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해서 왕도를 정하고 한양도성을 축성했음은, 한국인이면 대부분 잘 아는 일이다. 당연히 예나 지금이나, 북악산은 최고 권력자의 병풍(屛風) 노릇을 하며, 이 나라와 역사를 지켜봐 왔다.
꽤 험한 바위산으로, 사방팔방으로 등산로와 산책로가 거미줄처럼 나 있다.
지난번 ‘북악산 길과 성북동’ 때와 달리, 이번에는 반대쪽 삼청동(三淸洞) 쪽에서 올라 한양도성 성곽을 지나고, 숙정문 밑으로 해서 이 산에서 가장 힘든 코스인 ‘김신조 루트’를 타고 산 반대편으로 넘어가, 뒤편 산책로를 따라 부암동까지 걷는 코스를 정했다.
북악산 능선 혹은 성곽(城郭)을 따라 정상을 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산 아래쪽을 도는 ‘둘레길’도 아니다. 대체로 산허리를 감아 도는 길이어서, ‘북악산 허리길’이라 명명해본다.
말바위 전망대에서 본 서울시내/사진=미디어펜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선다.
좌측에 서울공예박물관과 경복궁의 별궁(別宮)이 보이는 길이다. 오른쪽엔 과거 풍문여자고등학교 자리다. 양쪽으로 예쁜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덕성여자고등학교를 지나면, 본격적인 삼청동 거리다.
‘삼청’이란 동네 이름은 조선시대 초, 이 곳에 중국 도교의 최고신인 태청(太淸).상청(上淸).옥청(玉淸)의 3위를 모신 ‘삼청전’이 있었던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산과 물이 맑고 인심도 좋다고 해서 삼청이라 불렸다는 얘기도 있다.
왼쪽 골목에 재단법인 선학원(禪學院)이 있다.
선학원은 일제의 불교 침탈에 맞서 ‘조선의 선불교’를 지키기 위해 1921년 남천, 도봉, 석두, 만공, 만해, 성원, 용성 등 조사 스님들이 건립, 민족불교의 전통을 수호하고 정통 선맥을 계승해 온 곳이다. 해방 후에는 '불교정화운동'의 산실이기도 했다.
이어 유서 깊은 안동교회(安洞敎會)가 보인다.
이 교회는 1908년 풍전등화 같던 나라를 걱정하던 이 일대 양반출신 기독교인들이 창건한 교회다. 박승봉, 유성준, 김창제 등이 뜻을 모아 1909년 건립한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풍상을 함께 했던 곳이다.
건너편에는 사적 제438호인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의 집이 있다.
윤보선 가옥은 1870년 무렵 처음 지어진 곳으로, 당시 민가로서는 최대 규모인 99칸의 대저택이다. 이후 고종이 매입, 영혜옹주의 남편 박영효(朴泳孝)에게 하사했는데, 1910년대에 윤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윤치소가 사들였다고 한다.
다음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상재 집터와 손병희 집터를 지나 북촌(北村) 한옥마을 입구가 나온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한옥마을 포토 포인트에서 왼쪽 골목으로 쭉 내려오면, 갑자기 전망이 확 트인다. 축대 아래 내려다보이는 거리가 삼청동이다. ‘1인 지하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국무총리 공관도 한 눈에 굽어보인다.
총리공관 울창한 숲 너머로 북악산이 우뚝하고, 그 밑으로 청와대(靑瓦臺)가 자리 잡았다.
이 곳은 한옥마을의 서쪽 끝이다. 길옆으로 ‘북촌생활사박물관’이 있고, 골목 안에는 ‘북촌동양문화박물관’도 보인다. 동양문화박물관 2층 카페 앞은 이 북촌에서 최고의 조망을 자랑한다.
바로 옆은 조선 초의 명재상이자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孟思誠)의 집터다. 골목길을 돌아 나가니 베트남대사관이 있고, 그 건너편은 감사원(監事院)이다.
감사원 왼쪽으로 돌아가면, ‘삼청공원’이 나온다.
삼청공원은 1940년 도시계획공원 제1호로 지정된 공원이다. 울창한 숲과 청계천의 상류인 삼청천(三淸川) 계곡이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낸다.
길을 따라 올라가니, 한양도성 성곽에 있는 ‘말바위’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데크 계단 길이 잘 정비돼 있고, 주변에는 울창한 솔숲이 펼쳐진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지만 길지 않아, 숨이 가빠질 때 쯤 성곽이 나타나고, 곧 전망대에 이른다.
말바위는 조선시대 말을 타고 다니던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말을 매어놓고 쉬던 곳이라고 해서 말(馬)바위라 했다는 얘기도 있고, 북악산 능선 동쪽 끝이라고 말(末)바위라 불렀다는 이설도 전해진다.
말바위 전망대는 서울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조망명소다.
남쪽으로 서울시내와 남산(南山), 북으로 평창동과 성북동 일대, 그리고 북한산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주변에 사진 포인트와 잠시 쉬어갈 만한 곳도 있다. 맑은 날이면 말바위에 올라볼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성곽 길을 조금 더 가면, 성벽(城壁) 밖으로 넘어가는 계단이 있다. 그 위에도 전망대가 있고, 밑으로 산책로가 이어진다.
성곽은 역시 밖에서 봐야,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성벽 아래 경사 급한 산비탈을 이리저리 돌아서며, 걷기 편한 목제 데크 길이 나온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숨은 보석(寶石) 같은 산책로다.
길을 따라가면, 숙정문 밑 안내소에 이른다.
숙정문(肅靖門)은 한양도성의 북대문이다. 1396년(태조 5년)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북정문(北靖門)이라 표기한 기록도 있는데, 숙청문과 북정문이 혼용되다가, 나중에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음양오행 중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면 비를 빌기 위해 문을 열고, 너무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또 이 문을 열어놓으면, 도성의 부녀자들이 음란해진다고 해서, 항상 닫아뒀다는 속설도 존재한다. 봉건시대 가부장(家父長)들의 사고방식이다.
아무튼 숙정문은 도성의 북문이지만,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 평소 실질적 성문 기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 숙정문 밑 갈림길에서, 오른쪽 북한산 형제봉(兄弟峰) 방향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다. 성북동~북악산 ‘하늘마루’ 전망대~북악팔각정을 거쳐, 창의문 가는 코스가 ‘북악하늘길’이다.
북악하늘길은 일명 김신조(金新朝) 루트라고 불린다.
1968년 ‘1.21사태’ 당시, 우리 군경에 쫓기던 북한 무장공비(武裝共匪)들이 도망치던 길이라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실제 이 길 중간 바위에는, 그 때의 총탄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있고, 창의문 앞에는 당시 종로경찰서장으로 순직한 고(故) 최규식 총경의 동상도 서있다.
북악하늘길 초입에 있는, 청계천의 지천 중 하나인 성북천(城北川) 발원지를 지난다.
이어지는 목제데크 및 콘크리트 계단 길은 오르락내리락하며 경사가 꽤 급하다. 북악산에서 가장 가파른 코스로 꼽힌다. 과연 무장공비들이 필사적으로 도주하던 길 답다.
오른쪽 아래, 과거 유명한 요정이었고 지금은 복합 전통문화공간인 삼청각(三淸閣)이 보인다.
땀이 흐르고 거친 숨을 몰아쉴 때 쯤, 어느 새 평탄한 능선길이다. 군부대 밑 화장실 앞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간다.
길 옆에 바위를 뚫고 소나무가 자라는 호경암(虎警岩)이 솟았다.
이 바위에는 이상한 구멍들이 곳곳에 여러 개 나 있다. 하얗고 빨간 페인트로 표시해 놓아, 쉽게 눈에 띈다. 표지판엔 ‘1968.1.21.사태 격전지(激戰地)’라고 쓰여 있다. 바위에 난 구멍들은 바로 당시의 총탄자국들이다.
육중한 바위에 큰 구멍이 많이 난 걸 보면,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그리고 사용한 총기(銃器)의 위력도 꽤 강력했음을 짐작케 한다.
바위 뒤로 돌아가면, 호경암 위에 올라설 수 있다. 발 아래 서울 시내가 드넓게 펼쳐져, 김신조루트 최고의 조망을 선사한다. 맹호(猛虎)부대 3중대가 1979년 10월 세운 비석도 우뚝하다.
조금 더 가면, 하늘마루 전망대가 나온다.
여기서는 호경암 반대쪽 서울 시내가 한 눈에 조망된다. 정면은 북한산 형제봉이고, 왼쪽으로 다른 봉우리들이 늘어섰다. 탁 트인 경관과 시원한 바람에, 일상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간다.
그 밑에 ‘북악스카이웨이’가 있고, 도로변으로 호젓한 데크 산책로가 이어진다.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고, 도로 옆이지만 수풀이 우거진 곳이다. 20여분 남짓 걸으면, 북악팔각정(北岳八角亭)이 나타난다.
북악팔각정에서 본 북한산 연봉들/사진=미디어펜
1969년 처음 건립된 북악팔각정은 해발 342m에 있는, 전통식 정자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천혜의 입지를 가지고 있어, 내.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서울 도심 속 관광명소로, 각종 행사 장소로도 애용된다.
여기선 북한산 전망이 최고다. 왼쪽 끝 족두리봉에서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승가봉, 보현봉(普賢峰)을 지나 형제봉까지, 마치 ‘파노라마’ 같은 연봉들이 한 폭의 풍경화 같다.
북악스카이웨이도 ‘드라이브 코스’로,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옆 산책로를 계속 따라간다. 중간 중간 쉼터 앞을 지난다.
도중에 단풍나무들이 ‘터널’을 이룬 곳도 있지만, 단풍(丹楓)은 ‘아직’ 멀었다.
머지않아 산책로가 끝나고, 군부대 옆을 돌아 부암동 마을길로 들어선다. 오른쪽 ‘백사실(白沙室) 계곡’ 내려가는 길, 왼쪽 성곽길로 오르는 터널을 지나쳐 계속 내려가면, 부암동 삼거리가 나온다. 볼수록 정겨운 산 동네다.
두 번째 삼거리 위쪽에, 창의문(彰義門)이 보인다. ‘자하문’이라고도 하는, 한양도성의 4소문 중 북소문이다.
자하문 고갯마루에 서는 버스 대부분이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으로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