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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준의 골프탐험(68)-벼르고 벼린 칼끝은 결국 자신을 찌른다

2015-07-29 09:30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방민준의 골프탐험(68)-벼르고 벼린 칼이 나를 찌르네

K는 비슷한 시기에 회사동료를 따라 골프를 배웠다. 연습량이 동료들에게 그다지 뒤지지 않았는데도 다른 동료들에 비해 발전 속도가 더뎠다. 동료들은 핸디캡을 몇 점 접어주고도 그를 쉽게 이길 수 있었다. K의 지갑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골프 자체를 좋아하는 그였지만 동료들과의 골프게임에서는 늘 치욕을 맛보아야 했다.

이런 K가 독한 마음을 먹었다. 동료들에겐 허리를 다쳐 당분간 골프를 중단하겠다고 통고해 놓고 3개월 동안 남몰래 퇴근 후 연습장을 찾았다. 물론 레슨까지 받으며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다. 3개월이 지나자 K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스윙자세나 타구감 등 모든 것이 만족할 수준에 이르렀다.

K는 회사동료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허리도 다 나았는데 내 돈 먹고 싶지 않아?”
동료들은 ‘얼씨구나, 지갑이 제 발로 걸어서 찾아오는구나!’싶어 흔쾌히 다음 골프약속에 그를 끼어주었다.
‘너희들 한번 혼나봐라. 그 동안의 빚을 한꺼번에 갚아주마. 두 번 다시 치욕은 없다.’
K는 속으로 다짐했다. 연습량도 충분했고 자신도 있었다.

결전의 날 첫 홀 티잉 그라운드에서 K는 적당히 엄살을 피우며 꼬리를 내리는 표정을 지었으나 속으로는 독기를 품고 있었다.
'단칼에 작살을 내버려야지.'
동료들은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자신은 날을 잔뜩 세워 덤비는데 상대방들은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K가 정말 허리를 다쳐 그 동안 골프채를 잡지 않은 것으로 믿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18홀을 끝낸 K는 3개월 전에 맛보았던 쓰라린 치욕을 다시 맛보아야 했다. 대패였다. 작은 실수가 더 큰 실수를 자초하고, 한번 일어난 분노와 복수의 불길은 홀이 지날수록 거세어졌다. 라운드가 끝난 뒤 K는 동료들이 그의 패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데 더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터지려는 분통을 간신히 누르고 동료들이 권하는 술잔을 들었다.

골프장을 나설 때쯤 K의 마음은 어느 정도 진정돼 있었다. 악몽의 골프장을 빠져 나오는 순간 절로 입에서 넋두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세운 칼날에 내가 찔리고 말았구나!’

   
▲ 작심하고 벼린 칼은 자신을 찌르기 십상이다. 자신이 아닌 남을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한 연습의 결과는 언제나 후회로 끝난다./삽화=방민준
세워둔 칼날은 언젠가 이가 빠진다. 세워둔 칼날 위에는 오래 머물 수 없다. 억지로 칼날 위에 오래 머물려 하다간 스스로 다칠 뿐이다. 시퍼렇게 세워둔 칼날보다는 다소 무딘 칼날이 사용하기에는 안전하고 편하다.

지난 주말은 골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라운드를 경험했다. 골프철학 운운하며 칼럼을 쓰고 나름대로 골프에 일가를 이루었다고 자부해온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라운드를 끝내고 나서야 참담한 경험은 모두 내게 그 원인이 있음을 깨달았다.

두어 달 전 후배와 라운드 약속을 했다. 후배는 나를 따라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한두 번 나를 꺾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으나 여전히 나를 넘어야 할 벽으로 생각하는 듯했고 같이 동반할 분은 나와 비슷한 연배로 서로 팽팽한 접전을 벌여온, 언제나 대결의 재미가 쏠쏠한 훌륭한 골프 메이트였다.

약속 날짜 1 주일 전 후배로부터 골프장과 티오프시간을 알려주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그리고 “무서운 분이 참여한답니다. 짱짱하게 붙어봅시다”라는 도전욕을 불태우는 메시지가 붙어있었다.
이 문자메시지를 받는 순간 ‘모처럼 골프다운 골프를 해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전의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후배와 지인의 골프실력도 대단한데 ‘무서운 분’까지 참여한다니 대충 나갔다가는 창피만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날의 라운드는 일종의 ‘대회전’으로 자리 잡았다. 닷새 전부터 동네 연습장으로 달려가 샷을 점검하고 출전 하루 전에는 두 시간 이상 연습했다.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라운드 당일에는 티오프시간 3시간 전에 집을 나와 골프장 근처 연습장에서 등에 땀이 촉촉이 배이도록 칼을 갈았다.

칼은 아주 예리하게 날이 선 듯했다. 무언가 나 자신을 감탄시킬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꽤 명성이 자자한 골프장에 도착해서는 퍼팅 연습도 꽤 했다. 결전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셈이었다.

우리는 모두 반갑게 조우했다. ‘무서운 분’도 한 다리 건너 알 수 있는 분이어서 우리는 모두 스스럼없이 라운드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야릇한 긴장감을 떨어버릴 수 없었다. 옛날에도 잘 쳤지만 5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60고개를 훌쩍 넘은 지금도 녹이 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이런 자세 때문일까. 첫 홀부터 부드러운 샷이 나오지 않았다. ‘미스터 페어웨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정확했던 드라이브샷은 꼬리가 휘었고 세컨드 샷 역시 잡아당기거나 밀리는 것이 나왔다. 설거지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반면 나와 후배를 제외한 두 분은 안정되게 자신의 플레이를 전개했다. 간혹 위기를 맞아도 놀라운 리커버리 샷으로 파 세이브를 하곤 했다.
“선배, 힘내세요. 선배가 흔들리시니 저도 흔들리지 않습니까?” 나를 스승으로 여겨 골프채를 잡은 후배에게서 이런 말도 나올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플레이는 꼬이기만 했다.
오너 몇 번 못해보고 라운드를 끝냈다. 80대 초반은 유지했으나 벼르고 별러 칼을 벼린 것 치고는 참담한 스코어였다. 후배는 나보다 더했다.

작심하고 벼린 칼에 내가 찔린 라운드였음을 실감나게 체험한 하루였다. 자신이 아닌 남을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한 연습의 결과가 어떤가를 절감했다.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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