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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시대 이끈 이병철‧정주영‧구인회, 대한민국 일으키다

2023-07-18 15:31 | 조우현 기자 | sweetwork@mediapen.com
[미디어펜=조우현 기자]오는 19일 이승만 대통령 서거 58주기를 맞이하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근대화 기틀을 마련한 이 전 대통령의 철학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을 기리는 기념사업회는 활성화된 반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인색한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에 공감한 윤석열 정부 역시 국가보훈처를 통해 이승만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서울 중구 장충동 자유총연맹 광장에서 대형 태극기가 우남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동상 너머로 펄럭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특히 대다수의 국가가 공산주의에 열광할 때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을 대한민국에 정착시킨 이승만 대통령의 선견지명은 오늘 날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와 함께 ‘이승만 시대’에 활동했던 기업가들의 고군분투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전쟁의 폐허로 희망이 사치였던 시절, 한국의 부를 일구는데 앞장선 기업가들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 이승만 대통령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도서 ‘이승만과 기업가 시대’를 집필한 김용삼 건국이념보급회 이사는 “한국을 선진국의 대열에 올려놓은 인물 중 일등공신은 온갖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 온 기업가들과 국가의 진로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이끈 이승만을 지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국민 먹여 살려야 하는데…우선 산업을 일으켜야겠소”

“우리가 이 시점에서 건국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지도자가 되면 우선 국민을 먹여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데 우선 산업을 일으켜야겠소. 산업과 경제에 밝은 인재들을 모아주시오.”

건국을 앞둔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통치를 위한 학습을 시작하며 ‘산업’을 중요한 일 중 하나로 꼽는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1946년부터 1947년까지 국내에서 지명도가 있는 기업가와 지식인들을 빠짐없이 만나 대화를 나누고 조언을 듣는다. 독립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우선순위를 정해 산업재건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했다. 일본이 빠져나가면서 시작된 혼란을 수습해야 했고,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흔들린 경제도 재건해야 했다. 또 북한의 공산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특히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상업과 공업의 활성화가 중요했다. 다만 당시 상업이나 공업은 요즘으로 치면 벤처산업이나 다름없었다. 농업의 경우 오랜 시간 내공을 쌓은 안정된 분야였지만, 상업이나 공업은 기술자 부족, 원료 부족, 동력 부족 등으로 인한 위험부담이 컸던 탓이다.

김용삼 이사는 “이윤만 생각하면 공업이나 상업을 하기 힘든 시대 분위기였음에도 많은 선각자들이 상공업에 뛰어든 것은 오늘로 치면 벤처정신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당시 기업가들이 이윤창출이라는 명제와 함께 애국애족, 산업보국이라는 국가관의 실천에 적극 나섰던 점도 한국 경제의 성장에 근간이 됐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재무부 장관 등을 지낸 고 송인상 효성그룹 고문은 당시 기업가들에 대해 “‘나라가 망하면 기업이고 뭐고 없다. 우리 같은 기업가가 물자를 더 열심히 만들어 국민 생활에 도움을 줘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흔히 박정희 시대에 한국 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그 토대의 씨앗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시작됐다는 이야기에 힘이 실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 귀속재산에서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해방 직후 각광받은 사업은 ‘무역’과 ‘귀속재산’이었다. 귀속재산은 1948년 9월 11일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에 체결된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 제5조’의 규정에 의해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된 8·15 광복 이전에 일본인 소유였던 재산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일본 기업가들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이 국내 기업들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힘이 된 것이다. 당시 귀속재산 취득 대금은 장기분할로 상환할 수 있게 돼 있어, 불하 받는 사람 입장에선 거의 무상이나 다름없이 기업을 인수할 수 있었다.

귀속재산을 통해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 중 하나는 일본의 기린맥주가 영등포에 설립한 소화기린맥주다. 이 회사는 오늘날 ‘두산그룹’이 일어서는 토대가 된다. 

또 국내에 화약을 독점 공급하던 조선유지는 오늘날 ‘한화그룹’을 일구는 원천이 됐다.

수원에 있던 선경직물은 ‘SK그룹’의 출발점이 됐고, 국내맥주기업의 원조인 삿포로비루는 국내 최대 규모의 양조 기업인 ‘하이트진로’로 성장한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영강제과는 오늘 날 굴지의 과자 회사인 ‘해태제과’로 발돋움한다.

다만 귀속기업 모두가 성공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귀속재산을 불하받아 부를 일군 이들도 있지만, 귀속재산 기업이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온 것은 30~50여 개에 불과하다.

실제로 1947년 군정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1944년 6월 9323개였던 전국의 귀속재산 사업체는 1946년 11월에 5247개로 43.7%가 사라졌다. 이 기간 동안 일하던 노무자 수도 59.4%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용삼 이사는 “귀속재산 불하 과정에서 그 기업이 사느냐 죽느냐의 핵심은 관리인의 선정”이라고 강조했다. “기업의 성패 여부는 다른 무엇보다 기업가들의 확고한 기업가 정신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은 호암미술관 앞뜰에 존경의 의미를 담아 맥아더와 이승만 동상,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동판을 세웠다. (위) 호암미술관에 있었던 동상과 동판, (아래) 이후 CJ제일제당 인천제1공장 입구로 옮겨진 동상과 동판. /사진=호암자전, 미디어펜



◇ 이병철·구인회·정주영, 이승만 시대에 탄생한 ‘청년 기업가’

해방직후 우리나라에서 기업 경영 능력을 가진 인물로는 경성방직의 김연수,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이 꼽힌다. 경성방직은 오늘 날 ‘경방’이라는 이름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우리나라 최초 근대 백화점인 화신백화점은 1984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무엇보다 오늘 날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는 삼성과 LG, 현대가 이승만 시대를 이끈 ‘청년 기업가’들의 결실이라는 점도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실제로 6.25 전쟁 이후 자본금 3만 원으로 삼성상회를 설립해 오늘 날의 글로벌 삼성의 토대를 닦은 이병철의 신화는 유명하다. 또 ‘이봐, 해봤어?’라는 정신으로 현대를 일군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은 여전히 화자 되는 명언 중의 하나다. 

LG와 GS그룹의 전신인 락희의 구인회가 6.25전쟁 당시 가진 돈 3억 원을 다 털어 미국에 최신형 플라스틱 사출성형기 두 대를 부산으로 주문한 일화 역시 신화가 됐다. 피난 준비에 여념이 없던 시절 시설투자를 감행한 그의 선택은 적중했다. 당시 구인회가 만든 비눗갑, 세숫대야, 식기류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는 후문이다.

화물트럭업을 통해 오늘 날 한진그룹과 대한항공의 토대를 닦은 조중훈도 이 시대에 활약했던 인물이다. 또 포항제철 신화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산물로 알려져 있지만, 앞서 철강공업육성 5개년 계획을 수립한 건 이승만 정부의 작품이었다. 

국내 최초로 미국에 ‘메이드 인 코리아’ 상표가 찍힌 면포 수출에 성공한 것도 이 시절 삼호방직을 세운 정재호의 결실이다. 다만 삼호방직을 포함한 삼호그룹은 중동 건설 붐이 꺼진 이후인 1984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오늘 날 오리온이 된 동양그룹의 기반을 다진 이양구도 이승만 시대의 기업인 중 한명이다. 그가 별세한 후 동양그룹은 2016년에 해체됐지만, 과자 쪽은 오리온으로 남아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처럼 건국 초기 이승만 대통령과 기업가들은 근대화와 산업화 준비를 통해 대한민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한 국가로 도약시켰다. 해방과 분란의 혼란이라는 정치적 격변을 새로운 기회로 삼은 ‘기업가 정신’ 덕분이다. 
 
‘이승만과 기업가 시대’를 통해 이 같은 내용을 정리한 김용삼 이사는 “정부 정책을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은 기업인들”이라며 “정부가 아무리 훌륭한 정책을 수립해도 이를 실물경제로 연결시켜 이윤을 창출하고, 기업체를 성장시키지 못했다면 우리 경제는 퇴보를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 이승만 경제 정책은?‘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정치나 외교 분야에서나 달인이었지, 경제에는 별 다른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이에 이승만 정부에 몸담았던 인사들은 “그것은 이 대통령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 것”이라며 “그의 경제적 비전은 경제학자들의 원칙론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장점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한국에 정착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회고한다. 고도의 정치적 고찰을 통해 대일, 대미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경제 문제를 풀어갔다는 설명이다.

김용삼 이사 역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이나 미국 정부를 상대로 우리의 국가 의지를 관철시키는 높은 수준의 정치 경제적 안목을 가진 리더였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수립한 것으로 알려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승만 정부 시절 이미 수립돼 있던 것을 장면 정권의 제2공화국이 이어받았고, 박정희 정권 때 본격 추진해 꽃을 피웠다는 평가에 힘이 실린다.

실제로 ‘이승만과 기업가시대’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 말기인 1960년 4월 15일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은 나흘 후 터진 4.19로 인해 물거품이 됐다. 이후 3개년 계획은 5개년 계획으로 수정이 돼 1961년 7월 6일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이승만 정부 시절 수립된 계획이 박정희 시대에 과업을 완수하며 전 세계인을 놀라게 한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물론 산업화의 중심에는 불굴의 도전을 마다하지 않은 기업가들이 있었다. 이는 세계인이 주목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김용삼 이사는 “고통스럽던 부족과 결핍의 시대에도 희망은 있었다”며 “기업가라는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이 대거 나타나 사농공상의 뿌리 깊은 전통가치를 뒤엎고 공상의 주도사회를 개막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기업가들의 활약을 뒷받침한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이 재평가 돼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미디어펜=조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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