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최근 수년째 위협 수위를 높여가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투 코리아'를 천명하고, 전쟁 준비를 지시했다.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그가 선언한 '새로운 길'의 윤곽이 드러난 셈이다. 그동안 남북관계는 늘 롤러코스터를 타듯 했지만, 이번에 김정은이 모든 정책에서 '통일'과 '민족' 개념을 제거하라고 한 것은 파격적이다. 김일성·김정일의 유훈까지 부정한 것이어서 대내외적으로 절박한 노림수가 엿보인다.
김정은은 지난 연말 노동당 전원회의를 기해 남북한을 ‘교전 중인 적대적 관계의 두 국가’로 규정했다. 북한정책에서 ‘통일’과 ‘민족’ 개념을 제거하라면서, 헌법에 대한민국을 ‘제1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명기하도록 지시했다. 특히 김정은은 15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일성의 업적이라고 선전해온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을 철거하고, 남북교류협력의 상징인 경의선 북측 구간을 회복 불가능하게 완전히 단절시키라고 했다.
그런데 조국통일 3대 헌장은 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고려민주연방제 통일 방안 등 김일성 북한 주석이 제시한 통일 원칙을 말하는 것으로, 북한당국은 평양거리 중심에 대형 조형물까지 만들어 기념해왔다. 김일성의 업적으로 기리는 이유는 수많은 남북 간 합의문마다 ‘외세의 간섭없이 자주적으로’를 적시해온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남북 간 합의 때 불문율처럼 여겨지는 것으로, 2018년 판문점선언에도 1조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겨나갈 것이다’ 문구로 반영돼있다. 이런 할아버지의 업적을 폐기처분한 김정은은 그 이유에 대해 “남한의 역대 정부마다 흡수통일, 체제통일을 추구하고 있어 더 이상 통일은 성사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경의선을 완전히 끊어버리라는 김정은의 지시는 1992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 합의서의 3장 18조에서 ‘끊어진 철도와 도로의 연결’ 등을 명시한 것은 미래 남북번영의 상징이었다. 이 밖에 김정은은 북한주민들에게 ‘삼천리 금수강산’ ‘8천만 겨레’와 같은 단어 사용도 금지했는데 이런 단어는 ‘우리민족끼리’ ‘자주통일’과 함께 유엔의 간섭을 반대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기 위한 논리로 북한당국이 줄곧 사용해온 것이다.
북한 노동신문이 15일 전날 미사일총국이 극초음속 기동형 조종 전투부를 장착한 중장거리 고체연료 탄도미사일시험발사를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2024.1.15./사진=뉴스1
이런 점에서 김정은시대 북한은 고려민주연방제 등 통일 방안을 제시하면서 위장 평화통일 공세를 폈던 김일성시대에 비해 여러모로 턱없이 쪼그라들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지금까지 김정은의 발언을 통해 나타난 것은 북한이 더 이상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목표로 하는 외교에 나서지 않고 우방국인 러시아와 중국에 밀착해서 반미연대를 고착화하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북한이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염두에 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다시 협상에 나서기 위해 몸값을 높이는 중이라고 분석했다. 벌써부터 미국 내부에서 ‘트럼프는 북핵을 용인해줄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과 무관치 않다.
그런데 김일성·김정일 유훈까지 저버린 김정은이 대내적으로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김일성이 소위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소련파, 연안파 등을 제거하는 종파사건을 거치면서 독재정권을 수립했고, 김정일도 후계자로 내정되기까지 거쳐야했던 친인척 추방사건을 볼 때 북한에서 독재정권 유지도 만만치 않은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고비없이 수령이 된 김정은이지만 아직까지 재일교포 출신인 어머니 고용희를 드러내서 추모하지 못하고 있다. 딸 김주애를 일찍 공개한 것도 정통성 강화를 위한 것이란 평가가 나오지만 4대 세습에 성공할지 지켜볼 일이다.
지금 극심한 경제난을 겪는 북한이지만 젊은이들은 비혼주의를 지향하고, 김정은이 출산율을 염려할 정도로 자유분방하다. 남한식 말투가 유행해 평양어보호법까지 제정된 북한에서 뜬금없는 ‘투 코리아’ 정책이 통할지 의문이다. 김정은은 15일 갖가지 으름장을 늘어놓은 뒤 “일방적인 전쟁을 결행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아무리 말폭탄에 능숙하고, 기존에 결정한 것을 뒤집는 것이 쉬운 북한이지만 선대가 독재통치의 명분으로 삼던 정책까지 내팽개친 김정은의 속내도 엿보인다.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내치도 힘들기만 한데, 시진핑 주석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존재이고, 푸틴과 밀착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니 '극단'을 유일한 출구로 삼고 있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