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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조선 왕공족, 그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하였는가

2022-10-25 15:45 | 문상진 기자 | mediapen@mediapen.com
[미디어펜=문상진 기자]조선은 왕이 국가를 사적인 세습 재산으로 취급하던 가산제(家産制) 국가였다. 나라가 원래 왕의 것인데, 그래서 왕이 나라를 팔겠다는데 뭐라 할 수 있겠는가?-p.p.321~322쪽

친일논쟁은 언제나 우리에겐 불치의 통증처럼 해소되지 미완의 짐이자 원인불명의 두통같은 존재다. 극일(克日)을 넘어 용일(用日)을 얘기하든, 툭하면 친일청산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자들이건 온전히 모두의 가슴속에 남은 앙금을 지우기엔 미력하다. 이해 없는 으르렁거림이 생채기를 덧나게 할 뿐이다. 

그래서 정치적 셈속에 약삭 빠른 이들에겐 영원한 양식이다. 역사적 사실로 진실을 갈구하는 건 어쩌면 그들에겐 밥그릇을 빼앗기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다. '덮고 더블로' 후벼파고 격정적인 토벌꾼식 격문을 토해낸다. 결과론적으로 밑지는 장사가 아님을 알기에 장마철 우산장사처럼 때만 되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아프지만 역사는 포장되지 않는다. 승자의 기록으로 몰아치는 건 제대로 알지 못한 부족함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다. 양심을 거스른 치졸한 자들의 이기심으로 때때로 왜곡될 뿐이다. 어제의 오욕을 오늘의 실패로 되풀이해선 안되는 거울이기에 부끄러움이 아닌 정신적 자산이기도 하다.    

분노한 역사도 냉철한 가슴으로 읽어내야 한다. '조선 왕공족'(신조 미치히고 지음, 이우연 옮김)은 그런 책이다. 1910년의 한일합방을 직설적이면서도 날카롭게 응시하며 일갈한다.나라를 일본에 넘기고 그들 자신은 일본제국 황실에 '조선 왕공족'으로 편입된 고종과 그 형, 순종과 그 후손들까지, 제국 일본의 신민(臣民)이 된 4대 26명의 이후 행적을 파헤친 책이다. 그래서 조금은 불편하다.

한일합방은 총 한 방 안 쏘고,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종이(조약) 위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저자는 '을사오적'이라 지목하는 중신(重臣)들은 차치하고, 대한제국 황제는 어떻게 그토록 순순히 나라를 통째로 내줄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에 이씨 황실이란 '가(家)'의 제사의 보전이 그 대가였다고 지적한다. 일본제국 황실에 '조선 왕공족'으로 편입된 그들은 일제 강점기를 어떻게 살아갔으며, 해방 후에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망국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 대부분은 철저히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하며 살아갔다. 저자가 일본인이기에 거침없이 쓸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감안해도, 일본제국에 대한 이들의 충성스러운 태도나 일부 인사들의 조신하지 못한 사생활은 같은 한국인이 읽기에 낯부끄러울 정도다.

'망국의 임금' 순종은 창덕궁에 대화재가 일어나자 이완용이 화재를 복구하기까지 잠시 덕수궁으로 이어(移御)할 것을 추진했으나 순종은 "천황폐하로부터 받은 창덕궁이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순종의 이복동생으로서 황태자에 책봉되고 이토 히로부미의 눈에 들어 어린 나이에 일본에 유학한 영왕 이은은 일본 황족과 마찬가지로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제국 군인의 길에 충실했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 항공대가 미국에 연전연패할 때는 아들 이구에게 "폐하께 면목이 없다"고 했다. 책은 그 밖에 이은·이강보다 덜 알려진 그들의 2대 후손들까지의 일화로 그득하다.

이은은 일본 덴노의 방계인 마사코 공주(이방자)와 결혼했고, 이복여동생 덕혜옹주는 쓰시마 번주(藩主)의 후손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했다. 정략결혼이라는 의구심에 대해 저자는 신분제도가 아직 공고하던 일본에서, 아무튼 황족에 편입된 조선 왕공족과 혼인으로 연결되는 것은 일본의 황족·왕족·지방귀족의 입장에서도 가문과 위세를 유지하는 데 확실히 보탬이 됐다고 지적한다.

왕공족은 법적으로는 '일본' 황족으로 간주되지 않았지만, 예우 상으로는 황족으로 취급됐다. 예를 들면 경칭은 황족과 동일하게 '전하'였고, 왕족인 이태왕(고종)이나 이왕(순종)의 장례는 황족에도 좀처럼 내리지 않는 국장으로 치렀다. 공족인 이우(李鍝) 공이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피폭으로 사망했을 때는 시종무관 요시나리 히로시 중좌가 자책하는 마음으로 자결했다. 

책장을 덮고서도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한일 각자의 국가적, 민족적 자존심 문제를 넘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이 조금은 아쉬운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 작심하고 쓴 만큼 향후 제대로 치열하게 연구하고 더 생산적인 역사를 짚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왕공족의 창설이나 그들이 택한 길과 처우가 '일제 강점'이라는 정서앞에 숨기고픈 역사로만 남아서는 안되기에.

[미디어펜=문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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