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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걷기] 호암산길

2022-03-27 08:16 | 윤광원 취재본부장 | gwyoun1713@naver.com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서울 금천구의 주산은 호암산(虎岩山)이다.

조선왕조 건국과 한양 천도 이후,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꿈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 반은 호랑이이고 반은 모양을 알 수 없는 이상한 괴물이 눈에 불을 내뿜으며, 궁궐을 들이받으려 했다. 군사들이 화살을 쏘아댔지만, 괴물은 아랑곳없이 새로 짓던 궁궐을 여러 번 부숴버렸다.

태조가 침통한 마음으로 침실에 들었을 때, 어디선가 한양(漢陽)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었다. 잠에서 깬 태조는 왕사(王師)인 무학대사를 불러 꿈 이야기를 했다. 이에 무학대사는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산 꼬리에 호압사를 창건하게 됐다. 호랑이를 누른다는 뜻의 호압사(虎壓寺).

산 이름은 당연히 호암산이 됐다.

정상부를 밑에서 보면, 영락없이 호랑이의 등을 닮았다.

해발 325m의 험준한 바위산으로, 민주동산(民主童山)이라고도 부른다. 군사독재 시절,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이 산에서 자주 모여 민주주의 회복을 염원했다고 해서, 이런 별칭이 붙었다.

호암산의 능선은 계곡을 따라 길게 이어져, 수도권전철 1호선 석수역(石水驛)관악역인근까지 계속된다. 삼성산의 또 다른 산줄기도 이 곳에서 끝난다. 마치 말굽자석 모양으로 두 산줄기가 경인교대 골짜기를 감싸고 나란히 달려 내려가, 비슷한 지점에서 끝나는 것.

오늘은 이 호암산을 올라본다.

호암산 신랑각시바위/사진=미디어펜


1호선 관악역(冠岳驛)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간다.

경수대로를 따라 조금 가다가,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길을 건넜다. 맞은편에는 한마음 선원(禪院)’이 위용을 자랑한다.

삼막로를 따라가다가, 4번째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든다. 식당들이 많은 먹거리 촌이다. ‘삼막 칡 냉면앞에서 왼쪽 골목으로 접어들어 조금 오르면, ‘굴다리가 보인다. 바로 제2경인고속도로(第二京仁高速道路) 밑을 통과할 수 있는 지점이다.

굴다리를 지나니, 바로 산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계단을 힘들게 오르면, 능선(稜線) 길로 이어진다. ‘금강사로 갈 수 있는 삼거리를 지나, 석수역 방향으로 간다. 숲 사이로 경인교대(京仁敎大) 캠퍼스가 내려다보인다.

석수역으로 내려갈 수 있는 삼거리를 지났다. 길옆에 돌탑 2개가 있다. 하나는 수직으로 높이 쌓았고, 다른 하나는 옆으로 펑퍼짐하게 넓다.

사거리를 지나 직진한다. 이 산줄기는 석수능선이다.

유순한 흙길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거친 암릉(岩稜) 길로 바뀐다. 오른쪽 장군능선 너머에서, 관악산이 손짓한다.

이윽고 예사롭지 않은 돌무더기가 보인다. 바로 호암산성(虎岩山城) 성문 터다.

호암산성은 사적으로 지정된 옛 산성으로, 신라(新羅) 때부터 있었다. 산 정성을 중심으로, 빙 둘러 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둘레는 1547m이며, 그 중 약 1016m 정도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다.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신라가 삼국통일(三國統一)을 하는 과정에서 축성, 군사적 거점 및 행정 치소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 절벽에는 신랑(新郞각시바위’, 일명 사랑바위가 있다.

옛날 호암산 아랫마을에 믿음직한 총각과 어여쁜 낭자(娘子)가 한 마을에 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그러나 양가 집안이 대대로 원수 사이여서, 집안 사람들은 이들의 관계를 반대하며 다른 사람과 혼인을 시키려 했다.

낭자는 야밤에 집을 나와 홀로 산에 올라, 목숨을 끊으려 했다. 이를 안 총각은 그녀를 찾아, 깊은 밤 온 산을 헤메다가, 절벽 위에 홀로 서서 세상을 하직하고자, 기도(祈禱)를 하는 낭자를 발견했다. 이들은 손을 맞잡고 흐르는 눈물을 서로 닦아주며, 꼬박 긴 밤을 지새웠다.

이들의 애절(哀切)한 사연은 달님에게까지 전해졌다.

달님은 이들이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도록, 그 자리에 우뚝 선 바위로 만들어주었다.

그 후 아랫마을에서는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이 곳에서 손을 맞잡고 사랑을 고백하면, 혼인을 할 수 있게 되고 결혼 후에는 옥동자를 점지해 줬으며, 백년해로(百年偕老)했다고 한다.

전설(傳說)처럼, 신랑각시바위는 젊은 남녀가 서로 꼭 껴안고, 마주보며 서 있다.

바위 아래, 금천구의 시가지가 넓게 펼쳐진다. 광명시 구름산도 보인다.

계속 길을 따라가면, 곧 제2우물지(第二井址)가 보인다.

산성 내 식수원 확보를 위해, 삼국시대 때 신라가 조성한 석축 우물터로 추정된다.

조금 더 가면, 오른쪽 언덕 위에 석구상(石狗像)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경기읍지시흥읍지에 따르면, ‘호암이라는 바위가 현의 진산인 금지산(호암산)에 있는데, 그 모양이 호랑이를 닮아서, 한양으로 도읍을 삼을 때 이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호암의 북쪽에 돌로 만든 사자(獅子)를 묻고, 남쪽에는 돌로 만든 개를 묻었다.

해태상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형태가 개에 가깝다고 해서 석구상이라 부른다. 19901우물지발굴조사 당시, 조선시대 건물에서 석구지(石狗池)라고 새겨진 석재가 확인됐다.

석구상은 길이 1.7m, 높이 1.0m 가량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도 명확하다.

석구상 앞에서 왼쪽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1우물지’, 즉 한우물(大水井)이 있다. 사적으로 지정된 한우물은 큰 우물혹은 하늘 못(天井)이란 뜻이다.

삼국시대 처음 축조돼, 조선시대에 증축된 연못으로, 길이 22m, 너비 12m, 깊이 1.2%. 네 변을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용보(龍洑)라는 별칭이 있다. 가뭄 때는 기우제를 지내고, 전시에는 군용으로 사용했다.

1991년 통일신라와 조선시대 두 시기의 못을 함께 복원했다.

문무왕(文武王) 때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 때는 선거이(宣居怡) 장군이 왜군과 싸우면서 군용수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한우물 바로 옆은 불영암이다.

아담한 대웅전(大雄殿) 법당 앞에는 길 양쪽으로 멋진 돌탑들이 늘어서 있다. 그 옆으로 지붕만 있는 종각에 범종과 목어 등이 달려 있고, 한쪽엔 돌절구와 맷돌 등 산성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암자 뒤에는 바위 위에 큰 불두(佛頭) 하나가,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기가 막히다.

다시 능선을 따라 걷는다. 지형이 가팔라 깔딱고개라 불리는 고개도 지난다.

곧 호암산 정상이다. 정상은 바위에 태극기가 꽃혀 있어, 국기봉(國旗峰)이라고도 한다. 밑에서 올려다본 정상부는 아찔한 암벽(岩壁)이다.

반대편으로 건너와 잠시 쉬다가, 가파른 계단 길을 한참 내려간다.

드디어 호압사가 나왔다.

호압사/사진=미디어펜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 사찰인 호압사에는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8호인 () 약사여래(藥師如來 좌상(坐像)’이 모셔져있고, 도량 내에는 500년이 넘은 수령의 보호수 느티나무 2그루가 사찰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 준다.

절 마당 한복판에는 마치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같은, ‘8각 9층 석탑이 장관이다. 호압사 본전은 약사전(藥師殿)이다.

절 입구의 배불뚝이 달마상이 익살스럽다. 그 불룩한 배를 만지며 소원을 간절히 빌면, 이뤄진다는 속설이 있다. 그 옆 동자불(童子佛)은 참 귀엽고, 절집에서 파는 아메리카노 커피는 가성비가 좋다.

호압사 옆 차도로 바로 하산한다. 제법 가파른 아스팔트 도로다.

저 아래 산문, 즉 일주문이 보인다. 호암산문(虎巖山門)이란 현판을 달아 놓았다.

벽산아파트 3거리를 지나 관악산 벽산타운 1단지 아파트를 끼고 우회전, ‘금하로를 따라 내려간다. 이 동네는 시흥2이다. ‘동일여자고등학교앞을 지났다.

도로 옆에 시흥향교(始興鄕校) 터 표석이 보인다.

조선시대에 공자 등 성현들을 봉안하고 유생들을 교육시키던 곳으로, 1944년 일제가 과천향교(果川鄕校)에 통합시켰다고 한다.

도로 가운데, 큰 은행나무가 보인다. 수령 800년 이상 된 노거수다.

여긴 아마도 시흥 관아(官衙)가 있던 곳 같다. 은행나무는 관아 입구에 많이 심었던 수종이다. 한옥 담장도 조금 있다. 시흥은 조선시대 현감(縣監)과 현령이 다스리던 고을이다. ‘치고는 격이 가장 높았다

그 옆에는 비석이 몇 개 서 있다.

금천구 시흥5동의 은행나무가 서있는 부근을 예전부터 비석거리라고 불러왔다. 시흥현령의 선정비(善政碑) 4기가 서 있기 때문이다

현령 김병이, 이장혁, 조용구, 방천용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들이다.

건너편 전통시장은 은행나무시장이다. 조금 더 가면, 은행공원(銀杏公園)도 있다.

금하로를 따라 계속 가다가 금빛공원을 지나고, ‘시흥사거리금천파출소앞을 거쳐 좀 더 가면, ‘서해안고속도로와 안양천(安養川)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전철 1호선 금천구청역(衿川區廳驛)이 있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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