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길 제9구간 ‘진위고을길’ 대부분과 10구간 ‘소사원길’ 전부가, 이 고장을 지난다.
평택이란 지명은 산이 거의 없고, ‘평평한 지형에 연못만 있다’고 해서 명명됐다고 한다. 여러 고을이 합쳐져 생긴 평택은 크게 북부의 진위.송탄 지역과 남부의 팽성(옛 평택) 지역, 그리고 서부 안중 지역으로 나뉜다.
평택에 대해서는 지난 5월 초, 이 [이야기가 있는 걷기] 시리즈에서 ‘평택 진위 조선 역사의 길’이란 제목으로 다룬 적이 있다. 이 때는 평택 북부 지역만 대상이었다.
위 글에서 소개했던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 문화관‘의 관장 장승재 신한대 겸임교수는 평택 출신의 조선시대 역사인물인 박문수와 정도전, 원균, 그리고 김육(金堉)을 모아 스토리텔링을 하고, 삼남길을 중심으로 그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와 함께 삼남길 평택 구간에서, 박문수의 외가와 김육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여정은 진위면(振威面) 봉남리에서 시작된다. 이 곳은 바로 박문수가 태어난 곳이다. 그의 외갓집이 있던 동네로, ‘경주이씨’ 집성촌이었다. 박문수의 외조부는 유명한 백사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자 이세필(李世弼)로, 이 마을에 있는 묘가 지금도 문중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이항복의 증손이자 박문수의 외조부인 이세필의 묘/사진=미디어펜
마을 입구엔 큰 느티나무가 당산목(堂山木)처럼 우뚝 서 있고, 그 그늘 정자는 마을 사랑방이다. 여기서 7.15km를 가면, 삼남길 9구간 출발점인 오산 ‘맑음터 공원’이 나온다.
봉남리는 조선후기 쇠퇴해가던 남사당(男寺黨)을 다시 일으킨, 유세기의 고향이기도 하다. 유세기는 남사당패와 농악대로 고종 때 경복궁 중건 위안공연을 주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농기와 어깨띠를 하사받기도 했지만, 일제 때 경찰로 일한 것이 큰 오점으로 남았다.
이세기의 묘는 산기슭, 동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형조참판(刑措參判) ‘문경공’ 이세기와 ‘정경부인’ 반남박씨의 묘라고 새겨진 비석이 2개나 있다. 박씨 부인이 남편 사후 아들이 정승에 오르면서 정경부인(政經婦人)의 영예를 입었다고.
경주이씨 가문은 이 고장에서 큰 세가를 이룬,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손꼽혔다.
특히 그 후손인 이회영(李會榮)과 이시영 선생 등 6형제는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전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우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냈다. 꿈에 그리던 조국 해방을 살아서 맞아, 고국 땅에 돌아온 것은 이시영 선생뿐이다.
사람들은 이 형제들을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징으로 기린다.
이세필의 묘 뒤쪽, 언덕을 넘어가는 이름 없는 고갯길이 삼남길의 중요 지점 중 하나다. 평택에서 가장 높은 산인 무봉산(舞鳳山) 서편자락, 진위면 가곡1리로 넘어가는 길이다. 가곡리는 마을의 산과 골짜기(谷)가 아름답다(佳)는 뜻이다.
다시 봉남리 입구로 나와, 차에 올랐다.
가는 길에 삼봉 정도전의 사당, 원균의 묘 및 사당에 들렀다. 삼봉의 사당이 있는 진위면 은신리는 삼남길과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도일동(내리) 원균 유적지는 삼남길의 중요한 길목이다. ([이야기가 있는 걷기] 평택 진위 조선 역사의 길 참조)
이어 찾은 곳은 삼남길의 종착점에서 머지않은 곳에 있는, ‘대동법(大同法) 시행 기념비’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사진=미디어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인 이 비석은 대동법 전국 실시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조선의 대표적 경세가(經世家) 김육과 깊은 관련이 있다.
대동법은 조선후기 시행됐던 가장 합리적인 세법이었다. 대동법은 토지 1결당 백미 12두만을 납부하게 하는 세법으로, 그간 공물.진상.관수(官需).쇄마(刷馬) 등 각종 명목으로 잡다하게 거둬들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균등하지 못했던 조세를 형평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조선 500년 최대 개혁’이라는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데는, 100년이 걸렸다.
김육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직전까지 10년 동안, 경기도 가평의 잠곡에서 '주경야독'하던 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하였고, 네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 길에 중국 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경험이, 대동법과 용전론(用錢論)에 바탕을 둔 경세학을 탄생시켰다.
대동법은 이원익(李元翼)과 한백겸의 건의로 1608년(광해군 원년) 경기도에 실시했었지만, 전국적으로 확대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김육은 1638년(인조 16년) 충청감사(忠淸監司)로 제수되면서, 대동법 시행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그는 대동법의 실시가 백성을 구제하는 방편이면서, 국가 재정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정책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대동법이 나라살림을 부족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반대로, 별 진전이 없었다.
효종(孝宗)의 등극과 함께 김육이 우의정에 제수되면서, 전기가 마련됐다. 김육은 효종에게 충청도와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고, 이에 김집(金集) 등과 불화를 빚기도 했지만, 결국 1651년(효종 2년) 김육이 영의정에 오르면서, 호서지방에서도 대동법이 실시됐다.
김육은 이에 만족치 않고 호남으로 확대를 꾀했고, 호서대동법의 성과에 힘을 얻어, 그의 사후인 1658년(효종 9년)에야 호남에서도 대동법이 시행됐다.
그가 영의정이 될 때도 왕에게 벼슬을 받는 조건으로 ‘대동법 확대’를 내걸었을 정도로, 대동법은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모두가 김육의 투철한 민본사상(民本思想)과, 민생경제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의 이런 진면목을 대변해주는 것이, 대동법 시행 기념비다.
김육의 사망 소식을 접한 충청도 사람들이 그의 공덕을 기려 문상을 하면서 부조금(賻儀金)을 전하려하자, 집안사람들이 극구 사양했다. 사례를 받는 것은 고인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자, 같은 일이 반복됐다.
이에 충청 사람들은 십시일반(十匙一飯) 돈을 모아, 당시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인 삼남대로 고갯마루에 이 비를 세워, 지나는 수많은 백성들이 김육의 높은 뜻을 기릴 수 있도록 했다.
비문은 ‘조선국 영의정 김공 육 대동.균역 만세불망비’라는 글귀로 시작한다. 김육이 균역법 (均役法) 시행에도 공이 크다는 것이다.
비석은 귀부, 비신, 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다. 비문은 이민구가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다. 원래 50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970년대에 옮겨 놓았다.
비석이 있는 곳은 ‘소사동’이다. 기념비 앞에 소사(素沙)라 쓰인, 검은 석비가 따로 있다.
평택시 남동부에 있는 소사동은 원래 경기도 양성군(陽城郡)에 속했다가, 안성군을 거쳐 평택에 편입된 동네다. 넓고 평평한 들판인 ‘소사평’이 시작되는 곳으로, 지방하천인 ‘소사천’ 일대에 흰 모래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한 쪽에는 옛 ‘안성군수’들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도 네 개 있는데, 이 곳이 안성군이던 시절을 말해준다.
이 고개는 지금은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조선시대엔 삼남대로의 최고 요충 중 하나였다.
인근에 소사원(素沙院)이란 원(관리들이 지방 출장 중 묵어가는 국립여관)이 있었음은 물론, 임금이 쉴 수 있는 특급 숙소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왕들이 자주 가던 휴식처, 온양온천(溫陽溫泉)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또 근처에 있었다는 석조 미륵불(彌勒佛)도 빼놓을 수 없다. 원이 양반관료들의 쉼터라면, 미륵은 평범한 민초들의 ‘마음 쉴 곳’이자, 미래 희망의 상징이다.
이 길에서 만난 두 역사인물, 박문수와 김육은 철저한 민본주의자들이었다.
또 박문수의 외가인 경주이씨 후손 이회영 선생 형제들, 김육 및 그 집안사람들에게선,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