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석원 정치부장]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난 후 철저한 소련 의존 경제 체제였던 쿠바는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는다. 미국의 강력한 경제 제재 속에서도 소련으로부터 원조에 가까운 경제 지원을 받으며 버텨오던 쿠바는 순식간에 무역의 80%가 줄어들고, GDP의 70%가 줄었다. 소련에서 80%에 달하는 원유를 제공 받았는데, 그게 끊기면서 나라 전체에 기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때 쿠바의 통치자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은 이른바 ‘특별시기(Periodo especial)’를 선언한다. 미국의 경제 제재와 국제 사회로부터의 고립은 여전한 상황에서 그나마 경제의 숨골 역할을 하던 소련마저 붕괴해 고립무원이 된 쿠바는 그야말로 생필품 하나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거리에는 굴러다니는 자동차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가의 거의 모든 공장은 기계가 움직이지 않는 속에서 그나마 배급되던 음식이나 생필품의 물량은 턱없이 부족해 안 그래도 길게 늘어섰던 배급 줄은 더욱 길어졌다. 가뜩이나 곤궁했던 국민의 삶은 더 피폐해졌다. 영양실조가 빈번하게 발생해도 쿠바가 그토록 자랑하던 완전 무상 의료 복지도 작동할 수 없었다.
고육지책으로 피델은 국민 앞에 나섰다. 국가의 위기를 자신과 함께 이겨내자고 외쳤다. 국제 사회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 상당히 검소한 삶을 살아오던 피델은 자신이 솔선수범해 덜 먹고, 덜 쓰고, 덜 즐기겠다고 했다. 정부가 소유한 각종 위락 시설을 폐쇄하고, 공무 수행을 위한 자동차도 줄이면서 자신도 아바나 내에서는 무조건 걷겠다고 선언했다.
우리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지만, 쿠바 국민 대부분은 피델의 그 같은 ‘특별시기’ 선언에 열광했고, 그 이전보다 피델에게 더 열정적인 지지를 보냈다. 국제 사회에서는 독재자였지만, 적어도 쿠바 국민에게는-그것이 세뇌든 우상화에 따른 결과물이든- 하느님이고, 아버지요, 옆집 아저씨이며, 형이고, 남동생 같은 존재였는데, 이때의 ‘특별시기’ 선언 연설 후로는 피델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과 지지가 더 강해진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레솔베르(Resolver. 해결하다라는 뜻의 스페인어. 특별시기 때 쿠바잊들의 일조의 구호였고, 특별시기를 극복한 후에는 쿠바의 자존심을 드러내는 단어가 됐다.)”를 외쳤다.
하지만 주문을 외운다고 해서 ‘레솔베르’ 되는 건 아니었나 보다. 쿠바 국민은 극심한 고통 속에 삶을 이어가야 했다. ‘특별시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특별’ 시기는 점점 ‘더특별시기’가 돼 사람들은 힘겹게 했다. ‘특별시기’ 선언 후 3년여가 지났을 때 수도 아바나를 중심으로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쿠바 혁명 이후 사실상 최초의 정부 비판 시위가 대규모로 열린 것이다.
1994년 아바나의 가장 핫한 장소인 말레콘에 모여든 군중들은 ‘좀 더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쳤다. 피델이 쿠바 혁명을 완수한 직후 당시 국민에게 “절대 굶지 않을 것이고, 절대 못 읽지 않을 것이고, 절대 아파서 죽지 않을 것이고, 그게 바로 진정한 자유”라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하는 쿠바인들은 피델을 향해 바로 그 ‘절대 자유’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도어스테핑을 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사진=대통령실
쿠바 정부는 당황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미국이 주도하는 쿠바 경제 제재가 심각한 상황에서도 이런 반정부 시위는 벌어진 적이 없다. 대부분 쿠바인들은 아무리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어도 피델에 대한 무한 신뢰로 그 고통을 견뎌왔고, 또 피델은 그때마다 그 위기를 잘 극복해왔다. 그래서 ‘특별시기’를 선포하고 피델 스스로 고통을 함께 겪고 있었는데, 이렇게 들고 일어날 줄 몰랐다.
당시 아바나 인구가 170만 명 정도였는데, 미국 NBC 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말레콘에 모인 시위 군중이 무려 1만 5000 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바나 인구의 거의 10%가 피델에게 반기를 든 초유의 사태 앞에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시위 군중들 뒤에서부터 심상찮은 웅성거림이 있었고, 어떤 움직임이 시위 군중 뒤에서부터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위 군중 맨 앞에 선 거대한 몸집의 사나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였다. 그가 단 몇 명의 경호원만을 데리고 시위 군중 한복판을 뚫고 맨 앞으로 나와 말레콘 방파제 위에 섰다. 그리고 그는 군중을 향해 외쳤다. “나를 탓하라. 불만이 있는 자는 내게 돌을 던져라. 이 모든 책임을 내가 지겠다.”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시위 군중들은 피델의 이어진 연설을 들었고, 1시간 넘게 이어진 피델의 연설 뒤에 쿠바 혁명 이후 최초의 반정부 시위 군중들은 또 거짓말처럼 해산했다. 피델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 서슬퍼런 쿠바 경찰과 비밀 경찰들의 해산 위협에도 꿈쩍 않고 오히려 더 불어나던 시위 인원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당시 이 모습을 취재하던 스웨덴 일간지 다겐스 뉘헤테르의 한 기자는 자신의 기사에 “내가 본 게 무엇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 쿠바인들에게 피델은 신이었던 것인가?”하고 소회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소통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듯하다. 윤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 사실상 한국 정치사에서 오로지 윤 대통령 혼자만 해왔던 출근길 약식 회견, 즉 도어스테핑이 전격 중단됐다. 역대 대통령 그 누구보다, 아니 한국 현대사의 그 어떤 정치인보다 소통을 강조했던 윤 대통령은 취임 초기 다소 거친 언어 탓에 우리 국민에게는 익숙지 않았던 도어스테핑이 오히려 지지율의 독이 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친여 성향 보수 인사들도 “곧 사고가 난다”며 만류했고, 측근에서도 부작용이 더 크다고 판단해 중단을 요청했지만, 국민을 대신한 기자들을 거의 매일 아침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윤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MBC 전용기 탑승 배제와 잇단 정상 외교에서 국내 언론 취재를 제한한 것, 그리고 급기야 도어스테핑 때 벌어진 MBC 기자와 대통령실 비서관의 낯뜨거운 해프닝이 이어지더니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던’ 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이 재개를 기약할 수 없이 중단됐다.
사실 취임 후 만 6개월이 지난 윤 대통령은 당초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통’에 있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대외적인 것은 물론 대통령실 내부에서도 참모들과 소통이 원활하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 검찰총장 시절이나 대통령 당선인 신분 때 측근 중 일부는 “회의 때 혼자 이야기하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런 윤 대통령이 유일하게 ‘소통’의 모습을 보인 게 도어스테핑이었다. 물론 도어스테핑에 참여하는 대통령실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도어스테핑을 한다고 소통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이야기만 한다”는 식으로 박하게 평가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실 출입기자들은 80% 가량이 도어스테핑이 이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고, 이는 일반 국민들도 절반 이상이 도어스테핑을 긍정 평가했다.
그러니 윤 대통령의 전격적인 도어스테핑 중단은 가뜩이나 어려운 윤 대통령의 언론 환경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아무리 제 일이 아니라고 해도 MBC가 전용기에서 배제된 것이 불편한 속내고, 미국 일본과의l 정상회담에서 언론 취재를 제한한 것 때문에 불만인 상황에서 언론이 윤 대통령을 편하게 볼 가능성은 적다.
문제는 이제 윤 대통령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국민에게 드러낼 것인지다. 대통령실이나 여당인 국민의힘이 스스로 인정하듯 그동안 이룬 성과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후에는 더 어려워질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소통하겠다고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고 용산으로 나왔는데 정작 소통의 창구가 점점 더 적어지고, 약해지고, 좁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의 대표 중 하나인 야당과도 대화를 하지 않고, 국민의 할 권리를 보장하는 언론과도 허심탄회하지 않을 거면 무언가 다른 방법으로 국민과 소통해야 한다.
앞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얘기는 그의 영웅담이 아니다. 세계 대부분이 독재자라고 인정했던 그가 국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한 한 일례를 보여준 것이다. 실제 쿠바 국민 중 거의 대부분은 피델과 직접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심지어 적잖은 사람들은 집에 피델과 함게 찍은 사진이 있다고 얘기한다. 피델은 독재자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국민과의 잦은 접촉, 소통에 열정을 보였다. 그랬기에 1994년 말레콘에서의 반정부 시위가 피델 한 사람의 등장으로 진정된 것이다.
독재자도 하는 것을 윤 대통령이 못할 건 없다. 만약 국회나 언론을 통해 국민과 ‘통’하기를 포기 또는 보류했다면 국민과 직접 소통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윤 대통령이 더 이상 국민과 멀어지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미디어펜=이석원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