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조우현 기자]고 최종현 SK 선대회장 서거 24주기를 맞은 26일, 최 회장의 기본 철학이었던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최 회장은 국내에서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이론이 가장 탄탄했던 기업인으로 평가 된다. 그는 대한민국이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시장경제의 근간이 되는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지향해야 한다고 믿었다.
최 회장의 시장경제에 대한 소신은 그의 행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며 자유시장경제 정책 구현에 앞장선다.
그는 대한민국이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대기업이 많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못 사는 나라의 특징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기업이 없고, 잘사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강한 기업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정부가 기업 활동에 간섭해선 안 된다’는 입장도 견지했다. 정부의 주된 기능은 기업을 지원하는데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고 최종현 SK 회장이 1982년 1월 신입사원 연수교육 과정에 참석해 특강을 하고 있다. /사진=SK 제공
하지만 그의 철학은 정부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최 회장은 1995년 전경련 회장에 세 번째 연임하던 날 “대기업 규제 정책이 글로벌 스탠더드와 맞지 않다”고 언급했다가 “감히 정부 정책에 재계가 대든다”는 뒷말을 들어야 했다.
당시 김영삼 정부가 경제력 집중을 억제한다는 기조 하에 그룹 경영의 컨트롤타워인 기획조정실 해체를 포함한 경제 개혁안을 발표한 직후의 일이었다.
최 회장은 정부의 개혁안에 대해 “문어발이니 업종 전문화 정책은 무한경쟁시대에 맞지 않는다”며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 때나 하는 이야기”라고 지적했다. 정부의 촘촘한 규제는 결국 기업경쟁력 훼손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그러나 최 회장의 소신 발언은 SK그룹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로 되돌아왔다. 최 회장은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발언에 유감을 표했고, 경제부총리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됐다.
그럼에도 최 회장은 ‘정부의 주된 기능은 기업을 지원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소신을 꺾지 않았다. 시장경제의 주인공은 기업과 국민이지, 결코 정부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자유기업원 열림홀에 전시돼 있는 고 최종현 SK 회장 사진. /사진=미디어펜
하지만 그의 이런 생각을 전파하기엔, 당시 자유에 대한 인식이 척박했다. 때문에 그는 한국판 ‘헤리티지 재단’을 꿈꿨다. 헤리티지재단은 미국 공화당의 싱크탱크로 ‘작은 정부. 큰 시장’이라는 기조 하에 시장경제 이론을 전파하는 연구소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자유기업원의 전신인 자유기업센터다. 최 회장이 재임 중이었던 1996년 전경련 내부조직에서 출발한 자유기업센터는 1997년 4월 1일 재단법인으로 독립했다. 반시장‧반기업적 시민단체와 맞서기 위해 따로 분리된 것이다.
자유기업센터는 애덤 스미스, 프리드리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 자유주의 시장경제학파의 명저 발간을 주도했다. 이후 자유기업원으로 명칭을 바꾼 재단은 현재까지 자유주의 시장경제 창달에 앞장서고 있다.
현재 자유기업원 열림홀 내부에는 최 회장의 사진과 함께 “한국인은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이 땅에 구현함으로써 경제 강국으로 자리 잡아,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민족의 생존을 보존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맞고 있다”는 그의 설립취지문 일부가 벽에 걸려있다.
최 회장은 당시 설립 취지문을 통해 “이 모든 것들은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전제로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법과 제도, 그리고 관행이나 관습의 개선과 개혁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최 회장의 철학은 현 시점의 대한민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한국 경제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원자재 값 상승과 고물가, 고환율, 고금리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 같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최 회장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미디어펜=조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