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석명 연예스포츠팀장] 스포츠가 가진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가 '감동'이다. 땀흘리며 기량을 연마해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치고, 그 과정과 결과를 통해 짜릿한 감동을 전하는 스포츠 본연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박수를 보낸다.
이런 스포츠의 매력이 있기에 영화 등에서 감동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어왔다. 하지만 '각본 없는' 스포츠의 감동을 온전히 전하기는 쉽지 않다. 아무리 멋지게 재현을 하고 상상력을 덧붙이더라도 현장감이 떨어지는 한계를 넘어서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스포츠 영화로는 '록키' 1편과 '불의 전차'의 엔딩 장면 정도만 떠오른다.
최근 끝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모처럼 스포츠가 전하는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안세영이 투혼의 금메달을 따낸 장면이다.
안세영은 세계랭킹 1위답게 최고의 기량을 보여줬다. 단체전에서 에이스로 출전해 한국의 금메달을 이끌어냈던 안세영은 개인 단식에서도 승승장구하며 결승에 올랐다. 결승전 상대는 숙명의 라이벌인 중국의 천위페이였다. 2020 도쿄올림픽 단식 우승자이자 오랜 기간 랭킹 1위를 지켰던 천위페이는 개최국 중국의 여자배드민턴 간판스타였고, 더군다나 대회가 열린 항저우가 고향이었다. 중국 관중들이 일방적으로 천위페이를 응원하는 가운데 안세영은 결승전을 치러야 했다.
안세영은 천위페이를 게임 스코어 2-1(21-18, 17-21, 21-8)로 꺾고 금메달을 따냈다. 단지 금메달을 땄기 때문에 감동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안세영은 첫번째 게임을 치르던 도중 무릎 부상을 당했다. 코트에 쓰러져 고통을 호소했다. 진통 스프레이를 뿌리며 응급처치를 했지만 다리를 절뚝이며 괴로워하는 표정이었다. 격렬하게 코트를 뛰어다녀야 하는 경기를 제대로 치르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안세영은 '투혼'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한 놀라운 장면을 연출했다. 아픈 다리를 끌고 첫 게임을 따냈다. 붕대를 칭칭 감고 나선 두번째 게임은 내줬다. 그래도 꿋꿋했다. 코트에 몸을 던지며 수비를 했고, 일어나 또 달려가 셔틀콕을 넘기고, 찬스가 생기면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었다. 부상 당한 안세영의 투지에 천위페이는 주눅이 들었고, 마지막 세번째 게임은 안세영이 압도한 끝에 승리했다.
금메달을 확정짓는 순간 안세영은 트레이드마크인 포효도 하지 못한 채 코트에 드러누웠다. 그만큼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저절로 감동~, 가슴은 뭉클.
안세영의 금메달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후일담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이날 안세영의 부모가 직접 경기장을 찾아 딸을 응원했다. 안세영이 부상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경기를 계속하자 관중석에 있던 엄마는 "그만해, 기권해도 돼"라고 안타깝게 소리쳤다. 물론 경기에 열중한 안세영은 엄마의 이런 외침을 듣지 못했지만, 그는 경기 후 "어머니의 외침이 들렸어도 기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자랑스런 금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온 안세영은 병원 검진에서 무릎 근처 힘줄이 찢어져 2~5주 재활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런 상태로 얼마나 고통을 참아가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뛰었는지 생각하면 다시 가슴이 아리다.
안세영의 이번 '부상 투혼'은 여자골프 박세리의 1998년 US오픈 당시 '맨발 투혼'과 오버랩된다. IMF로 고통받던 시기 박세리가 전한 감동은 위기 극복과 도전 정신의 아이콘이 됐다. 코로나19 시대를 지나 경제적으로 힘든 요즘, 안세영이 전한 감동 또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었을 것이다.
참 공교롭게도 1998년 박세리는 21세였고, 2023년 안세영도 21세다. 25년 전 박세리에게 그랬듯, 지금의 안세영에게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전한다.
나란히 3관왕에 올라 대한민국선수단 남녀 MVP로 선정된 김우민(왼쪽), 임시현. /사진=대한체육회, 대한양궁협회 SNS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안세영만 감동을 준 것은 아니다. 수영에서 3관왕을 달성하며 황선우(2관왕)와 함께 한국 수영의 미래를 밝힌 김우민, 심장 쫄깃한 승부를 연이어 연출하며 결국 양궁 3관왕에 오른 임시현, 전지희와 짝을 이룬 여자복식 결승에서 북한 조를 꺾고 21년만에 탁구 금메달을 일궈낸 '삐약이' 신유빈도 있다.
남자축구와 야구에서 따낸 금메달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고비를 넘겨가며 각각 대회 3연패와 4연패를 이룬 축구와 야구 대표선수들도 감동에 일정 지분이 있다.
금메달리스트들만 주인공은 아니다. 육상 남자 400m 계주에서 동메달을 따낸 맏형 김국영은 네번째 아시안게임 도전 만에, 후배들과 함께 한국에 37년만의 메달을 안기고 울컥 눈물을 쏟았다. 그 외에도 성적과는 상관없이 각자의 스토리로 감동을 전했던 많은 선수들,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종목에서도 땀의 가치를 보여준 선수들, 이들에게도 진심으로 격려의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다. 국내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며 스타 대접을 받는 선수들이 메달 근처에도 못 가고 실망스런 경기력으로 답답함을 안긴 남녀 배구와 남자 농구 대표팀, 패배 당한 후 라켓을 내리쳐 부수고 상대 선수와 인사도 하지 않아 빈축을 샀던 테니스 선수, 눈앞에 왔던 금메달을 결승선 통과 직전 때이른 세리머니로 날려 허탈감을 안겼던 롤러스케이트 선수 등등. 감동의 현장에 남긴 오점이었다.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 무대에서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이 뛰는 것을 보면, 흔히 접하는 프로 스포츠 종목들과는 또 다른 의미의 감동이 있다. 저절로 '국뽕'이 되고, 함께 울고 웃게 된다.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매일같이 낮부터 밤까지 이어지던 TV중계도 끝났다. 잠시나마 스포츠가 주는 감동에 취했던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혹시,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나 아쉬움이 남는 스포츠 팬들에게는 다음 올림픽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드린다. 코로나19 여파로 아시안게임이 1년 연기되는 바람에 2024년이 바로 올림픽의 해다. 내년 7~8월, 2024 파리 올림픽이 개최된다. 어떤 감동적인 장면들이 또 펼쳐질 것인지...
[미디어펜=석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