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곳곳에서 에너지 믹스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지역 분쟁 고조로 연료 수급 불확실성이 높아진 가운데 글로벌 경기 회복 및 전기차 보급 확대 등으로 전력 수요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동 60년이 넘은 발전소의 수명이 연장되고, 유럽연합(EU)이 그린 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시키는 등 원자력이 다시금 조명 받고 있다. 태양광·풍력을 비롯한 재생에너지 발전을 늘린 국가들의 전기요금이 급등하고, 정전으로 공장·난방시설이 멈추는 등 어려움이 발생한 것도 원전에 대한 선호도를 높이고 있다. 이에 미디어펜은 글로벌 시장과 국내 산업 전망 등 원자력이 나아갈 길을 모색해 본다. 글 싣는 순서는 ①EU 택소노미 개정, 에너지 시장 변화 신호탄 ②K-원전, 동유럽·중동서 '권토중래' 가능? ③탈원전 폐기, 산업경쟁력·국민경제 활성화 첨병 이다. <편집자 주>
[원전 르네상스①]EU 택소노미 개정, 에너지 시장 변화 신호탄
[미디어펜=나광호 기자]사장 위기에 놓였던 원자력이 모빌리티 패러다임 시프트 등 전력 수요 확대에 힘입어 다시금 부상하는 모양새다.
9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향후 10~20년간 100여기에 달하는 원전이 발주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국내에 건설된 원전 총량의 4배를 넘는 수치로, 국제에너지기구(IEA)도 2050년 글로벌 원자력 발전 용량이 800GW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치를 내놓은 바 있다.
글로벌 원자력 발전용량(2030년 이후 전망치)/자료=국제에너지기구(IEA)
특히 중국은 '화룽 1호'와 파이낸싱 능력을 앞세워 영국·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수출을 가속화하는 중으로, 자국에서 15년간 150개 안팎의 원전을 추가하는 등 '규모의 경제'를 통해 경쟁력도 강화한다는 전략이다. 러시아도 동구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으며, 외교관계 및 다각적 서비스 제공 등을 무기로 삼고 있다.
미국이 펜실베니아·플로리다 등에 위치한 원전 4기의 수명을 60년에서 80년으로 늘리고, 우크라이나와 스페인도 발전소 가동 기한을 연장했다. 일본에서도 고리 1호기 보다 오래된 원전 3기를 10여년 만에 재가동되는 등 원자력에 대한 니즈가 높아지는 중이다.
이같은 현상을 이끄는 원인으로는 탄소중립 정책이 꼽힌다. 원자력을 제외하고 탄소배출량을 낮추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원료 채굴과 발전소 건설 및 운영 등 전주기 균등화 탄소집약도를 보면 원자력은 kWh당 12g으로, 발전원 중 가장 낮다. 원자력 다음으로 낮은 것은 풍력발전이지만, 8~9MW급 해상풍력 발전기도 1기 당 1800톤 상당의 이산화탄소(CO2)가 배출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철강 1톤 생산과정에서만 1.2톤 가량의 CO2가 나오고, 해상풍력 발전기 건설에는 1500톤에 달하는 철강재가 소요되기 때문이다. 한국형 원자로 APR1400 기준 원전 1기 발전용량과 맞먹는 해상풍력 발전단지를 만들면 18만톤의 CO2 발생을 피하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EU)이 독일·포르투갈·오스트리아·덴마크 등의 반대에도 원전을 그린 택소노미(녹색 분류체계)로 분류하기로 한 것도 이같은 맥락과 무관치 않다. EU는 회원국간 논의를 거쳐 내년 1월부터 천연가스와 함께 원자력에 대한 투자를 친환경 활동으로 본다는 방침으로, 체코와 폴란드를 비롯한 지역에서 추진 중인 신규 원전 건설 프로젝트가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사용후핵연료 처분장 건설을 비롯한 가이드라인이 있으나, 기술 개발 속도 등으로 볼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심층지하처분은 사용후핵연료를 처분용기에 넣어 지하 500m 깊이의 터널에 묻는 것으로, 미국·일본·프랑스·스웨덴·핀란드 등에서는 예전부터 400m 이하 지하연구실을 운영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신형 원전 건설 역시 △APR1400 △미국 AP100 △유럽 EPR을 비롯한 3세대 플러스 발전소가 EU택소노미 개정안의 권고사항을 충족하고 있으며, 경제성과 안전성을 더욱 높인 4세대 원전도 한국·미국·프랑스 등이 공동 개발하고 있다. 2025년부터 사용해야 하는 사고저항성 핵연료 역시 미국에서 이미 시험연소가 이뤄지는 중으로, 한국도 원자력연구원을 중심으로 관련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UAE 바라카 원전 1~4호기/사진=한국전력공사
유럽향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80%가 우크라이나를 거치는 상황에서 이 지역을 둘러싼 동서 갈등이 고조되는 것도 언급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영역을 넓히는 것에 반발한 러시아가 국경 지역에 군을 집결시키고,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가들이 이에 대응하면서 파이프라인이 위협 받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크림반도 사태 때도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한 바 있다.
우라늄도 세계 매장량 2위(약 40%) 카자흐스탄 시위 및 강경 진압으로 가격이 지난달 가격이 전년 동월 대비 50% 가까이 치솟았으나, 같은 기간 국내 원전의 연료 단가는 3.9% 상승에 그쳤다. 발전 단가에서 우라늄값이 차지하는 비중이 8% 수준에 불과한 덕분이다.
기상 악화 상황에서 발전원간 희비가 엇갈린 것도 문제로 꼽힌다. 미국 북서부·남부를 강타한 한파로 풍력발전기 및 천연가스 시추 설비가 다수 얼어붙은 반면, 원전은 전력 공급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공급을 무던히 늘린 캘리포니아에서도 폭염으로 급증한 냉방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40만여가구가 블랙아웃을 겪기도 했다.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를 늘린 것에 따른 부작용도 원전에 힘을 싣고 있다. 지난해 4분기 유럽지역 평균 전기 도매가격이 2015~2020년 평균의 4배를 상회했다는 것이다. 이는 원전 가동률을 낮춘 가운데 바람이 약하게 불면서 전력 수급이 무너졌기 때문으로, 재생에너지의 간헐성과 천연가스값 급등에 따른 타격을 피하지 못한 셈이다.
한편, 한국 역시 재생에너지·LNG 발전량 증가로 한국전력공사의 부담이 급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심형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최근 에너지정책 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협의회(에교협) 토론회에서 "지난 5년간 한전의 부채가 34조원 늘어났지만, 정상적인 이용률로 원전이 가동됐다면 약 10조원의 손실은 방지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도 "세계적인 탄소중립 드라이브로 벌써부터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 에너지 위기의 증후가 강력하고 나타나고 있다"면서 "면밀한 검토없이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법제화를 거쳐 무모하고 급박하게 추진하는 현 방식은 3배 이상의 전기요금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나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