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류준현 기자] 정부가 자영업자·소상공인을 돕기 위해 마련된 30조원 규모의 배드뱅크 '새출발기금'을 두고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와 채권자-채무자 간 정보의 비대칭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은행권 등 시장이 채무를 선(先)조정하는 자정작용 없이 정부가 섣불리 개입함에 따라, 자영업자·소상공인에게 빚을 탕감해준다는 시그널을, 금융권에게는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호가(呼價)에 부실채권을 매입할 수 있다는 시그널을 각각 줬다는 평가다.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서 최후의 보루이자 '구원투수'로 움직여야 할 기금이 '선발투수'로 등장하면서, 오히려 채권자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김주현 금융위원장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았다. 김 위원장은 새출발기금의 도덕적해이 논란과 관련해 "이해부족에서 발생한 잘못된 지적"이라고 반박했다. 은행권은 부실차주의 원금감면 수준이 지나치다는 점을 들어 난색을 표하고 있다./사진=대통령실 제공
9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발표한 '금융부문 민생안정 과제의 추진현황 및 계획'에 따라 오는 10월부터 최대 30조원 규모의 '새출발기금'을 설립한다. 기금을 통한 채무조정은 코로나19로 피해를 본 소상공인·자영업자의 기존 대출을 연 3~5%의 장기분할상환대출로 바꿔주고, 연체 90일 이상 부실차주에 대해 60~90% 수준의 원금을 감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은행권은 정부 주도로 세워지는 기금이 지나친 원금감면으로 모럴해저드를 부추긴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감면율을 10~50%로 낮춰야 한다는 의견도 내놨다.
이를 두고 금융위는 전날 "현행 채무조정 프로그램 및 새출발기금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발생한 잘못된 지적"이라며 은행권 주장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금융위는 "기존의 채무조정 프로그램을 통한 원금감면시에는 그 손실을 은행권이 전액부담하는 반면, 새출발기금은 추경을 통해 편성된 재원에서 원금감면 손실을 부담하는 점을 참고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기금의 기본 구조와 채무조정 원칙은 현행 채무조정 프로그램 등과 동일하고, 소득·재산이 충분한 차주는 빚을 탕감할 수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금융위는 "현행 채무조정 프로그램의 원금감면 한도나 평균 감면율을 고려할 때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정도의 과도한 감면이라 보긴 어렵다"며 "원금감면율 90%는 기초생활수급자, 중증장애인, 만 70세 이상의 고령자 등 사실상 원금상환여력이 없는 취약계층에 한해 적용되는 감면율로 현재 신복위 워크아웃 제도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과 내용이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차주가 기금을 이용하면 신규 금융거래가 제한되는 점도 강조했다. 금융위는 "해당 차주들은 금융채무불이행자 등록으로 인해 신규 대출, 신용카드 이용 등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는 등 7년의 장기간 동안 정상금융거래를 할 수 없음을 고려할 때, 상환능력이 있는 차주가 원금감면을 받기 위해 고의적인 연체를 통해 금융채무불이행자가 되고자 할 유인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당국과 금융권이 보이지 않는 설전을 벌이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기금이 기대보다 큰 실익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를 내놨다. 유경원 상명대학교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하나금융포커스에 기고한 논단 <최근 '빚 탕감' 논란과 시사점>에서 정부 정책에 대해 '구원투수가 갑자기 선발투수로 등판한 셈'이라고 일갈했다. 지난 문재인 정권이 부실차주의 원리금 상환을 계속 유예하면서 부채를 키운 점은 있지만 해결방식이 잘못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배드뱅크는 장부를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제도인 만큼, 처음에 참여자를 많이 끌고 가야 하고, 이들의 채무를 조정해서 청산가치보다 더 상환하게 만들어야 한다"며 "(최종 악성채무만) 빠르게 마무리해야 할 구원투수에게 1회부터 8회까지 달리라 하니 되겠느냐"고 지적했다.
이어 "채무조정제도는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갈리는 정책이다. 가시적으로 누군가에게는 피해가 가고 누군가에게는 이익이 가는 것처럼 보이니 (국민들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채권자로서도 정확하게 이득이라 얘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여론 악화로 기금 이용조건이 까다로워진 만큼, 채무조정도 어려울 전망이다. 현행 제도에 따라 금융권이 선제적으로 악성채무를 해결해야 하는데, 당국이 자영업자·소상공인, 가상자산 투자에 실패한 청년들을 타깃으로 빚을 탕감하겠다고 밝힌 탓이다. 이후 여론 분위기가 악화됐고, 정부가 해명과정에서 채무탕감 조건을 까다롭게 내걸어 일종의 높은 '진입장벽'을 만들었다는 것.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아도 될 '패'를 모두 보여줌으로써, '채무자 프렌들리'로 움직여야 할 채무조정이 '채권자 프렌들리'로 유도했다는 분석이다.
은행권이 어떤 부실차주를 구제해줄지도 불명확한 상황에서 당국의 해명이 악성차주에게는 더 빚을 내도록 유도하고, 은행에게는 입맛에 따라 부실채권을 캠코에 매각할 수 있도록 빌미를 제공한다는 설명이다.
채무조정에 따른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도 논란이다. 유 교수는 "채무조정제도는 채무자 소비지출의 급격한 변동에 대비하는 보험의 역할을 수행하므로 채무자와 채권자 간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는 한 도덕적 해이 발생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품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 교수가 우려하는 정보의 비대칭성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채권자인 은행과 채무자인 소상공인·자영업자 간 문제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정량적 데이터로 상환능력을 평가하지만, 대출을 추가로 일으키려는 채무자의 이기적 마음까지 파악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은행과 은행의 부실채권을 매입하는 캠코 간의 정보의 비대칭성도 문제다. 은행이 현장에서 파악한 차주의 실질적 데이터와 은행 채권을 기반으로 부실여부를 판단하는 캠코 사이에서 위험의 경중(정보)을 두고 비대칭성이 있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즉 겉은 우량해 보이지만 실속이 없는 기업들을 처리할 수 없어 악성부채로 남을 수 있다는 평가다.
유 교수는 "채권조정 문제는 (금감원장이 구두지도만 주고) 금융권이 알아서 하도록 시장에 맡겨야 하는데, 정부가 제도로 조정하면서 시장에 (채권을) 인수하겠다는 시그널을 준 셈"이라며 "정부로선 실적이 있어야 하는 만큼 부실채권을 장부가액보다 비싸게 인수할 수도, (기금 조건이 까다로워져) 예상보다 채무조정이 안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캠코가 적정 가격에 매입하면 은행권에겐 이득이 되고, 매입가가 예상보다 낮으면 은행들이 채무조정에 비협조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채권 실무진의 어려움도 예상된다. 여론 악화로 빚 탕감에 대한 리스크와 책임소지가 따르는 만큼, 실무자는 매우 제한적으로 탕감책을 펼칠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김주현 금융위원장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았다. 김 위원장은 새출발기금의 도덕적해이 논란과 관련해 "이해부족에서 발생한 잘못된 지적"이라고 반박했다. 은행권은 부실차주의 원금감면 수준이 지나치다는 점을 들어 난색을 표하고 있다./사진=대통령실 제공
현재 정부는 기금을 이용할 차주의 채권을 캠코 외 제3자에게 매각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은행 등이 채권을 대부업 등 제3자에게 매각하면 차주가 기금의 수혜를 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더불어 연체원리금에 대한 추심, 담보물 강제매각, 취업·이직 제한 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당국은 금융권이 채권을 매각하는 행위를 사전에 방지해 차주에게 채무조정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은행이 '헐값'에 채권을 매각해야 하는 위험도 따른다.
이를 두고 금융위는 "(기금은) 회계법인의 가격결정 공식에 따라 산정된 시장가에 기반해 복수의 기관이 평가한 공정가치를 통해 채권을 매입한다"며 "채권 매입가격이 채권가격의 최대 35%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어 "제3자에게 매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코로나 피해 자영업자·소상공인에 대한 지원을 위해 불가피하다"며 "제3자에 대한 채권매각을 제한해 차주들이 채무조정 지원을 받기 전 대부업 등에 매각돼 채무조정의 기회를 잃지 않도록 금융권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채무조정이 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유 교수는 공적·사적 상시적 채무조정제도를 정비해 대규모 채무조정에 대비하고, 비상시적 방안도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가계부채가 2000조원을 넘나들어 부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한 번에 부실이 (복합적으로) 터지면 경제에 큰 충격이 발생하니 (위험도에 따라) 기간에 나눠 선제적으로 처리해주는 게 낫다"고 진단했다. 이어 "금융위 최초 방안에도 언급되듯 채무조정은 시장에 맡겨 은행이 자율 조정할 수 있도록 하거나, 법원 파산 및 신복위 프로그램 등 공적조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디어펜=류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