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몬 삼페드로’는 자기 주도적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1943년 스페인 태생으로 22살에 노르웨이 상선의 정비사로 취직, 전 세계를 누비며 젊음을 구가했다. 불행은 너무도 빠른 25살 때 찾아왔다. 썰물로 물이 빠진 바다로 뛰어내린 삼페드로는 머리를 바닥에 부딪혔고 일곱 번째 목뼈가 부러졌다. 사지가 마비된 채 30년을 사는 동안 존엄사를 꿈꾸며 펜을 입에 물고 무수한 탄원서를 썼다. 그리고 55세 꿈을 이뤘다. 그가 꿈을 이루는 과정은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는 저서로 정리됐다.
삼페드로에게 죽음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온 과거였다. 그래서일까. 죽음과 관련한 그의 고통스러운 통찰은 상상이 아니라 체험에 기반한다. 입으로 펜을 들어 쓴 글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고 때론 스스로 위선과 마주하게 한다. 죽음과 삶의 신탁을 받은 듯한 그는 “당신의 삶은 누구의 것인가” 묻는다. 타자 의존적 삶이 자연스러운 우리의 무지를 자각하게 한다. 죽음에 대한 통찰은 뒤로 하고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그의 교훈은 ‘길잡이 황소’를 통해 조명된다.
도축용 황소와 달리 몸무게가 500~600㎏에 달하는 투우용 황소는 다루기 어렵다. 소음과 열기가 팽배한 투우장에서는 더욱 어렵다. 이럴 때 앞장서 황소들을 투우장으로 인도하는 황소가 ‘길잡이 황소’다. 황소들은 동료이자 리더인 ‘길잡이 황소’를 따라 투우장으로 향한다. 반항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앞에선 황소의 꼬리만 보고 따라간다. 그러곤 거의 예외 없이 죽음을 맞는다. 상황과 현실에 대한 고민 없이 맹목적으로 남의 삶을 뒤따른 참혹한 결과다.
황소들이 들어선 투우장은 이미 열광을 넘어 광란의 소음이 그득하다. 피를 부르는 나팔이 울릴 때쯤, 투우장 한켠에는 죽음을 예비한 황소들이 제어할 수 없는 흥분으로 몸부림치는 중이다. 황소들은 투우장의 화려한 치장과 나팔 소리, 그리고 관객의 환호로 인해 투우장을 축제의 장으로 오인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다. 고통을 외면케 하는 온갖 퍼포먼스가 아편 같은 역할을 한다. 죽음이 코앞에 있지만 과도한 흥분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단지 앞서 자신들을 이끌던 길잡이 황소를 따라왔을 뿐인 황소들은 주도적이지 못한 죽음을 맞는다.
황소의 죽음을 기리는 조사(弔辭)는 없다. 황소의 죽음은 화려한 옷차림의 투우사(matador)를 돋보이게 하는 보조 역할에 불과하다. 리더를 따라 투우장으로 들어선 황소들은 기억되지 않는 죽음을 맞는다. 죽음의 굿판이 끝나고 죽은 황소들은 또 한 번의 희생제로 팔려 간다.
황소의 죽음을 기리는 조사(弔辭)는 없다. 황소의 죽음은 화려한 옷차림의 투우사(matador)를 돋보이게 하는 보조 역할에 불과하다. 리더를 따라 투우장으로 들어선 황소들은 기억되지 않는 죽음을 맞는다.
추석 연휴 동안 입길은 정치 이야기로 범벅이 됐다. 우리네 삶이 정치인데 벗어나긴 불가능하다. “윤석열, 이재명, 영장판사, 정청래, 수박, 용산, 보궐선거, 장관 후보자, 총선, 한동훈, 양평고속도로, 트럼프, 우크라이나, 일본, 오염수, 시진핑 …” 등등. 긴 연휴만큼 소재가 다양했다. 저마다 시시비비를 가린다. 주장이 훌륭하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정치평론가”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다. 입을 열면 결론에 이르기까지 끼어들 틈이 없고 기승전결이 확실하다.
그런데 주장의 근거를 묻노라면 유튜브가 대부분이다. 그것도 자신의 선호하는 콘텐츠만 즐겨보면서 내재화된 남의 논리다. 그러다 보니 논리의 근거가 옹색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다져진 편식이 가져오는 주장의 강도는 드세다. “유튜브에서 봤다”와 “그 분이 그렇다고 말했다”는 말이 유일한 진실의 잣대다.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자각은 거의 없고 ‘듣고 본’ 콘텐츠가 전부다. 판단을 위한 생각과 고려가 배제됐으니 균형감은 무너졌다.
좋아하는 콘텐츠만 따라가다 보면 투우장 같은 플랫폼에 갇히는 불상사가 기다린다. 앞선 황소만 따라가다 보면 자각은 거세되고 자신은 사라진다. ‘막장 정치’가 세상을 혼돈케 할수록 어둠을 헤쳐갈 깨어있는 정신이 필요하다. 선사시대 이래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DNA가 나를 살리고, 나라를 살린다. 길잡이 황소와 결별할 때다.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 겸 주필
[미디어펜=김진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