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석원 정치부장]‘대통령의 말하기(The president's speech)’라는 게 있다. 원래는 ‘왕의 말하기(The king’s speech)‘에서 비롯된 것인데, 19세기 유럽의 계몽 군주 시대에 시민들 사이에서 시작된 용어다. 정치 지도자나 귀족들 사이에서 시작된 말이 아니고 시민들 사이에서, 더 정확히는 부르주아 계층에서 이런 용어가 횡행했던 것은 일종의 바람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즉 ’왕의 말하기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어떤 정확한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품격이 있어야 하고, 교양이 있어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것을 비롯해 매우 정치적이어야 하고, 외교적이어야 하며, 계몽적이어야 한다 등등이었다.
이를 두고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하고 싶은 말 다 하면 안 되고, 하기 싫다고 말을 안 해도 안 된다. 누구나 금방 알아들을 수 있어도 안 되고, 뭔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어도 안 된다. 왜냐하면 국왕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지도 부동의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국왕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중간, 명확한 것과 불명확한 것 중간, 즉 본인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에서 웅얼거려야 한다”고 말했다. 절대 왕정을 지나 계몽 시대에 들어서서 군주가 해 먹기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1948년 이후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되고 나서 우리는 13명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을 가졌다. 그중 짧게는 8개월 남짓 대통령직을 수행한 사람도 있고, 길게는 18년 동안 권좌를 누린 사람도 있다. 그런 세월을 지나 1987년 이후로는 시민이 직접 자기 손으로 뽑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60개월만 대통령 노릇을 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단 한 번 예외는 있었지만.
‘대통령의 말하기’를 얘기하려다가 얘기가 한참을 돌고 돌았다.
군주제가 아닌 공화국에서 ‘왕의 말하기’를 대신 할 ‘대통령의 말하기’는 과거 계몽주의 시대 유럽 군주들의 말하기와 뭐가 다를까?
시민의 시대, 민주주의의 시대인 지금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말하기는 계몽주의 시대 군주의 말하기보다 더 쉽지 않다. 특히 선거로 선택된 대통령은 늘 시민의 눈치도 살펴야 하고, 지지자들의 말소리는 하나하나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런데 시민이나 지지자의 말은 대통령 본인의 말하기에서 비롯되니 어쩌면 듣기보다 더 신경 써야 하는 게 말하기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에 동반되는 것이 앞서 ‘국왕의 말하기’에서 언급한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언어다.
윤석열 대통령의 말하기는 정치적이지도 않고 외교적이지도 않다. 매우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다. 특정한 행사의 연설을 제외하고 연설문을 작성해주는 비서관이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윤 대통령의 말하기는 거침없고 거칠다. 윤 대통령에게 이끌리는 민심의 상당수가 바로 그 직접 화법, 거칠고 날 것 같은 말하기에서 이유를 찾기도 한다.
아마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윤석열 대통령과 비슷한 어법을 가진 사람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도 정제되지 않고, 가공되지 않으며, 채색되지 않은 원시적인 언어로 말해왔고, 그래서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윤 대통령이나 노 전 대통령이 강건한 지지자가 있는 가운데도 거부감 강한 반대자가 공존하는 이유다. 이는 단지 진영에 의해 나눠지는 것 말고도 인물 자체를 놓고 호불호가 갈리는, 우리 정치 지형에서는 매우 독특한 면을 보여주는 경우라고 본다.
돌아가신 분 얘기는 그만하고, 아무튼 윤 대통령의 전임 문재인 정부를 두고 “과거의 어떤 정권도 ‘이런 짓’을 못 했습니다. 겁이 나서”라고 비난했고, “100년 전 역사로 인해 일본이 사과하기 위해 무릎 꿇어야 한다는 인식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과거사 문제의 역린을 건드리기도 했다.
“의석수로 밀어붙인 법안은 100% 거부권을 행사하겠다. 지지율 1%가 되어도 상관없다”며 의회와 손절도 과감하게 선언했고, 건설노조를 ‘건폭’이라고 부르며 맹비난했으며, 아이들의 수능 문제까지 직접 언급하며 교육 개혁을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윤 대통령의 말하기에 극도의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래도 그의 지지자들은 점점 ‘윤석열 말하기’에 빠져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정치가 오랬동안 ‘가급적이면 건드리지 말아야 할’ 그런 영역이 점점 깨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루소의 말처럼 그때의 국왕이나 지금의 대통령의 말하기에 모두가 동의하지도, 부동의 하지도 않는다면 계몽주의 시대 보다 시민들의 눈치를 더 봐야 하는 지금의 대통령이라면 자기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귀를 향해 더 큰 소리로 소리 지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번 나토정상회의 때 만나는 기시다 일본 총리에게 윤석열 대통령이 제안하고, 그 이야기를 우리국민들에게 해야 한다.(자료사진)/사진=대통령실
이쯤에서 거침없고, 리얼한 윤석열 대통령의 말하기에 제안하는 바가 있다. 바로 가족의 문제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문제다.
최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에 대해 “김 여사(김건희 여사)가 선산을 옮기지 않는 한, 처분하지 않는 한 민주당의 날파리 선동이 끊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원인을 제거하겠다”며 사업 백지화를 선언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사안에서도 그렇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유독 자신의 가족과 관련된 논란에 대해서는 시원하게 얘기하지 않고 있다. 장모 최은순 씨나 부인 김건희 여사에 대한 야당의, 또는 지지하지 않는 시민들의 시비가 끊임없지만 별 말이 없다. 실은 그게 이전 대부분의 대통령들의 태도다. 얘기해도 손해, 얘기하지 않아도 손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석열답지는 않다.
2002년 4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인인 권양자 여사 부친, 즉 자신의 장인이 6.25 당시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인제의 시비에 대해 “그렇게 하면(아내를 버리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서 심판해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저 대통령 후보 그만 두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연설했다. 혹자는 이 연설이 노무현을 대통령의 자리에 올렸다고도 평가한다.
최은순 씨와 김건희 여사의 문제는 좌익 활동도 아니다. 원희룡의 말처럼 이 두 사람의 문제를 민주당은 정권 내내 물고 늘어질 것이다. 그러니 한 번쯤 윤 대통령 본인이 자신의 언어로 시원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길 바란다.
보다 국가적 차원의 문제인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다수의 여론조사에서 보듯 이 문제는 유독 윤 대통령 지지자든 아니든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여론조사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반대 여론은 80% 선이고, 찬성의 목소리는 10% 남짓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상 정부 여당과 전시민이 이 문제를 놓고 대립하는 모양새다. 국제원자력기구가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면 여론이 나아질 줄 알았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로시가 한국까지 와서 얘기하면 민심이 돌아설 줄 알았지만 오히려 민주당 앞에서 당혹해하는 모습만 TV를 통해 봤을 뿐 별 뾰족한 얘기도 없었다.
그러니 윤 대통령이 직접 풀어야 한다. 아마도 12일 리투아니아 나토정상회의에 참석 중 윤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총리가 회담을 할 듯하다. 그 자리에서 기시다는 IAEA 운운하면 윤 대통령에게 좋게 얘기할 것이다. 윤 대통령은 그때 기시다에게 제안을 해야 한다.
“난 우리 국민의 설득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 하겠다. 다만 그러려면 우리 국민에게 뭘가 해줘야 할 얘기가 있다. 오염수가 오염수가 아닌 완벽한 처리수라고 말만 할 게 아니고, 만약 향후 몇 년 안에라도 우리 바다에 방사능 수치가 올라가는 일이 생긴다면 그동안 고집을 꺾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총리가 직접 찾아와 무릎 꿇고 사과하고, 오염수 방류에도 무릎 꿇고 사과한다고. 그럼 난 내 정치 생명을 걸고 우리 국민을 설득하겠다.”
가족 얘기도, 일본 오염수 방류 이야기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윤석열 입장에서 정치적이지도 외교적이지도 않다. 그렇게 얘기하는 대통령은 어느 공화국에도 없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15개 월 여 동안 그 이전과는 다르게 말하는 대통령을 경험하고 있다. 솔직히 그게 아직은 어색하기도 하고 거북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신선하다. 전통적인 정치의 입장에서는 발칙하기도 하다. 하지만 ’건폭‘ 발언이나 전 정부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을 통해서 지지층이 결집하는 모습을 봤다면, 가족과 일본 오염수에 대해 정말 ’세게 말하기‘를 통해 모든 시민들 결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미디어펜=이석원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