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이란 단어의 이미지는 좋지 않다. 무한경쟁, 약육강식, 적자생존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경쟁을 뺏고 빼앗기는 과정으로만 인식한 것에서 비롯된다. 자유경제원은 “경쟁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경쟁’의 본질과 그것이 가져오는 효과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자도서 '예술가가 본 경쟁'을 펴냈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이원우 미디어펜 기자, 남정욱 숭실대학교 교수, 윤서인 만화가 등과 함께 원고를 집필한 이문원 미디어워치 편집장은 '한국영화'를 주제로 경쟁문제를 고찰했다. 남기남 감독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한국영화사의 경쟁양상을 조망한 것이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졸속' 영화들이 발붙일 공간은 사라지고 소비자들의 만족도는 올라간다. 이 글은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 스크린쿼터제 등의 보호조치가 과연 한국영화, 나아가 관객들을 위한 것인지를 물으며 '경쟁'의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돕는다. 아래는 이문원 미디어워치 편집장의 원고 전문이다. [편집자주] |
남기남이란 영화감독이 있다. 특이한 이름으로 기억에 오래 남는데, 1972년 데뷔작을 낸 뒤 1970~80년대를 ‘나름’ 주름잡던 감독이다. 그가 걸출한 감독이라서? 아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연보를 보면 아는 영화제목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아니, ‘영구와 땡칠이’처럼 오히려 졸속으로 기억에 오래 남는 영화들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남기남이란 감독을 그토록 명물로 만들어낸 주된 요소였다. 그에 대해 네이버 영화 페이지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대목을 발췌해보겠다.
“대한민국 최고의 ‘빨리찍기 대가’인 남기남 감독은 1989년 심형래 주연의 <영구와 땡칠이>로 270만이라는 흥행신기록을 세운 흥행제조사로 유명하기도 하다. 그는 1년에 영화 9편을 찍기도 했으며, 단 3일 만에 촬영을 끝마치기도 했고, 단 10일 만에 영화 두 편을 찍기도 해, ‘필름을 남기남’이라는 재밌는 일화를 한국영화사에 남기기도 했다. 그야말로 ‘속도전’으로 치자면 대한민국에서 그를 따를 감독이 없다. (중략)
남기남은 90년대 말까지도 <천년환생> (1997)을 내놓는 열의를 보였다. 일반 관객과 비평가들에게는 주목이 대상이 된 적이 없지만 그의 영화가 가진 극단적인 엉성함 때문에 오히려 극소수의 지지자들은 있다. 그래서 일각에선 그를 ‘한국의 에드 우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졸속영화 감독이 어떻게 한국영화산업에서 꾸준히 역할하며 25년여 동안 무려 130여 편의 영화(본인도 정확히 기억 못함)를 찍을 수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가 1990년대 들어 마침내 몰락의 길을 걷고 그 발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된 이유는 또 뭘까. 모두 궁극적으로는 한국영화산업의 ‘진보’와 관련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영화의 ‘경쟁’ 체질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그 과정을 따라가 보자.
‘남기남 전성시대’=‘스크린쿼터 전성시대’ 언급했듯 남기남 감독의 전성시대는 1970~80년대, 정확히는 1980년대 중반까지다. 이 시기 그는 무협영화 ‘사생문’ ‘불타는 정무문’ ‘돌아온 불범’ ‘신정무문’ ‘호림 사대통관’ ‘불타는 소림사’, 코미디영화 ‘열번 찍어도 안 넘어진 사나이’ ‘본전생각’ ‘평양 박치기’ ‘각설이 품바 타령’ ‘철부지’, 액션영화 ‘추적’, 심지어 공포영화까지도 진출해 ‘흑삼귀’ 등을 남겼다.
그중 코미디언 이주일 주연의 ‘평양맨발’은 퀄리티와 관계없이 이주일의 인기도로 서울 10만 관객을 넘어서는 기염까지 토했다. 거의 90편에 가까운 그의 연출작이 이 시기 제작, 공개됐다. 그럼 이 시기는 한국영화계에서 과연 어떤 시기였을까.
간명하다. 바로 ‘스크린쿼터의 전성기’였다. 다들 알다시피, 스크린쿼터(Screen Quota)제는 한국영화 의무상영제를 가리키는 단어다. 외국영화의 지나친 시장 잠식을 막고 자국영화의 시장 확보가도와 자국영화의 보호와 육성을 유도하기 위한 제도다.
▲ 영국영화계에선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내내 이런 스크린쿼터용 졸속영화들이 수없이 등장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부작용이 크게 생겼다. 관객들이 영국영화 자체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잃고 떠나가게 된 것이다. 영국의회는 결국 시행 11년째인 1938년 스크린쿼터를 유명무실한 수준으로까지 내려놓고, 1985년 마침내 개념 자체를 완전폐기하기에 이른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
영국서 처음 실시됐으며 한국에선 박정희 정권 당시인 1967년부터 시행됐다. 당연히 온전한 ‘경쟁’과는 정반대편에 선 개념이다. 한국영화가 외국영화, 주로 미국영화와 홍콩영화 등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확신 아래 등장한 보호조치였으니까. 그런데 이런 식의 극단적 보호조치는 반드시 폐단을 함께 몰고 오게 돼있다. 영국에서 처음 실시될 때부터도 그랬다.
1927년 영국의회가 “영국 내 모든 극장은 영국영화를 무조건 20% 이상 상영해야 한다”는 규정이 삽입된 영화헌장(Cinematograph Act)를 제정하자 영국영화업계는 일대 혼란이 빠졌다. 일단 당시 영국영화 입지 상 그만한 양의 영화를 만들어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스크린쿼터용 졸속영화 즉, Quota Quickie다. 어떤 영화든 새로 걸기만 하면 상영한 지 오래된 영화보다는 관객이 많이 든다는 점에 착안, 극장주들이 서로 돈을 모아 극히 적은 제작비로 빨리 찍을 수 있는 졸속영화들을 제작해 부족한 상영일수를 채우기로 합의한 것이다.
영국영화계에선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내내 이런 스크린쿼터용 졸속영화들이 수없이 등장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부작용이 크게 생겼다. 관객들이 영국영화 자체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잃고 떠나가게 된 것이다. 영국의회는 결국 시행 11년째인 1938년 스크린쿼터를 유명무실한 수준으로까지 내려놓고, 1985년 마침내 개념 자체를 완전폐기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한국에선 좀 상황이 더 극단적이었다. 1966년 2차 영화법 개정으로 영화진흥법 제19조에 의거, ‘영화를 상영하는 공연장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외국영화와의 상영 비율에 따라 국산영화를 상영해야 한다’는 골자의 스크린쿼터제가 도입됐다.
그리고 1967년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처음은 연간 6편 이상의 한국영화 상영과 연간 90일 이상의 상영일수 준수 의무화 수준이었다. 그러다 별 효과가 없는 듯 보이자 1970년 연간 3편 이상, 총 상영일수 30일 이상 의무화로 축소됐지만, 유신 체제 이후인 1973년 연간상영일수 1/3 이상, 즉 121일을 의무화하는 것으로 강화됐다.
그러다 1974년엔 교호상영제, 즉 한 번 외국영화를 튼 다음엔 반드시 한국영화도 한 번 틀어야한다는 조건까지 더 붙었다. 정책이 거꾸로 간 셈이다. 안 그래도 스크린쿼터용 졸속영화가 당연히 등장할 판이었는데,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더 붙었다. 스크린쿼터제와 함께 ‘외화수입권’이란 것이 딸려오게끔 판을 짜놓았다.
국내 영화제작자들에게 한국영화 제작실적에 따라 외화수입권을 주겠다는 정책이었다.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만 해도 한국영화시장의 주류는 외국영화였다. 특히 1970년 후반 이후론 할리우드에서 블록버스터 시스템을 가동해 SF, 판타지 등 거대 제작비가 투여되는 영화들을 대거 제작, 세계 영화팬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이처럼 매력적인 외화수입권을 얻기 위해선 한 번 틀었던 영화를 질질 끌며 장기 상영하는 정도로는 안 되고, 무조건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내야 제작실적을 올려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진정한 의미에서의 스크린쿼터용 졸속영화, Quota Quickie는 한국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됐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최단시간 동안 최저의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졸속영화 전문감독 남기남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남기남의 1차 몰락 - 외화수입자유화 조치
그러나 남기남 감독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기는 짧았다. 일단 1985년 드디어 영화법 제26조, 동법 시행령 제20조의 3에 의해 외화수입자유화 조치가 내려졌다. 영화 몇 편을 제작해야 외화를 수입할 권리를 얻을 수 있던 조건이 삽시간에 무너지고, 순식간에 모든 게 ‘자유’가 돼버린 것이다. 의무상영일수도 기존 165일 이상(1981년 조치)에서 146일로 줄이고 ‘필요 시 20일 단축’이란 추가 조치도 더 내렸다.
스크린쿼터용 졸속영화는 더 이상 예전 그대로 이어질 필요가 없는 환경이 됐다. 남기남 감독의 이후 커리어는 참담했다. 그나마 1980년대 전반에는 그럭저럭 흥행에서 호조를 보인 영화들이 존재하기나마 했지만, 1985년 조치 이후론 달랐다.
1980년대 전반기와 비슷한 방식으로 코미디언들을 기용, ‘작년에 왔던 각설이’ ‘난 이렇게 산다우’ ‘탐정 큐’ ‘따귀 일곱 대’ 등을 제작하고, 액션영화 ‘밤의 요정’, 무협영화 ‘흑룡 통첩장’, 그리고 새롭게 에로영화에도 손을 뻗쳐 ‘합궁’ ‘백치 원앙’ 등까지도 내놓았지만, 작품 편수도 확 줄고, 만들어봤자 제대로 극장을 찾기도 힘들었다.
▲ 006년엔 한국영화가 시장점유율 60%대까지 돌파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를 통해 한국영화산업 전체가 부흥하는 효과를 가져 오자, 극장시설도 대기업에 흡수돼 거대 체인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현 시점 영화 관람은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쾌적하게 즐길 수 있는 여가수단이 돼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
그럼 이 시기에 남기남 식 영화는 무엇으로 대체됐을까. 퀄리티 높은 상업영화들에 차례로 실험되고 발전하면서 졸속영화는 더 이상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됐다. 이규형, 강우석 등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상업영화 신동들이 처음 등장한 게 바로 이 시기다.
이명세, 장선우, 박광수, 박종원 등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린 차세대 대표감독들이 등장했던 것도 이때다. 기존 감독들도 이두용처럼 현대액션물 ‘돌아이’ 등을 제작하며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당연한 관객만족도는 높아졌고, 관객들의 눈높이도 그만큼 올라가 더 이상 졸속영화에 시간과 돈을 빼앗기는 일은 없었다.
남기남의 2차 몰락 - 외국 직배사 국내진출 허용
그러다 또 한 차례 폭풍이 몰려온 게 1987년의 외국 직배사 국내진출 허용 조치다. 이전까진 배급을 겸한 국내 제작사들이 자사 제작영화들과 ‘합’을 맞춰 개봉할 외화들을 찾았다면, 직배사 진출이 시작된 1988년부턴 그야말로 무한경쟁의 시대로 돌입하게 됐다. 남기남은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마지막 불꽃이었던 1989년작 ‘영구와 땡칠이’도 사실상 유통 측면에서의 몸부림이었을 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이른바 ‘남기남 식 졸속영화’는 일반 상업영화관에서 개봉될 수조차 없었다. ‘영구와 땡칠이’의 흥행은 곳곳에 들어서던 각종 문화체육시설에서 상영해 ‘보이지 않던’ 유소년 관객층을 부모동반으로 모아낸 결과에 불과했다.
이후론 그런 호재조차 따르지 않았다. 1989년을 기점으로 서울 시내부터 멀티플렉스 상영관 열풍이 불어 닥쳤기 때문이다. 훨씬 나은 시설과 편의 제공을 들이밀며 등장한 멀티플렉스들 앞에 동네 문화체육 시설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렇게 ‘남기남의 시대’는 끝났다. 이후 남기남의 영화는 극장으로도 제대로 도달하지 못하고 비디오용으로만 떠돌다, 그마저도 1993년 ‘소녀 18세’ 이후론 끝장났다. 더 이상 비디오샵에 도달하지도 못하게 됐다.
그럼 그동안 한국영화 전반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쉽게 말해,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일단 장르 확대 차원부터가 그랬다. 1991~1992년엔 한국에 지금껏 존재하질 않았던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개발돼 ‘나의 사랑, 나의 신부’ ‘결혼 이야기’ ‘미스터 맘마’ 등을 탄생시켰다. ‘장군의 아들’이 협객 액션물을 다시 되살린 것도 이 시기다. 1993년엔 형사 코미디 ‘투캅스’가 등장했고, 1994년엔 국내 최초로 CGI 특수효과를 동원한 ‘구미호’가 공개됐다.
그러다 1998년에 이르러선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카피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퇴마록’이 등장했다. 이듬해, 한국영화의 기존 패턴을 송두리째 바꾼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개봉된다. 1985년 조치 이후부터, 한국영화는 실질적으로 할리우드 영화와 경쟁해 맞서기 위해 진화를 거듭해온 것이다. 그렇게 보호 조치 속에서 썩어만 가던 스크린쿼터 졸속영화의 시대를 접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한 결과가 21세기 한국영화 전성시대까지 닿았다.
부단히 높아진 퀄리티로 관객만족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턴 한국영화 자체에 대한 신뢰도가 급등했다. 그러자 2006년엔 한국영화가 시장점유율 60%대까지 돌파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를 통해 한국영화산업 전체가 부흥하는 효과를 가져 오자, 극장시설도 대기업에 흡수돼 거대 체인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현 시점 영화 관람은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쾌적하게 즐길 수 있는 여가수단이 돼있다.
다시 ‘남기남 전성시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다시 남기남 감독 얘기로 돌아가 보자. 한국영화계가 각종 보호조치 및 규제에 묶여있을 때 승승장구했던 남기남 감독은, 한국영화가 비로소 올바른 경쟁체제로 돌입하자 서서히 자기 자리를 잃고 물러나게 됐다. 반대로 말하자면, 남기남 감독이 몰락할수록 한국영화는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고, 한국영화가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수록 남기남 감독에겐 일거리가 많이 들어왔다.
물론 남기남 감독 본인의 잘못은 아니고 그저 시대의 흐름일 뿐이겠지만, 어찌됐건 남기남 감독과 한국영화 발전사에는 뚜렷한 희비쌍곡선이 존재한다는 점 자체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남기남 감독은 실질적으로 반(反)경쟁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란 점을 말이다. 어찌됐건 해외영화들과의 경쟁을 피하려 몸부림칠 때 남기남 감독과 같은 인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동시에 영화 관람객들은 한국영화 만족도도 급격히 떨어져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편 그 시대가 지나자 남기남 감독은 사라져갔다. 그와 동시에 한국영화 만족도도 높아져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시기에 도달해있다. 아주 단순한 결론이다. 이제 남기남 감독을 그토록 한국영화계에서 ‘필요한 인물’로 만들었던 스크린쿼터제는 그야말로 완전 폐지만이 남은 수순이다.
그리고 해외직배 역시 지금은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 곧 스크린 독과점 등 종종 거론되고 있는 현상들도 그럴 것이다. 물론 그의 전성시대가 다시 돌아오길 기대하는 이들이라면, 얼마든지 다시 스크린쿼터 사수를 주장해도 좋다. 상식적인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가길 선호하는 사람들이란 그 어느 시대에도 존재했던 법이니까. ‘영구와 땡칠이’도 가끔 보면 나름 신기하고 신선하다. /이문원 미디어워치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