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석원 정치사회부장]초등학교만 졸업한 '소년 공장 노동자' 출신 이재명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세상의 모슨 불행과 고단함은 단 하나도 나를 피해가지 않았다”는 어느 드라마의 주인공의 푸념이 그의 인생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언제 태어났는지도 정확히 모른다. 대충 1963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지만, 주민등록상 그의 생년월일은 1964년 10월 23일이다. 이 생년월일은 나중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해서 한 점쟁이에게 받은 날짜란다. 제 아무리 경상북도 안동의 오지 산골 촌구석에서 태어났다지만, 1960년대에 부모 멀쩡한 채 태어난 아이가 태어난 해와 날도 모른다는 게 그리 흔하지만은 않은 일일 것이다.
이미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누이 둘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이재명과 그의 가족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피해 서울의 코앞 성남으로 이사한다. 이재명이 겨우 초등학교를 마친 후였고, 소년 이재명에게는 오히려 안동의 산골보다 더 형편 무인지경의 삶으로의 전환인지도 몰랐다. 안동에서는 그나마 ‘학생’이었지만, 성남에서 그는 ‘공돌이’였기 때문이다.
남들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6년 간 그는 경기도 성남 상대원 공단의 소년 공장 노동자로 지냈다. 공장에 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고,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그의 마음은 그의 어린 시절을 버텨낸 무기가 됐다. 지난 어버이날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그 어린 시절을 “아버지를 원망하며 필사적으로 좌충우돌하는 날”이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돌아보면 내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가난이 아니라 아버지였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시절 그의 또 다른 누이는 청소부 일을 하다가 과로로 사망했다. 소년 이재명을 끈질기게 따라 다니던 불행은 잠시도 그를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재명은 자신의 자서전에 “공장 생활 6년 동안 쇠붙이와 화공 약품이 내 몸에서 이름을 얻는 동안, 나는 이름조차 없던 소년 공돌이였을 뿐이다”고 그 불행의 시절을 회상했다.
하지만 평생 ‘불행의 아이콘’일 줄 알았던 이재명은 고졸 검정고시를 치르고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들어가 한순간 ‘법대생’이 됐다. ‘소년 공장 노동자’였던 이재명은 ‘사시생’ 이재명이 됐고,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사법시험에 합격해 성남 지역을 무대로 ‘민변’ 활동을 하는 ‘변호사님’이 된 것이다. (이상은 이재명의 자서전 ‘이재명의 굽은 팔’에서 참조 인용한 것임)
그리고 다시 30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2021년 10월 10일, 성남 시장과 경기도지사를 거쳐 그는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의 집권 여당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선출됐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차기 대통령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인물이 됐으니 본인으로서도 감개무량할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굳이 그의 힘겨웠던 유년의 시절을 장황하게 상기한 것은, 그가 그런 개인사를 딛고 상당히 남다른 대선의 길에 본격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그의 삶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교하기도 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거쳐, 고졸이라는 학력의 약점을 극복하고 사법시험을 패스해 판사와 변호사, 국회의원까지 지낸 뒤 결국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이 된 노 전 대통령의 삶이 이재명 후보에게 오버랩 된다는 것이다.
최근 그가 야당의 지지율 1위 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초등학교 시절 사진과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 사진을 함께 올리자, 윤 전 총장의 당내 경쟁자이기도 한 홍준표 의원 측은 “가난이 스펙이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어느 누구인들 가난을 스펙삼고 싶지는 않겠지만,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듯이 이재명 후보도 힘겨웠던 과거의 시간을 스펙 삼아 자랑했다기 보다는 극복한 것을 자랑삼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삶을 되돌아 봤을 때 이를 비난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난은 스펙’이 아니어도 ‘역경 극복은 스펙’일 수 있을테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11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참배한 뒤 이동하고 있다./사진=사진공동취재단
고단한 유년의 삶을 극복하고 여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까지 된 이 후보는 지금까지의 기록만으로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사에 특이한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87년 민주화의 산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이후 이 후보는 국회의원을 지낸 적이 없는 최초의 양대 정당(민주당 계열과 국민의힘 계열) 대통령 후보다.
1987년 제13대 대선 때 당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나 통일민주당 김영삼,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각각 초선과 8선, 5선의 국회의원이었다. 1992년 제14대 대선은 민자당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양대 정당의 후보였고,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당시 초선 국회의원인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경쟁했다.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도 이미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고,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재도전했으며,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는 재선 국회의원인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가 맞붙었다. 2012년 제18대 대선에서는 5선 국회의원을 거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그 해 처음 국회의원인 된 초선의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격돌했고, 2017년 제19대 총선에서는 이전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4선 국회의원이었던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경쟁했다.
그러니 제6공화국 들어서서 지금까지 33년간 모두 8번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여야 양대 정당의 후보 중 국회의원 경력이 전무한 이는 이재명 후보가 유일하다. 물론 만약에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된다면 여야 양대 정당 후보가 모두 국회의원 경험이 없으니 그야말로 헌정사에 특이한 기록을 남길만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국민의힘에서 홍준표 의원이나 유승민 전 의원,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를 후보로 뽑는다면 이재명 후보는 여전히 유일무이한 기록을 갖게 되는 셈이다.
이 후보는 이제까지 당의 주류였던 적도 한 번도 없다. 정당 정치 지상의 목표가 대통령이 되거나 대통령을 배출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당의 대통령 후보는 당의 주류인 경우가 많다. 이회창이 첫 대선 후보였을 때도 주류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상대하려는 특별한 영입 대상이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당의 주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했던 지도부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재명은 당내에서 단 한 번도 특별한 역할을 맡은 적이 없다. 그래서 어쩌면 당당히 합법적이고 정당한 대통령 후보가 되고도 외로운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이 또한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이 후보의 경쟁 상대였던 이낙연 전 대표 측에서 정세균 김두관 등 중도 사퇴한 경선 후보들의 득표의 유무효 여부를 놓고 경선 불복 움직임을 보이나 보다. 최종 경선이 치러지기 전애도 이미 여의도 정가에서는 “이재명이 후보 확정되더라도 중도에 후보를 교체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제16대 대선 때 민주당 내에서 일었던 후단협(후보 단일화 협의회) 파동이 오버랩되는 장면이다.
2002년 당시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잇따라 민주당이 한나라당에게 참패하자 민주당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에서는 지지율이 떨어지는 노무현 후보를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고, 급기야 대선을 불과 두 달 보름여 남겨놓은 시점에 당시 여당 국회의원 37명이 후단협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실상 자신들이 뽑은 대통령 후보 노무현을 끌어내리고, 당시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들어낸 주역으로 인기가 치솟던 정몽준 의원으로 대체하고 싶어 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탈당까지 감행했던 후단협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 없이는 불가능해 보였던 노무현은 당당히 당선, 청와대에 입성했다. 헌정사에서 대표적인 ‘해당 행위’라는 평가를 받은 후단협 말썽의 주인공들 대부분은 다시 민주당으로 복당했고, 원유철 김원길 박상규 등은 아예 적진인 한나라당의 품에 안기기도 했다.
물론 2002년 당시 후단협은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져서 당선 가능성이 낮았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지금 이재명 후보를 둘러싼 우려는, 후보가 대선 도중 사법처리될 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니 성격이 다를 수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사에서 전무후무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이재명 후보는, 어쩌면 윤석열이든 홍준표든 야당의 거대한 경쟁자보다 더 거대한 몸집으로 몰려오는 당내의 이 파고를 다시 한 번 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어린 시절의 극복 대상이 거대한 ‘가난’이 아니라 더 거대한 ‘아버지’였을지도 몰랐던 것처럼.
뱀말. 이재명 후보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이낙연 전 대표였기에 이 후보의 자격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문제 삼을 사람도 이 전 대표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상당수 민주당 지지자나 일반 시민들 중에서는 이 전 대표를 신뢰하지 못하는 게 있다. 당 대표였던 본인이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했던 대원칙인 ‘당헌당규’를 거듭 거스르는 행동 때문이다.
지난 4.7 재보선에서는 당헌당규를 바꿔가며 서울과 부산에서 시장 후보를 내더니, 이번에는 본인이 당 대표가 되던 전당대회에서 통과된 특별 당규 제59조(후보자의 사퇴) ①항 '경선 과정에서 후보자가 사퇴하는 때에는 해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는 무효로 처리한다'가 대의제에 반한다고 문제 삼고 경선에 불복하려고 한다. 관전자나 상대 정당 입장에서는 재밌는 구경거리가 되겠지만, 살얼음판 걷는 민주당의 이번 대선에서 유의미한 일인지 돌아볼 일이다.
[미디어펜=이석원 정치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