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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익을 긍정했던 '조선의 아담 스미스' 박제가

2015-08-09 07:09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7일 마포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예술인이 본 사익, 사익이 예술을 발전시킨다>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공익’은 좋은 것이고 ‘사익’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하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장경제 체제에 전혀 맞지 않는 낭설이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사익추구이며, 사익을 바로 보고 개인의 사익 추구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공익적인 일이다. 예술인들은 사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사익이야말로 예술의 창작 욕구를 자극하는 신성한 힘이라고 생각하는 솔직한 예술인 6명이 뭉쳤다.

발제를 맡은 조우석 문화평론가는 조선을 부자나라로 진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박제가(1750~1805)의 업적을 소개하며 “박제가를 통해 조선이 동반가난을 도그마로 삼는 가난한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21세기인 지금도 열병처럼 번지는 상생, 동반성장, 경제민주화 구호들이야말로 사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500년 전 그때서 멈춰 서있음을 증명해준다”고 일침했다.

조 평론가는 이어 “박제가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사익과 기업이윤을 보는 우리 21세기 평균적 한국인의 인식이 조선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통찰”이라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이념이란 게 한반도 역사에서 얼마나 새롭고 이질적인 혁명이었던가를 새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래 글은 조우석 문화평론가의 '사익을 긍정했던 '조선의 아담 스미스' 박제가 - 왜 21세기 한국인들은 그를 땅에 묻으려 하나' 발제문 전문이다.

   
▲ 조우석 문화평론가
21세기 우리의 삶은 18세기에 빚진 게 많다는 건 인류 공통의 현상이다. 각국에 18세기학회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인데 한국에도 국문학자에서 역사학자까지 두루 참여한 한국18세기학회가 있다. 왜 18세기일까? 대항해 시대(15~18세기)가 포인트다. 전에 없던 문명교류가 발동이 걸린지 200~300년, 무언가 거대한 변화와 축적이 18세기를 전후해 등장했고, 그래서 근대초기(early modern age)라고 말하지 않던가? 근대로 넘어가기 직전의 꿈틀거림이 매혹적인 그때를 무대로 예술에서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기인, 괴짜, 천재 등 창조적 인재들이 속출했다.

예를 들어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함께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창의성이 높은 천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도 그렇다. 18세기 조선사회에 청나라풍의 새로운 글쓰기(小品文)가 유행했던 것이 우연일 리 없다. 그건 옛 문장의 옷을 벗어던진 전혀 새로운 산문 실험이었다. 사서오경의 거룩한(혹은 고루한) 글쓰기를 버린 채 작은 이야기와 감성을 소중하게 다루려했던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이때 이뤄졌다. 이덕무-이옥 등과 <열하일기>의 연암 박지원 등이야말로 문체실험의 간판스타였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래서 조선풍(朝鮮風)으로 대변되는 자의식이 싹텄고, 전에 없던 매니아의 세계가 출현한다. 중인 신분을 넘지 못해 좌절했던 천재 화가, 그래서 고흐처럼 자기 눈을 찔렀던 최북(1712∼1786?)을 포함해 겸재 정선, 혜원 신윤복도 이때 사람이다. 책벌 레(書癡) 등 자칭타칭 바보(癡)의 속출, 콜렉션을 즐기는 오타쿠(癖)의 등장도 우연이 아니다. 전인적 교양과 균형감각을 중시하던 성리학 체계에 균열을 내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들이 속속 출현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일부 담아낸 책 <미쳐야 미친다>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게 벌써 11년 전이다. 스타 국문학자 정민(한양대 교수)이 쓴 그 책은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열정과 광기의 18세기 조선 천재들을 모아 놓았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북학파(北學派)로 대변되는 실학의 바람까지 불었다는 걸 기억해 둬야 한다. 18세기는 요즘 인터넷혁명과 비견되는 지식정보의 혁명이 진행됐다는 것이 정민의 주장이다. (한문고전에 밝은 정민은 감각도 좋지만, 아쉽게도 시야가 우리가 원하는 만큼은 못된다. 나머지는 우리 몫이다.) 거기까지가 내가 아는 것의 전부였는데, 실학자 박제가(1750~1805)의 저술 <북학의>를 새롭게 읽으며 시야가 조금은 더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 미쳐야 미친다-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정민 지음/푸른역사/2004년 04월 03일 출간.
박제가는 무엇보다 조선의 아담 스미스다. 국내의 몇몇 경제학자들이 그의 가치를 알아봤지만, 아직도 전체 모습이 밝혀진 건 아닌데 박제가는 무엇보다 조선조가 그렇게 거세하려했던 사익(私益, 개인의 이익)과 인간 욕망을 긍정했고, 상공업의 가치를 일깨워졌던 장본인이다. 그래서 요즘 말로 뇌섹남이다. 조선시대 저술이란 대부분 성리학적 공리공담인데, 그는 영판 달랐던 이단아라서 20세기 인간에 가까운 까닭이다. 글만해도 그러한데, 아주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미주알 고주알의 리포트로 채워진 책이 <북학의>다. 즉 '잘 나가는 청나라에선 요즘 무엇이?'를 다룬 매우 저널리스틱한 보고서였다. 책을 쓰는 스타일까지 영국의 아담 스미스와 닮았다.

박제가(1750년생)와 아담 스미스(1723년생)는 같은 18세기 사람이라는 것도 우연만은 아닌데, 아담 스미스의 대표작인 <국부론>(1776)은 엄청 어렵다고 하는 지적이 맞지만, 기본적으로 <북학의>처럼 저널리스틱한 보고서다. 이윤추구에 충실한 경제인의 주체적 행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국부의 증진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밝히지만, 실은 신흥 산업도시인 글래스고를 비롯한 산업혁명의 태동 현장을 담아낸 현장 정보로 가득하다.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계기는 필자에게는 단행본 <사익론>(백년동안)과, 이 내용의 기초가 된 자유경제원의 포럼의 계몽적 역할이 컸다.

“시장경제는 국민들의 인식수준과 비례해서 발전하게 된다. 사익(私益)을 나쁜 것으로 보고, 억제해야 할 인간본성으로 취급하게 되면, 시장경제는 더 발전할 수 없다. 사익의 연장선에는 기업의 이윤이 있다. 사익처럼 기업의 이윤 추구 행위는 정당한 것이다. 긍정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조선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익과 기업이윤을 억제하는 정책이 정의롭고 공익을 위한다고 착각한다. 사 회에 열병처럼 번지는 상생, 동반성장, 경제민주화 구호들이 사익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을 반영한다.”

<사익론> 머리말에 나오는 구절인데, 사익과 기업이윤을 보는 우리 인식이 조선시대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 건 정확한 얘기다. 그러고 보니 박제가라는 프리즘을 통해 살펴보니 이유로 농본주의 사회구조에 갇혀 살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괴상했던 뇌 구조가 더 잘 들여다보이고, 여기에 반기를 들었던 돈키호테 박제가의 특징이 확실하게 두드러졌다. 곁들여 얼마 전에 섭렵한 역사학자 임용한(한국역사고전 연구소장)의 훌륭한 단행본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2012년, 역사의 아침 펴냄)도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됐다.

믿어지시는가? 지적대로 조선시대는 최대한 평등하고 가난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붙들려 살았다. 그래서 그 500년 동안 가난이란 떨쳐내야 할 대상이자, 동시에 자신들이 믿었던 인간 본성에 걸맞는 최적(最適)의 상태로 떠받들어졌다. 분명 역설인데, 그 때문에 “조선의 경제사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회주의 적이다.”는 임용한의 지적은 핵심을 찌른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사회가 편안 하고 안정적이 되려면 극소수의 지배층을 제외하고는 90퍼센트 이상의 국민이 평등하게 가난해야 한다”고 굳세게 믿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란 마르크스 등장 이전 일찍이 한반도를 무대로 구현됐던 좌파 집단이었다. 그렇게 봐야 그 시대가 제대로 보인다. 유학의 이상향은 대동사회(大同社 會)로 요약되는데, 그건 무엇보다 차별이 없는 세상이다. 그래야 대도(大道)가 이루어지는 평온한 시대라고 말한다. 구호에 불과했던 그게 현실 속에서 구현됐던 유일무 이한 사례가 조선왕조 500년이었다. 그러나 속으론 멍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임용한의 책 제목대로 인간의 욕망 자체와 사익-기업이익 전체를 송두리째 거세했던 조선이 겉으론 모두가 가난하고 평등했으나, 속으론 허위의식과 위선으로 가득했던 이중성으로 가득했다.

그걸 알기 위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인 이익을 사례로 들어야 한다. 그가 쓴 <성호사설>은 박제가와 정약용을 비롯해 18세기의 젊은 지식인들치고 읽고 나서 감동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이익은 부와 재물의 축적, 그것을 탐하는 마음이란 사회와 백성을 가난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조선조의 사익-욕망 부정론 을 상징하는 그의 가르침에 모두가 머리를 조아렸다. 이익은 그의 책 <성호사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두보의 시에서 이르기를 ‘고귀한 것이 없으면 미천한 것도 슬프지 않고 부유한 자가 없으면 가난한 자도 자족할 것이다’ 라고 했다. 천하가 모두 미천 하고 가난하다면 모든 사람이 부지런하고 검소해질 것이다.”

   
▲ 북학의(시대를 아파한 조선 선비의 청국 기행) 박제가 지음/박정주 옮김/서해문집/2003년 03월 10일 출간.
그 생각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물자가 항상 부족하게 사는 것, 낮춰 사는 평등상태야말로 인간이 가장 부유하고 풍족하게 사는 역설적 방법이라는 깨우침이었다. 고귀하고 부유한 것을 적극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의 하향평준화야말로 실학자 이익이 겨냥 했던 행복에 이르는 황당한 길이었다. 요즘 말로 무소유론인데, 그게 몇몇 종교지도자의 설교가 아닌 국가이념으로 떠받들어지면서 조선조의 비극이 만들어진다.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다. 모두가 그러했다. 18세기 사람이 이렇다면, 그 이전은 어땠을까? 200 년전 뛰어난 학자이자 조정의 요직을 두루 경험했던 율곡의 경우도 가난에 쩔어 살아야 했다.

훗날 시골에 머물던 그를 찾아온 고관대작과 함께 밥상을 받았는데, 고관은 상위에서 숟가락을 댈 곳을 찾지 못했다. 이때 머쓱해진 율곡이 그를 향해 던진 한 마디. “해가 지고 난 뒤 느지막이 먹으면 맛이 있나니….” 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율곡의 청빈과 극기를 칭찬할지 몰라도 그건 이미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었다. 율곡 정도가 하루 세끼를 온전히 못 먹었다면,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다. 박제가의 <북학의>에 그런 대목에 대한 지적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그게 외려 이상한 일인데, 그에 따르면 대 부분의 백성은 아침저녁 먹을거리가 없이 생계를 꾸려갔다. “열 가구가 사는 마을에 서 하루 두 끼를 해결하는 자가 몇 집 되지 않는다”고 그가 보고하고 있을 정도다.

이 글 앞에서 “조선시대에 가난이란 떨쳐 내야할 대상이자, 동시에 자신들이 믿었던 인간 본성에 걸맞는 최적(最適)의 상태로 떠받들어졌다”는 표현은 그냥 해본 게 아니었는데, 위선적인 농본정책에 따른 극빈의 삶이 그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인의(仁 義)가 강물처럼 흐르는 요순의 시대”를 재현한다고 마냥 허장성세였다. 연암 박지원이 <호질>과 <양반전>에서 직업없이 무기력하고 위선에 찬 양반의 행태를 노골적으로 묘사해냈던 것도 그 맥락이다.

급기야 기철학으로 유명한 훗날 19세기 선비 혜강 최한기는 안빈낙도 혹은 염빈(廉 貧)란 전통적 캐치프레이즈를 저주했다. “그건 하등(下等) 인간들의 자기 위안”이라며 자기 제자들에게 상업, 의술, 수공업의 노하우를 익히라고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단재 신채호도 “일찌감치 육경(六經)을 불싸질렀어야 했다”고 외쳤으나 이미 조선이 망국의 험한 꼴을 보이던 무렵이니 때는 늦었다. 단재가 상고사 쪽으로 ‘지적 위안의 망명’을 하고 유교를 폐기한 뒤 아나키즘으로 돌아선 것도 너무도 당연한 노릇이다. 비전이 없는 사회에서 그것만이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18세기 실학자로 조선사회에 만연한 “검약과 극빈이 인간을 춤추게 한다”는 정의를 단칼에 잘랐던 인물, 조선의 아담 스미스로 모자람이 없이 박제가의 유연한 사고방식이 더 돋보인다. 확실히 그는 새로운 사회이념을 창출해낼 가능성이 있었던 위인인데, 그래서 <북학의>에서 지적했다. “검소하다는 것은 물건이 있어도 남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물건이 없다하여 스스로 단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 비수같은 한마디로는 수백 년 가난의 경제학을 통타했다. 드디어 유명한 우물의 비유가 등장한다. 이 비유를 통해 그는 소비가 미덕이며, 소비가 생산을 촉진한다고 주장했다.

“재물은 우물과 같다. 퍼쓸수록 자꾸 가득차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비단을 입지 않으므로 나라 안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다. 기능공이 없으므로 그릇이 삐뚤어 지든 말든 개의치 않으므로 교묘함을 일삼지 않아서 나라에 장인과 가마와 철공소가 없고, 기술도 없어졌다……. 그러니 사농공상 모두가 가난해져서 서로 도울 길이 없다.”<북학의>

경탄스러운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조선조에 이런 파천황의 발언이 튀어나오다니! 그가 걸출한 점은 인간 욕망을 긍정했다는 점이다. 박제가는 많은 사람이 사회의 악이라고 주장하는 사치품 생산도 옹호하는 급진성도 보였다. 그래서 박제가를 경제사상가라기보다는 선각자이며, 계몽사상가라서 <꿀벌의 우화>를 쓴 버나드 맨더빌 (1670~1733)과 닮았다.

16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도시와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검소와 절약이 미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단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중 제일 신랄했던 인물이 버나드 맨더빌이다. 풍자 시인이던 그는 <꿀벌의 우화> 라는 풍자시로 조선과 비슷한 서양 중세의 경제사상을 비난했다.

사치는 가난뱅이 백만 명에게 일자리를 주었고 얄미운 오만은 또 다른 백만 명을 먹여 살렸다 시샘과 헛바람은 산업의 역군이니 그들이 즐기는 멍청한 짓거리인 먹고 쓰고 입는 것에 부리는 변덕은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악덕이지만 시장을 돌아가 하는 바로 그 바퀴였다.

어느 날 지배층이 대오각성해서 사치를 일절 중단하고, 아랫사람에게 빵과 돈을 아낌없이 베풀고,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재워주면 일자리는 사라지고, 실업자는 넘쳐나며, 국가 전체가 가난에 빠질 것이라는 통찰이다. 사치의 가치를 주장하는 이유는 부자의 편에 서서 사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개인발전, 사회발전의 동인으로서 욕망의 역할을 인정하라는 요구다. 그런 그가 풍자한 사회가 우리가 잘 아는 조선시대 사회의 현실과 너무나 닮았는데, 어쩌면 그렇게 리얼한지 모른다.

오만과 사치가 줄어들면서 점차 그들은 바다를 멀리했다. 이제는 상인뿐 아니라 회사들마저도 공장을 몽땅 없애버렸다. 온갖 예술공예품은 잊힌 채 나뒹굴었고 산업발전을 저해하는 원흉인 만족감 때문에 그들은 초라한 곳간을 좋다고 하면서 더는 찾지도 샘내지도 않게 되었다. 《꿀벌의 우화》

“점차 그들은 바다를 멀리했다.” 이 문장에 주목하자. 국제무역을 하려면 바다가 중요하다. 육로로 운송하면 상품의 양은 적고, 시간은 오래 걸려 해상수송보다 비용이 몇 십, 몇 백 배 든다. 해상교역은 고대부터 발달해 신라에는 해상왕 장보고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상선들이 상당히 오고 갔다. 그러나 철저한 쇄국과 무역통제를 실시한 조선은 완벽하게 바다를 버린채 ‘스스로 갇힌 사회’가 된다. 그렇게 놀던 조선반도가 중화권 대륙문명을 벗어나 해양국가로 대변신한 것은 20세기 최대의 기적인데, 모두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극적인 대반전이고, 박제가를 포함한 실학파의 꿈을 이룬 위대한 승리였다.

그런 박제가가 진정 놀라운 점은 잘 나가던 청나라와 이웃 일본을 우습게 보며 소중화(小中華)를 운운하며 몽롱하게 취해 살던 자기기만과 자폐(自閉)의 그 시절에 선진문명(청나라)을 배워야 한다는 자각을 했다는 점이다. 당시는 모두가 ‘오랑케 괴담’에 빠져 청나라를 사람도 나라도 아닌 곳으로 우습게 봤고, ‘왜놈 괴담’에 가려 발전하는 일본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18세기 조선판 개혁-개방의 선구자로 썩 늠름하다. 서자 출신의 아웃사이더 기질 때문에 시야가 좀 달랐던 것일까? 실은 서자가 어디 한두 명일까?

박제가는 자탄을 넘어 전체를 통찰할 줄 알았고, 그래서 부국강병의 방략을 동원해 가난한 나라 조선을 통째로 바꿔 부자나라로 진입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는 수레, 도로에서 종이, 벽돌에 이르는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하고(利用) 삶을 풍요롭게 하자(厚生)는 이용후생학파였다. 윤리도덕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민생을 챙기자고 했던 실학자인 그는 동시에 군대운용에서 시장 경영에 이르기까지 근대 이전 청나라 부국 강병의 모든 것을 배우고 익히자고 제안했던 전략가였다.

자탄을 넘어 전체를 통찰할 줄 알았고, 가난한 나라 조선을 부자나라로 진입시키자는 제안은 지금도 엄청 현대적이다. 그러나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박제가에 대한 주목은 퇴영과 가난을 이념으로 내세웠던 기이한 시대 조선에 그 같은 이단아가 있었다는 점 때문이 아니다. 그를 통해 시장경제의 싹이 보인다고 위로받자는 것도 아니다. 박제가에 대한 주목이 이 누추한 땅 조선에도 그 같은 이단아가 있었다는 자뻑에 그쳐서는 안된다. 실제로 박제가의 꿈을 자생적 근대화의 맹아로 규정하며 자화자찬에 빠지는 이들을 종종 본다. 그게 다시 '우리민족끼리'의 정서로 발전해 민족주의의 늪으로 빠져드는 건 아닐까?

그보다는 박제가라는 거울을 통해 조선조 사회가 가난에 찌든 하향평준화와 경제민주화를 일찌감치 구현했고, 동반성장 아닌 동반가난을 도그마로 삼는 바람에 가난의 땟국물을 일상으로 구현했던 나라였다는 걸 새삼 꿰뚫어볼 필요가 있다. 21세기인 지금도 열병처럼 번지는 상생, 동반성장, 경제민주화 구호들이야말로 사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500년 전 그때서 멈춰 서있음을 증명해준다. 아니 67년 전 대한민국을 새롭게 디자인했던 우남 이승만 등 건국의 지도자들이 내세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무효화한 채 조선왕조의 옛 질서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이다.

그리고 박제가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사익과 기업이윤을 보는 우리 21세기 평균적 한국인의 인식이 조선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통찰이다.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이념이란 게 한반도 역사에서 얼마나 새롭고 이질적인 혁명이었던가를 새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건 거꾸로 말해도 된다. 김일성 전체주의집단의 이른바 인공체제구축이란 한국인 심성에 너무도 딱 들어맞았는데, 실제로 저들은 한반도의 ‘오래된 미래’인 평등한 가난을 한반도 북쪽에 또 다시 재현해냈다.

종북좌파들과 새누리-새민련의 여의도 정치권은 그걸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 남쪽에 다시 구현하고 싶어 지금도 난리 굿판을 벌이는 중이다. 사익과 기업이익을 옹호하고 경제민주화를 막는 노력은 그만큼 곱절로 힘들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새삼 절감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주자학 좌파가 내내 집권했던 조선왕조의 특수 구조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박제가를 새삼 음미해보는 지금 우리 눈앞의 과제란 그만큼 곱절로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아야 한다./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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