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석원 정치부장]비상대책위원회(非常對策委員會). 한자어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일상이 아닌 상황에서 중대한 대책을 만들기 위해서 구성되는 기구다. 일상의 상황도, 상시의 상황도, 또한 정상적인 상황이 아님은 당연하다.
요즘은 대학이나 기업, 개인의 결사체인 단체 등에서도 어렵지 않게 꾸려지는 임시 조직인데, 굳이 따지고 보면 주로 정당 정치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또 하도 정당들이 수시로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킨 탓에 우리 정치사에서도 꽤 오래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은 우리 정치사에서 그리 오랜 역사를 지니지 않은 그야말로 비일상의 상황이다.
비상대책위원회라는 명칭이 등장한 건 요즘 한국 영화 흥행사를 다시 쓰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과도 연관이 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으로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이 당시 최규하 대통령을 겁박해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그것이다. 하지만 엄연히 따지면 그 비상대책위원회는 요즘의 비상대책위원회와는 사뭇 성격이 달랐다.
아무튼 요즘 개념으로의 비상대책위원회라는 조직이 우리 정치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2010년 6월 당시 한나라당 김무성의 비상대책위원회가 처음이다. 정몽준 당 대표체제의 한나라당이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것이 비상대책위원회 역사의 시작이다. 그리고 1년 후 정의화가 국회부의장이면서 비상대책위원회를 이끌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이명박 대통령 집권 말기에 치러진 재보궐 선거에서 서울시장 자리를 무소속 박원순(이후 민주당으로 입당)에게 내주며 당시 홍준표 지도부가 총사퇴했고, 여당의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인 박근혜의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그 후로도 보수 정당에서 주로 비상대책위원회가 종종 꾸려졌는데, 2014년 이완구의 비상대책위원회, 2016년 6월 김희옥의 비상대책위원회에 이어 2016년 박근혜가 탄핵당한 후 재야인사였던 인명진을 위원장으로 한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2017년 그 인명진이 사퇴한 후 정우택이 다시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다시 2018년 홍준표가 당 대표를 맡았다가 지방선거에서 또 패배한 후 김병준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2020년에는 김종인을 위원장으로 한 비상대책위원회가 다시 꾸려졌다.
2년 뒤인 2022년 주호영의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지만, 가처분 인용으로 직무가 정지됐었고, 그 자리를 정진석이 이어받기도 했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난 어제(2023년 12월 26일) 한동훈이 새롭게 국민의힘의 비상대책위원장이 됐다.
그러고 보면 국민의힘(전신인 한나라당 새누리당 미래통합당 포함)은 2010년 이후 불과 13년 동안 14번의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으니, 그 기간 전당대회를 통한 당 대표가 9명(권한대행 제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보수 정당은 당 대표의 역사가 아니라 비상대책위원장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보수 정당에서 전당대회 체제가 무너진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진 배경은 거의 다 직전 선거 참패다. 어떤 유형의 선거든 정상적인 지도 체제가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비상대책위원회라는 비일상의 임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결국 과도기 임시 지도부였고, 그래서 비상대책위원회의 존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2020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가 10개월 동안 유지됐던 것이 제일 길고, 나머지는 길어야 4, 5개월을 넘지 않았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2월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비상대책위원장 임명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그렇게 대한민국 보수 정당, 현재 집권 여당 국민의힘이 14번째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위원장은 2030 남성들에게 제법 인기가 높은, 이제 갓 50대에 들어선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다.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불과 106일 남은 시점에서 한동훈은 집권 여당의 사실상 수장의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동훈의 첫 일성이 심상치 않다. 그는 지난 26일 취임 연설에서 그는 협치가 아닌 대결을 선택했다. 사실상 여당의 대표인데 야당을 향해 대화나 조화를 얘기하지 않았다. ‘개딸 전체주의’니 ‘운동권 특권세력’이니 하는 거친 용어를 사용하며 ‘나라를 망쳤다’고 단정했다. ‘숙주’, ‘군림’, ‘청산’이라는 말을 하며 ‘그들과 싸우겠다’고 했다. 이제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에 들어선 한동훈은, 그러나 ‘정치’가 아닌 ‘선거’를 위한 비대위원장임을 선언한 것이다. 물론 이제부터 대한민국은 ‘정치’가 아닌 ‘선거’, 즉 경쟁의 시간이긴 하다. 그리고 여당의 비대위원장 한동훈은 거기서 분명하게 ‘정치 지도자’가 아닌 ‘쌈장’의 역할을 자청한 것이다.
상황이 ‘정치’의 시간이 아닌 ‘선거’의 시간이니 그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또 하나 편치 않은 모습도 있다. 한동훈은 자신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게 된 이유를 잊고 있거나, 아니면 부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 그의 연설에서 드러난다. 모든 비상대책위원회가 그렇듯 한동훈의 비상대책위원회도 그 정당의 절체절명 위기의 상황, 국민으로부터 철저히 심판받은 최악의 상황에서 출범했는데, 한동훈의 취임 연설을 보면 그는 마치 과거 권위주의 정당에서 대단한 인물이 ‘총재’로 추대된 것 같은 기분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복기하자면, 이번 국민의힘의 비상대책위원회의 출범은 지난 10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의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본인이 사면 복권을 추천했다. 또 윤석열 대통령이 이를 재가했다. 그 사면 복권의 대상 김태우가 자신의 당선 무효로 보궐선거가 치러진 그 자리에 다시 출마했다. 그리고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한동훈은 바로 그 결과물로 탄생한 비상대책위원회의 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착시 현상이 벌어졌다. 당시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즉시 사퇴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지 않았다. 혁신위원회라는 자문기구를 설치하고 당 대표직을 유지했다. 그런데 그 혁신위가 엉망이 됐다. 제대로 혁신도 못 하고 당 지도부와 감정 싸움만 하다가 기간도 못 채우고 좌초했다. 결국 버티지 못한 김기현은 뒤늦게 사퇴했고,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그러니 마치 이번 비상대책위원회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로 인해 출범한 게 아니라 그저 내년 총선을 대비해 출범한 것이라는 착시 현상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동훈은 비대위가 출범하게 된 그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단 한 마디의 사과, 반성도 하지 않았다. 물론 비대위가 꾸려진 잘못이 한동훈에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난파선 지경에 놓인 국민의힘을 내년 총선까지 이끌기 위해서 한동훈은 분노한 국민의 마음을 달래야 했다. 자신에 차서 마치 추대된 ‘총재’마냥 의기양양해 거대 야당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총질을 먼저 할 게 아니었다. 사과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윤석열 대통령도 “국민은 언제나 옳다”며 사실상 사과를 했던 상황 아니던가.
한동훈 비대위가 출범하기 전부터 유독 회자되던 게 2011년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다. 여러 언론과 정치 평론가들은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성공한 비상대책위원회였다고 평가한다. 어쩌면 유일하게 성공한 비상대책위원회였는지도 모른다.
2011년 12월 19일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비대위원장으로 임명된 뒤 수락연설을 하며 집권여당으로서 민생의 어려움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당시 박근혜 비대위 출범의 이유는 그 해 치러진 서울시장을 비롯해 기초단체장과 지방 의원 등의 재보궐 선거 패배였다. 그런데 사실 선거 전체를 놓고 보면 당시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이 참패한 결과라고 볼 수도 없다. 전체 42개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기초단체장 8석, 광역의원 4석, 기초의원 7석 등 모두 19개 선거에서 승리했다. 당시 제1 야당 민주당은 기초단체장 2석, 광역의원 4석, 기초의원 6석으로 겨우 12석을 이겼다. 단순한 결과만 놓고 보면 여당의 승리다. 그런데 문제는 서울시장이었다.
학교 무상 급식 문제로 사퇴해버린 오세훈의 자리에 한나라당 나경원을 누르고 무소속 박원순이 당선된 것이다. 말이 무소속이지 박원순은 당시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 단일 후보로 나섰다. 물론 당선 후 민주당으로 들어갔다. 결국 한나라당은 서울시장 자리 하나를 민주당에 넘겨준 것인데 이를 반성하며 홍준표 대표가 사퇴했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취임했다.
그런데 박근혜의 비상대책위원장 취임사는 이번 한동훈과 사뭇 달랐다. 박근혜는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죄 드린다”며 고개부터 숙였다. 연설 내내 그는 ‘벼랑 끝에 선 절박한 심정’, ‘당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국민으로부터 외면받게 됐는지 참담’, ‘집권 여당으로서 국민의 아픈 곳을 보지 못하고 삶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런데 어제 한동훈의 연설에서 반성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는 건 “상대가 초현실적인 민주당인데 왜 국민의힘이 압도하지 못하는지 반성하자...국민들이 합리적인 비판을 하면 바로 반응하고 바꾸자. 정말 달라지겠다고 약속드리자”는 단 한 줄뿐이었다. 그나마도 당 입장에서의 자성일 뿐 국민에 대한 사과는 아니었다.
이번 국민의힘의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은 단지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에만 이유가 있지는 않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어떤 이유로든 국민의 삶이 척박해지고 민심이 이반된 이유도 크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동훈은 윤석열 정부의 전반기 실정에 일말의 책임도 있다. 그런 것을 다 짊어지고 비대위원장이 됐다. 하지만 한동훈은 국민에게 단 한마디의 사과도, 반성도 하지 않았다.
2011년 박근혜의 통렬한 반성과 뼈를 깎는 대국민 사과만 한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패착했던 것을 뜯어고쳤다. 김종인을 끌어들여 당시로는 좌파 경제론이라고 치부되던 ‘경제 민주화’를 도입했고, 이명박의 4대강 사업에 대한 반성의 일종으로 4대강 사업 반대론자인 중앙대 이상돈 교수를 영입했다. 또 6, 70대 노인들에게만 지지받는 늙은 정당이라는 인식 불식을 위해 당시 27살의 이준석을 당으로 불러 당을 한결 젊게 만들었다.
결국 박근혜의 그런 반성과 새로운 노력이 2012년 기적같은 총선 승리를 가져왔다. 한나라당은 총 152석을 차지해 과반을 차지했다. 그래서 역대 가장 성공한 비상대책위원회로 기억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같은 해 12월 박근혜는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이자 헌정사 첫 여성 대통령이 됐다. 아마도 국민은 2011년 12월 박근혜의 그 통렬한 반성과 사과를 기억했을 것이다.
만약 국민의힘 인요한 혁신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비대위를 꾸려 한동훈을 위원장에 앉혔다면, 아니면 김기현이 인요한의 혁신안을 곧장 받아들여 선거 참패 후 제대로 혁신의 모습을 보인 후 한동훈을 불러 비대위를 구성했더라면, 또는 기왕 이래저래 늦었지만, 한동훈이 당을 이끄는 비대위원장이 아닌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서 총선을 진두지휘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다면 굳이 한동훈이 성격에도 안 맞고, 자존심도 상하는 대국민 사과나 반성의 일갈을 하지 않았다고 아쉽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한동훈의 총선 불출마 선언을 칭찬하기도 한다. 사심이 없음을 피력한 것으로도 본다. 그러나 한동훈은 험지 출마를 선택했어야 더 용감하고, 자기희생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야당이나 일부 언론에서 ‘험지 출마해서 낙선하는 것도 두렵고, 안정적인 지역 출마나 비례대표 출마를 해서 비난받는 것도 두려워서 불출마를 선언했다’거나 ‘비대위원장 취임과 동시에 차기 대선 후보 수락을 한 것’이라는 비아냥을 받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한동훈이 과연 국민의힘을 제대로 혁신하고 쇄신해서 총선 승리를 이끌 수도 있다. 후원금이 쇄도한다든지, 정당 지지율이 술렁인다든지 등등 그런 조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대한민국에서 ‘사과’와 ‘반성’에 가장 인색한 직업이 기자와 검사다. 잘못된 보도나 잘못된 수사에 대해서도 사과를 하지 않는 편이다. 그나마 기자는 언론중재위원회나 법원에서 판결이 나오면 진심이든 아니든 형식적인 사과를 한다. 그러나 검사는 재판에서 잘못된 수사였음이 밝혀졌어도, 심지어는 재심 등으로 판결이 뒤집혔어도 사과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한동훈은 더 이상 검사가 아니다. 그에게 우선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미디어펜=이석원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