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외교안보팀장]북한이 새해 첫달에만 벌써 네 번의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한데 이어 정치국회의를 열고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유예라는 모라토리엄 파기를 시사했다. 이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시한 ‘새로운 길’이 본격 시작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이에 대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도 즉각 대북 독자제재 조치를 결정했고, 이에 더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추가 제재 결의까지 추진하고 나섰다. 또 미일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재등장시켰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북한과 미국은 지금 판세를 정확하게 읽고 상대를 꿰뚫어보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당장 북한과 비핵화 협상에 공을 들일 계획이 없고, 북한도 아무런 보장없이 대화 테이블에 앉을 생각이 없다. 더구나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미중 갈등이 장기화될 것인 만큼 북한은 중국의 심기를 살피면서 군사력을 높이는데 치중할 계획이다. 앞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진행한 북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미중 갈등의 파고를 실감했고, 그 파고를 감당할 것을 포기한 입장이다.
2020년 1월 시작된 코로나19 팩데믹이 2년 이상 지속됐고, 2020년 11월 미국 대통령선거가 있으면서 북한의 ‘새로운 길’ 행보가 다소 지연된 느낌도 없지 않다. 무력 차원에서 북한의 ‘새로운 길’의 구체 방향이 작년 1월 8차 당대회에서 설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의 ‘새로운 길’은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제시된 것이다. 또 북한은 그해 5월부터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불리는 단거리 탄도미사일 ‘KN-23’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북극성-3형 고체연료 전환을 시험하며 군사행동에 나섰다.
이후 북한은 2021년 8차 당대회에서 극초음속미사일, 수중 및 지상 발사 고체형 ICBM, 핵잠수함과 수중 발사 핵전략무기, 군사정찰위성, 무인정찰기라는 전략무기 개발 5대 핵심과제를 발표했다. 그리고 1월 22일과 2월 21일 각각 순항미사일, 3월 25일 단거리탄도미사일, 9월 11일과 12일 각각 장거리 순항미사일, 9월 15일 단거리탄도미사일, 9월 28일 극초음속미사일 화성-8형, 10월 19일 신포에서 SLBM을 발사했다. 북한은 올해 들어 1월 5일과 11일 극초음속미사일, 14일 ‘북한판 이스칸데르’ KN-23 단거리탄도미사일 2발, 17일 ‘북한판 애이태킴스’ 단거리 지대지미사일 KN-24 2발을 발사했다.
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다가 합의없이 결렬된 ‘하노이 노딜’ 이후 북한은 지금까지 한미연합훈련 중단 요구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019년 10월 마지막으로 북미가 마주앉았던 스톡홀름 회담에서도 북한은 한미훈련 중단을 요구하며 미리 준비한 듯 “미국 책임”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바이든 집권’ 1년을 계기로 노골화되는 북한의 무력시위를 제2의 협상 카드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북한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벼랑끝 전술을 되풀이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북한 국방과학원이 11일 극초음속미사일 시험발사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진행해 성공시켰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2일 보도했다. 사진은 미사일시험발사를 참관하고 있는 김정은국무위원장. 2022.1.12./사진=연합뉴스
김 위원장은 19일 정치국회의에서 “그동안 잠정 중지했던 모든 활동들을 재가동하는 문제를 신속히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이날 참석자들은 “미국과 장기적인 대결에 보다 철저히 준비되어야 한다는데 대해 일치하게 인정했다”고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이후 조선신보는 미국 등에서 나온 ‘북한이 벼랑끝 전술을 구사한다’는 평가를 반박했다. 조선신보는 22일 “북한이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 ‘벼랑끝 전술을 쓴다고 본다면 오판”이라면서 “북한과 미국의 대결이 장기성을 띄고 있으며, 대미 외교 자체가 북한의 목적이 아니다. 지금 북한의 우선 과업은 사회주의 강국의 건설”이라고 밝혔다.
지금 북미 관계는 지난 ‘2017년 핵무력 완성 선언’ 이후 ‘2018년 협상 시작’이던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국면을 맞은 것이 사실이다. 당시 북한이 대화 테이블에 나섰던 배경에는 트럼프라는 독특한 인물 외에 북한을 관망만 하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관적 태도도 있었다. 북미 협상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시 주석을 처음 만날 수 있었던 김 위원장은 1차 북미정상회담에서 한미훈련 중단을 요구했다. 김 위원장은 이후에도 5차례 시 주석을 만나면서 결코 중국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했을 것이다.
따라서 2018~2019년에 걸쳐 대북제재 완화를 조건으로 영변 핵시설 폐기 등을 주고받았던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 전문가들이 예상한 대로 앞으로 ‘핵보유국 협상’ 또는 ‘군축 협상’이 아니라면 북한은 다시 대화 테이블에 나오지 않을 전망이다. 여기에도 한미훈련 중단 등 한국과 미국이 수용하기 힘든 조건이 따라붙을 것이다. 게다가 2021년 4월 다소 뜬금없는 ‘김정은 친서’가 도착한 뒤 그해 7월 남북통신선을 복원했다가 8월 한미훈련을 비난하며 다시 닫았다가 9월 4일 재복구하는 등 남북관계에서도 ‘북한의 널뛰기’는 지속될 것이다.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해 민족 중심적 낭만주의 사고에 빠져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때때로 북한 편들기를 한 것도 사실로 보인다. 그런데 문재인정부라고 해서 북한으로부터 한계를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고, 특히 ‘하노이 노딜’ 이후 북한의 극심한 반발 속에 대북 인도적 협력사업과 종전선언을 밀어붙인 것은 고육지책이었을 수 있다. 돌이켜볼 때 횟수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지만 문 대통령은 역대 남한의 어느 대통령보다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여러번 만났지만 핵동결도 이루지 못했다. 차기 정권의 대통령이 풀 숙제도 만만치 않다는 의미이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