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
[미디어펜=김지호 기자]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를 만나러 가는 길은 힘들었다. 북촌 한옥마을 끝자락에 자리 잡은 그의 사무실까지 가기 위해 무더운 날씨에 60도 경사의 언덕을 넘어야했다. 설마 언덕너머에 자산운용사가 자리 잡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방심한 것이 잘못이었다.
여의도 메리츠화재 건물에 자리 잡고 있던 메리츠운용을 그는 지난해 취임하자마자 북촌 한옥마을로 옮겨버렸다. 메리츠화재와 함께 있으면 독립적인 운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메리츠화재가 운용에 간섭을 전혀 하지 않더라도 같은 건물에 있으면 고객에 메리츠화재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인식을 줄 수 있었다.
메리츠운용에 도착하자 인터뷰를 위해 그가 들어왔다. 갈색워커를 신고 티셔츠에 면바지 차림이었다. 수익률 만년 꼴찌였던 운용사를 취임이후 업계 상위 1%로 끌어올린 그가 정말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친근한 모습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IT나 자동차 분야에서는 참 똑똑한데 투자는 그렇지 않아요. 펀드가 너무 많이 나오고 펀드를 빨리 갈아타는 것을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회사에 투자하는 건 좋은 회사와 동업하는 거예요. 주식투자는 굉장히 즐겁고 단순한 일이죠. 그런데도 매일매일 그래프를 보고 5%나 10% 수익이 나면 바로 팔아버립니다. 그래서 제 한국 친구들이 다 편의점에서 알바하거나 치킨집을 차렸을 정도로 한국 사람들은 노후 준비가 안 돼 있어요.”
그의 주장은 명확하고 일관적이다. 자본주의에서 부자가 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주식투자를 통해 자본가가 되는 것이다. 지금 자동차를 구입하고 술을 마시는 돈을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하고 잊어버리고 있으면 그 돈이 앞으로의 노후를 보장해 준다.
주식은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인데 한국 사람들은 카지노와 같이 단기간에 주식을 사고팔고 있다. 그렇다보니 주식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소득공제펀드, 연금펀드 등 세제혜택이 많은 펀드조차 주식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한국에서는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다.
리 대표는 “남들이 주식 안하자고 할 때가 (투자하기) 좋은 시장이다. 그래서 한국은 좋은 시장이다. 기업의 지배구조도 좋아지고 주식시장이 발달할 것이다”며 “다만 미국 주식시장은 연기금 투자 비율이 70~80%에 달할 정도로 꾸준히 자금이 유입된 데 비해 한국시장의 연기금 투자 비율은 5% 정도로 낮다. 정책적으로 주식시장을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이 주식시장의 투자를 늘리도록 하는 것이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정책이라고 믿고 있다. 주식은 기업이 돈을 번 것을 공유하는 것이다. 주식시장에 투자하면 노동자도 자본가가 될 수 있다. 결국 모두가 자본가가 되면 임금협상 등 노사갈등 문제도 자연히 해결된다.
노동력에 의한 임금인상보다 주식투자를 통한 자본의 증식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주식을 하면 망하는 것이 아니고 주식을 안 하면 망한다. 하지만 주식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한국은 국민들은 빚에서 허덕이지만 기업은 돈이 많다. 주식에 투자하는 것은 기업과 함께 하는 길이다.
리 대표는 미국 뉴욕대를 졸업한 뒤 스커더 스티븐스 앤드 클라크(Scudder Stevens and Clark)에서 한국에 투자하는 '더 코리아 펀드(The Korea Fund)'를 운용했다. 이후 라자드자산운용에서 기업지배구조개선 펀드를 운용하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배운 것을 한국에 전수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 고객의 이익을 최우선시하기 위해 펀드수를 대폭 줄였다.
리 대표는 “미국 운용사는 ‘고객 중심’이라는 게 말뿐이 아니고 모든 경영활동에 배어 있다. 고객 중심으로 돌아가려면 펀드 수가 많으면 안 된다. 고객의 이익을 위한 시스템이 돼야 한다”며 “설령 고객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이 상충할 때도 고객의 이익으로 가야 한다. 타협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고 강조했다.
고객의 이익을 우선시 하려면 직원부터 즐거워야 한다는 게 리 대표의 생각이다. 그런데 한국 기업문화는 지나치게 경직돼 있고 사장의 의견이 중시되는 문화를 갖고 있다. 사장이 퇴근하지 않으면 직원도 퇴근하지 못한다. 똑똑한 직원들이 사장 의견에 직원들이 자유롭게 반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그러면 직원은 사장이 시키는 일만 하게 되고 이는 고객에는 최악이다.
그는 한국 회사의 부조리한 면을 배제해 직원이 고객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개선했다. 점수로 업무평가를 하던 것도 없애버렸다. 미국대학이 성적순으로만 학생을 선발하지 않듯 점수로는 직원의 다양성을 볼 수 없어서다. 오히려 사장이 하는 말에 아무런 의견을 내지 못하는 직원을 무능하게 생각한다.
그는 “경직된 문화는 대학을 나온 성인 직원을 어른이 아닌 아이로 취급하는 것이다. 요즘 메리츠운용에서는 내 의견에 반대하는 직원이 너무 많다. 심지어 인턴까지 내 의견에 반대한다”며 “출퇴근 시간과 복장을 자율화 했다. 직원들에 가족하고 시간을 많이 보내라고 했다. 보고서 문화를 없애고 팀장과 본부장 직책도 없앴다”고 설명했다.
또 “미국 회사에 없는 게 한국회사에 있는 게 많다. 미국 금융회사에 기조실은 없다. 기조실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면 마케팅 등 회사의 주요 업무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며 “한국 회사는 무조건 잡아둬야 한다는 생각에 일과 상관없이 야근이 많다. 일이 일찍 끝나도 퇴근을 빨리 못하니 일을 천천히 했다. 그런 것들이 회사 발전의 걸림돌이었다. 지금은 일을 빨리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