들이 국내 법제도 탓에 영업 기밀 공개에 대한 부담을 느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공급을 포기할 경우 제조업 공정 상 마비가 올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는 판국이다.
이는 곧 지나친 환경 제일주의에 발목이 잡혀 생산을 하지 못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재계의 반발에 환경부는 2019년부터 업계 목소리를 반영하겠다며 화평법 개정을 추진해왔지만 여전히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사전 신고의 대상이 되는 화학 물질 기준이 불명확해 기업들이 어디까지 신고해야하는지 혼란스러워 할 수 있다"며 "신고 기준과 범위를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환경부에 의견을 전달한 바 있다.
아울러 "제조‧수입 화학 물질 중 물질명 자체가 알려지지 않아 물질명의 기준이 되는 CAS번호가 없는 경우가 많아 기업들이 어느 범위까지 신고를 해야 하는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신규 화학 물질 등록 기준을 연간 100kg에서 연간 1톤으로 상향 조정할 필요가 있다"며 "등록·신고 면제 대상에 조사용·연구개발용 목적으로 제조·수입되는 화학 물질을 포함해줬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박석순 이화여자대학교 환경공학과 교수는 "외국에서는 특정 물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반면, 우리 정부는 금지 물질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를 갖추지 못한 상태라 포괄적 금지부터 하고 본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영업 기밀의 유출 우려가 있으므로 기업들이 화학 물질을 공개하도록 하기보다는 정부가 위험 등급을 매기고, 이를 공개토록 해야 한다"며 "환경부는 탄소 중립보다 지속 가능한 성장에 방점을 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미디어펜=박규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