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태우 기자]3년여 기간동안 망설였던 정부가 드디어 중고차 판매업을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지정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기업의 중고차 시장 진출 제한 족쇄가 풀리면서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발 빠르게 시장 진입에 나설 전망이다. 다만 소상공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중소기업사업조정심의회'에서 적정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덧붙여져 향후 완성차 업계와 중고차 매매업계간 힘겨루기가 예상된다.
중소벤처기업부(중기부)는 지난 17일 중고차 판매업에 대한 생계형 적합업종 심의위원회를 열고 오전부터 저녁 늦게까지 심의를 진행한 끝에 중고차 판매업이 생계형 적합업종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심의위는 △중고차 판매업이 영세성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 △중고차 시장의 성장성과 완성차 업계 진출에 따른 소비자 후생 증진 효과 △동반성장위의 중고차 판매업 생계형 적합업종 부적합 의견 등을 감안해 이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3년여 기간동안 망설였던 정부가 드디어 중고차 판매업을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지정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진=미디어펜
중고차 판매업은 지난 2013년부터 2019년까지 6년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돼 대기업 진출이 불허됐었다. 2019년 2월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기간이 끝났지만 중고차 매매업계가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을 신청하면서 대기업 진출 저지에 나섰다.
이 사안과 관련, 동반성장위원회는 법정 시한에 맞춰 2019년 11월 7일 중고차매매업을 생계형 적합업종 '부적합'으로 중기부에 의견서를 제출했으나, 중기부는 법정 최종 심의 종결일(2020년 5월 7일)이 지난 뒤에도 생계형 적합업종 심의위원회를 열지 않은 채 2년 넘게 시간을 끌어 왔다.
그 사이 정보의 비대칭성을 무기로 한 일부 중고차 판매업자들의 횡포로 수많은 소비자들이 낙후 각종 사기와 강매로 피해를 입어왔다. 중고차 강매를 당해 극단적 선택까지 한 사례도 있었다.
2020년 총선, 2021년 역대급 재보선, 그리고 2022년 대선 등 역대급 정치 이벤트가 있었다는 점에서 중기부가 '정무적 판단'으로 결론을 미뤄왔다는 의혹도 일었다. 정부가 어떤 식으로건 결론을 내린다면 어느 한 쪽은 선거에서 여당에 불리한 '실력행사'에 나설 가능성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중기부가 6월 지방선거를 의식해 또 다시 결론을 미룰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으나 결국 이날 결론을 냈다.
완성차 업계는 심의위의 이번 결정에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는 이날 "심의위가 중고차판매업을 생계형 적합 업종으로 미지정한 것은 그동안의 비정상 상황을 정상적으로 전환해줬다는 측면은 물론, 향후 중고차 산업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적극 환영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중고차 시장 진출을 준비하며 생계형 적합업종 심의위원회의 결론을 기다리고 있던 현대차와 기아 등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조만간 중고차 사업을 구체화할 전망이다.
현대차의 경우 이미 지난 7일 중고차 사업 방향을 공개하며 시장 진출을 향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현대차는 중고차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제조사로서 보유한 기술력을 활용해 정밀한 성능검사와 수리를 거친 후 품질을 인증해 판매하는 인증중고차(CPO, Certified Pre-Owned)를 시장에 공급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5년 10만km 이내 자사 브랜드 차량을 대상으로 국내 최대수준인 200여개 항목의 엄격한 품질검사를 통과한 차량만을 선별한 후 신차수준의 상품화 과정을 거쳐 판매한다.
또한 정밀한 성능·상태 검사를 기반으로 차량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판매가격을 소비자들에게 투명하게 제시한다.
국내 최고수준의 중고차 품질검사와 인증을 위해 자사가 보유한 제조 및 AS 기술력을 활용해 총 3단계에 걸친 중고차 품질검사 및 인증체계(매집점검-정밀진단-인증검사)를 마련하고, '인증중고차 전용 하이테크센터'를 구축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인증중고차 전용 하이테크센터에서는 정밀한 차량진단과 정비가 이뤄질 수 있도록 최첨단 스마트 장비를 갖출 예정이며, 정밀진단 후 정비와 내외관 개선(판금, 도장, 휠·타이어, 차량광택 등)을 전담하는 상품화 조직을 운영해 중고차의 상품성을 신차 수준으로 높인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고객이 타던 차량을 매입하고 신차 구매 시 할인을 제공하는 보상판매(트레이드 인) 프로그램도 선보이는 등 완성차와 중고차 사업을 연계한 서비스도 진행한다.
현대차는 고품질 인증중고차 공급과 적정가격의 중고차 매입이 지속되면 중고차에 대한 신뢰 증가로 이어져 잔존가치(residual value)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고차를 보유한 소비자 입장에서 잔존가치 상승은 중고차 매각 시 제값을 받는데 기여하기 때문에 만족도가 높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현대차는 또 '중고차 통합정보 포털'을 구축하고 자사 고객뿐 아니라 타사 고객과 기존 중고차업계 등 모든 중고차시장 참여자들에게 공개해 정보의 독점을 해소하고 중고차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방침이다.
중고차 통합정보 포털에서는 중고차 거래 시 주요 피해유형 중 하나인 허위·미끼 매물을 걸러내는 기능도 제공한다. 하나의 매물에 대해 다양한 출처의 정보를 교차 체크해 정보의 왜곡과 허위 여부 등을 판별해내는 서비스로 불법행위 근절에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고차 판매업이 생계형 적합업종에서는 제외됐지만 아직 걸림돌은 남아있다. 심의위가 완성차 시장에서 점유율이 높은 현대차와 기아의 중고차 시장 진출시 중소기업‧소상공인의 피해가 예상된다며 '중소기업사업조정심의회'를 통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번 결정에 대한 중고차 매매업계의 반발을 의식해 현대차‧기아의 중고차 시장점유율 제한 등을 다시 논의하라는 의미로 읽힌다.
앞서 한국자동차매매사업조합연합회와 전국자동차매매사업조합연합회는 지난 1월 현대차와 기아에 대해 사업조정을 신청한 바 있으며, 중기부는 현대차에 사업 일시정지를 권고한 상태다.
중기부는 향후 중소기업 피해 실태조사 이후 사업조정심의회를 개최한다는 방침으로, 지난 생계형적합업종 심의위와 마찬가지로 또 다시 오랜 시간이 소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대차는 중고차 매매업계와의 상생협력 방안으로 △5년 10만km 이내의 자사 브랜드 중고차만 판매 △인증중고차 대상 이외 매입 물량은 경매 등을 통해 기존 매매업계에 공급 △연도별 시장점유율 제한(2022년 2.5%, 2023년 3.6%, 2024년 5.1%) △중고차 통합정보 포털 공개 △중고차산업 종사자 교육 지원 등을 제시한 상태다.
하지만 중고차 매매업계가 지난해 완성차 업계와 중고차 매매업계간 협의체인 '중고차매매산업 발전협의회'에서 △지나치게 낮은 수준의 점유율 제한과 △'트레이드 인' 구매방식 금지 △ 신차 판매권 할당 등을 요구했던 점을 감안하면 사업조정심의에서도 진통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중고차 매매업계는 완성차 업체들의 시장점유율 제한의 기준이 되는 모수(母數)를 전체 시장 규모(2020년 기준 250만대)가 아닌 사업자 거래 매물 기준(130만대)로 한정해야 된다는 입장으로, 그 경우 완성차 5사가 아닌 현대차의(상생협력 방안상의) 점유율만으로도 제한을 넘길 수 있다.
또, 트레이드 인 구매방식을 제한하면 현대차가 중고차 사업 계획에서 밝힌 보상판매도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신차 판매권 할당은 완성차 업계에서 아예 고려 자체가 불가능한 사안이다. 사업권 침해 문제로 민간 기업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인데다, 설령 받아들이더라도 영업직 노동조합이 허용할 리 없기 때문이다.
결국 중기부는 중고차 시장 개방 문제에 있어 또 다른 분란의 불씨를 남겨둔 셈이다.
완성차 업계 한 관계자는 "중고차 시장 진출에 대한 법적 제한이 가해지지 않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다행으로 생각한다"면서 "기존 중고차 매매업계와의 상생 방안도 충분히 제시한 만큼 사업조정심의 문제도 원만하게 해결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자동차산업협회는 "중기부 사업조정심의회는 이날 생계형 적합업종심의위 결정의 정신을 존중해 같은 차원과 방향에서 조속히 사업조정을 해가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미디어펜=김태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