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 1984년 9월 남한에 큰 수해가 발생해 북한으로부터 구호물자를 지원받은 있지만 북한은 당시 30만톤에 달하는 쌀을 남한에 지원한 뒤 식량 고갈 위기에 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30일 정통한 대북소식통에 따르면 1984년 남한이 큰 수해피해를 입자 북한은 통 큰 지원을 제안했지만 이는 ‘거짓 보고’에 속은 김일성 주석의 선심성 외교의 연장선이었다.
북한적십자물자인 쌀을 관계자의 지시에 따라 옮겨실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김일성 시절 말기 북한은 짐바브웨를 비롯한 제3 세계에 식량 지원을 남발했다. 급기야 남한에서 큰 수해가 나자 구호물자까지 보내기로 결정한 것도 각 군 단위의 식량창고를 관리하던 중간 간부들의 허위 보고를 그대로 믿은 지도부의 착오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식통은 “당시 군 단위로 식량창고가 있어서 수확한 식량을 저장해왔다”며 “간부들은 중앙당에 상납할 것만 충당하면 나머지 보관량은 거짓 보고했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당시 ‘주석 창고’ ‘총리 창고’ 식으로 이름 붙인 상납할 식량창고만 간신히 채울 수준이었지만 중앙당에는 수확을 더 많이 한 것처럼 부풀려 보고했다”면서 “당장 굶더라도 실적 부풀리기로 당의 질책을 피해보려던 것이 지도부의 해외에 식량 퍼주기를 불렀다”고 설명했다.
이는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등이 주변의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 기계와 건설 등 지원을 했던 관례를 좇고 싶었던 김일성의 허세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1990년도부터 이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고 하니 비어가는 곳간 사정에 깜깜했던 지도부의 무능함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김일성의 지시를 받은 지방관리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창고의 마지막 남은 쌀을 모조리 털어서 상납하면서도 자신들의 허위 보고는 감추었다.
북한은 남한에 큰 수해가 발생하자 먼저 지원을 제안했다. 남한은 그해 8월31일부터 나흘간 내린 집중호우로 사망 및 실종자가 189명, 이재민 35만여명, 피해액 1333억원을 기록하는 피해를 입었다. 북한은 9월8일 남한에 쌀 5만 섬과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 톤, 의약품 등을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지금까지 일각에서 나온 주장 가운데 당초 남한이 자신들의 제의를 받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 북한의 이른바 ‘립 서비스’를 남한이 받아들여 북한이 정작 수해물자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번 소식통의 전언을 볼 때 북한의 제안은 북한에서 70년대부터 불리던 동요인 ‘통일열차’의 가사처럼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 형제들’을 돕기 위한 선심 공세였다.
북한의 식량 지원이 제기되자 처음 우리 정부는 선뜻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북한이 수해지원을 정치공세로 악용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판단을 바꿔서 북한의 제의를 받아들이기까지 북한의 식량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던 일본 정부의 권유가 있었다는 전언도 있다.
마침 외교부가 30일 공개한 외교문서에 1984년 11월15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한 물자교역 및 경제협력 제의’ 등 경제회담 등의 내용이 나온다. 당시 경제대책실무위원회는 그해 10월29일 작성한 ‘남북교역 및 경제협력추진계획안’에서 북한의 회담 제안 의도에 대해 “중국의 경제개혁 시도가 북한에 영향을 줬다”거나 “김정일의 지도자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 경제 침체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앞서 소식통이 전한대로 북한이 같은 해 남한에 구호물자 지원을 결정한 배경을 본다면 결국 무위로 끝이 난 남북 경제협력 회담도 북한 지도부의 착각에서 이뤄진 것이란 지적이 있다.
허위 보고가 횡행한 당 조직 구조와 이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강압적인 분위기가 북한 사회의 현실인 줄 모르는 지도부만의 자신감에 찬 남북회담 제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