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외교안보팀장]1991년 9월 18일 남북한은 유엔에 각각 동시에 가입했다. 유엔 가입은 정부가 아닌 국가에만 허용된다. 따라서 유엔 동시가입으로 남과 북은 각각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다른 국가가 된 것이다. 이 시기는 1989년 독일 통일을 비롯해 소련 해체 등 동구 공산정권들의 연쇄 붕괴가 일어나던 탈냉전시대였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체결됐으니 고립감을 느낀 북한이 남한과의 대화에 열중하던 때이기도 했다.
1991년 12월 남북은 서울에서 5차 고위급회담을 열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엔 남북관계에 대해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정의했다. 또 이 남북기본합의서 1장엔 ‘남북은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명시해 문서화했다. 상호 불가침과 이산가족 상봉, 철도 연결 등 교류·협력도 포함됐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 모두의 국회 인준 절차를 거친 최초의 외교문서로 기록된다. 이어 남북은 1992년 2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도 채택했다. 하지만 이 선언에 포함된 ‘상호 핵사찰’ 조항에 따라 미국의 영변 핵시설에 대한 압박이 이어졌고, IAEA의 ‘특별사찰’ 허용에 북한은 크게 반발해 결국 1993년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탈냉전’이란 세계의 큰 변화 속에서도 북한은 NPT 탈퇴라는 강수를 두면서까지 무장해제 압박에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94년 10월 21일 ‘핵동결’을 전제로 한 제네바합의,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6.15 공동선언 등 한국과 미국 정부의 노력도 끈질기게 이어졌다. 이후 2000년대에 지난하게 이어진 6자 북핵회담에서도 북한은 국제사회와 줄다리기를 이어갔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2018년 4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역대 남북정상회담 (PG), 최자윤 제작./사진=연합뉴스
그리고 2018~2019년 사이 벌어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3차례 정상회담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직접 나선 두차례 북미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현재 북핵 문제는 ‘동결’에도 합의하지 못한 상태이다. 문 대통령 역시 북핵 문제를 숙제로 남겨둔 채 올해 마지막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9월 17일(현지시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30주년을 기념하는 메시지를 발표할 예정이다.
그런데, 만약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1차 남북정상회담과 그해 9월 19일 평양 3차 정상회담 이후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나지 않았더라면 올해 유엔총회에 남북의 정상이 나란히 참석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그랬다면 남북이 유엔 동시가입 30주년을 함께 기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선언문 마지막 조항에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명시됐으니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는 일이다. 유엔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첫 연설이 끝난 뒤 문 대통령이 연단으로 나가서 남북 정상이 두 손을 맞잡아 올리면 참석자들의 박수가 터져나오는 광경을 한번 상상해본다.
이에 앞서 지난 8월 15일 제76주년 광복절을 기해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으로 모셔온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승전으로 이끈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식이 좀 더 극적으로 연출됐을 수도 있다.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평양 태생이다. 그러니 아예 문 대통령이 직접 카자흐스탄에 가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시고 평양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기념식을 치른 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남북한 동시 유해 봉환식도 가능할 수 있었다.
남북한 동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식이나 남북 정상 동시 유엔연설 모두 지금으로선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됐다. 게다가 남북협력을 지지한다는 조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전략적 인내’의 부활이란 평가가 나오고 있다. 남북 유엔 동시가입 이후 30년동안 한반도는 큰 수레바퀴가 구르듯이 변화를 향해 걸어왔다. 하지만 지금도 북핵 문제는 여전히 선결과제로 남아있고, 북한은 오히려 30년 전보다 대화에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이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