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규태 기자] "만약에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라든지, 국제사회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대량학살이라든지, 전쟁법을 중대하게 위반하는 사안이 발생할 때는 인도 지원이나 재정 지원에 머물러 이것만을 고집하기 어려울 수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이것(대만 긴장 고조)은 힘에 의한 현상 변경 시도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대해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대만 문제는 단순히 중국과 대만만의 문제가 아니고 남북한 간의 문제처럼 역내를 넘어서서 전 세계적인 문제로 볼 수밖에 없다." (대만 관련)
지난 19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밝힌 위와 같은 입장에 러시아와 중국이 격앙된 표현을 써가며 반발하고 나서면서, 동북아 구도가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4월 18일 대통령 집무실에서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이 인터뷰를 19일 보도했다. /사진=대통령실 제공
한반도 둘러싼 동북아 지형?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지형은 1953년 6.25 전쟁을 멈추기 위한 정전협정 이후로 줄곧 대륙세력 대 해양세력의 구도로 이어져왔다.
1990년대 초 공산주의진영의 패퇴로 잠시 러시아(구소련)의 약체화와 중국의 변화가 이어졌지만, 국제정치적으로는 동북아에서 지난 70년간 북한·중국·러시아 대 대한민국·일본·미국이 줄곧 대립해 왔다.
단순히 냉전구도로 치부하거나 신냉전구도로 다르게 부르기 애매할 정도로 이 3 대 3 대립구도는 현재의 동북아 지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태평양 건너 멀리 떨어진 미국 입장에서는 미일동맹 및 한미동맹을 통해 제7함대 등 미 태평양함대의 군사력을 동북아에 투사하고 있고, 이를 통해 세력균형·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다.
1953년 6.25 전쟁이 정전된 이후로 연평포격 등 다소간의 무력 충돌은 있었지만, 지난 70년간 국지전이나 대대적인 전면전으로 확대되지 않은 점 자체가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윤 대통령, 상황 가정해 원론적 입장 밝혔지만...
대통령실은 이번 윤 대통령의 인터뷰 발언에 대해 지난 19일 "크렘린궁 대변인의 언급은 가정적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 코멘트하지 않고자 한다"며 "대통령의 로이터통신 인터뷰 내용을 정확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고 당부했다.
특히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우리 정부가 한러 관계를 고려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점과 함께,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라든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대량학살 등의 사안이 발생한다면 우크라이나를 어떻게 지원할지 검토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고 설명하고 나섰다.
특정 상황을 가정해서 원론적 입장을 밝힌 것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 외무부는 이에 대해 "북한을 지원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한국측 설명을 사실상 무시한 격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이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며 "한국 국민이 북한의 수중에 러시아의 최신 무기가 있는 것을 보면 무엇이라 말할지 궁금하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와 관련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20일 기자들을 만나 "한국이 해온 우크라이나 지원 내용에 변화가 없다"며 "한-러 관계를 안정적으로, 동시에 관리해야 한다는 숙제를 균형을 맞춰서 충족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러시아 당국이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한국의 입장에 대해서 코멘트를 한 격이 되는데,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할 것이냐' 하는 것은 향후 러시아의 행동에 달려 있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실은 '한-러 관계 방향이 이제는 러시아측에 달려 있다'면서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은 상황이다.
한편 중국의 경우는 러시아와 다소 다르다. 외신이 물어봤고 윤 대통령이 이에 성심성의껏 답변한 것인데, 공식적으로 반발하고 비난하는 등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다.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0일 "타인의 말 참견을 허용하지 않는다"며 "한국측이 중-한 수교 공동성명의 정신을 제대로 준수하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엄수하며 대만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의 인터뷰 답변을 '말 참견'이라고 비하한 중국 외교부에 대해 이날 한국 외교부는 "심각한 외교 결례"라면서 주한중국대사를 초치하기도 했다. 중국의 고압적인 태도에 저자세로 대응하지 않고 있다.
북한 도발에는 아무 말 않는 중국·러시아
지난 70년간 이어져 온 '평화 유지-힘의 균형' 상태의 동북아는 최근 들어 그 균형이 조금씩 깨지고 있다.
바로 북한의 탄도미사일 및 핵개발 도발 때문이다. 북한 김정은이 윤 대통령 취임 전후로 지금까지 계속 연일 탄도미사일을 쏴올리면서 군사력을 과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의 이 도발은 한국·일본은 물론이고 미 서부 지역까지 가시권에 들 정도로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정작 중국과 러시아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윤 대통령의 인터뷰 답변에서 말 꼬투리를 잡아 시비를 걸고 있는 형국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11월 13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열면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계 없음. /자료사진=대통령실 제공
대한민국은 수교 이후 중국·러시아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을 취해오긴 했다.
한미동맹을 철통과 같이 유지·강화하면서 동시에 중국·러시아와의 경제 협력을 매개로 삼아 상황을 관리해온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윤 대통령의 이번 발언을 한국이 취해온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전통적 외교전략을 탈피하려는 포석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둔 시점에서 외신과의 인터뷰라고 놓고 보면, '대언론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윤 대통령이 국빈 방미를 앞두고 설화를 자초한 것은 있지만, 동북아 균형을 실질적으로 깨는 건 한국 대통령의 코멘트가 아니라 북한의 도발 수위, 이를 묵인하는 중국·러시아의 태도다.
올해 들어 기존 동북아 지형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 아닌 한국 편에 선 적은 없었다.
굳이 중국·러시아의 입장만을 우려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일본과 결합된 자유진영의 한국 국익을 생각할 것인가 숙고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