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자들도 조용히 지상의 품을 떠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들, 그 큰 비밀을 필요로 하는 우리들,
가끔은 슬픔으로부터 지극히 행복한 진전을 얻는 우리들,
우리는 과연 그 죽은 자들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中
11월의 첫 날을 맞았지만 10월 끝자락의 충격은 환청을 부른다. 영안실에서 자식의 이름을 부르는 부모의 목소리가 여전히 또렷하다. 황망한 월요일을 지나 화요일을 맞았지만 첫 소식은 또 하나의 하늘이 무너졌다는 비보다. 이태원 참사의 피해자가 154명을 늘었다. 애도와 애통이 널뛰며 공감의 슬픔이 심신을 치지만 섣불리 표현할 수 없다.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을 겪는 유가족이 있음을 알기에 그렇다.
푸른 하늘도, 눈부신 해도 잿빛이다. 아직 생사를 확인하는 애달픈 이름들이 영안실과 병실을 떠돌고 있다. 그나마 청량한 위로는 선한 이웃들의 면면이다. 늦은 밤 좁은 장소에서 갑작스레 발생한 참사의 현장에서 한 명이라도 더 살리겠다고 팔이 부러져라 CPR에 나섰던 시민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렸던 셔터를 올려 가게를 오픈하거나 장사를 접고 구조에 나선 상인과 종업원들의 이야기는 눈시울을 붉게 한다.
지난달 31일 한 청소년이 서울시청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한 명이라도 더 살리겠다며 동분서주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더 살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눈물을 쏟는 이웃들이 있었다. 이들의 존재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또 겪어본 적 없는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는 공감능력이 이웃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물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반면 참사의 현장에서 악마를 본 이웃도 있다. 의사 A는 근방에 있다가 사고 소식에 현장으로 달려갔다. 끔찍한 현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현장보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바닥에 눕혀져 피를 흘리는 이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거둬내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을 하는 그의 귀에 들려온 구경꾼의 목소리는 이러했다고 한다. “아씨, 홍대 가서 마저 마실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사라진 살풍경이 지옥과 잇대어 있다.
이 슬픈 날에 이웃으로 살기 위해 우리가 새겨야 할 최소한의 도리는 없는 걸까. 우리 애가 무사하다는 이기적 안도감을 넘어 이웃으로서 도리는 없을까. 떠난 이들을 대신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걸까. 이후 이웃으로서 살아가는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는 너무나 푸릅니다"
-엔도 슈사쿠, 침묵의 비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
[미디어펜=김진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