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류준현 기자] "고객님의 퇴직연금을 희망하는 (고수익) 상품으로 바꾸시려면 투자성향이 '매우 공격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스마트폰 뱅킹앱에서 본인투자성향과 상품이해도를 (알려드리는대로) 설정하시면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회사가 지급하는 퇴직연금을 확정기여형(DC형)으로 갖추고도 '원금보장' 상품에 묵혀뒀던 기자가 1년여 전쯤 은행 창구를 찾았다. '경제적 자유'를 외치는 요즘, 몇 안 되는 퇴직연금을 불리기 위해 선택한 상품은 고수익을 보장하는 '해외 상장지수펀드(ETF)'였다. 하지만 원하는대로 가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은행의 모바일뱅킹앱으로 본인의 투자성향과 상품이해도 등의 설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은행에서는 ESG경영의 여파인지 '종이서류 작성' 대신, 행원의 도움 하에 '모바일뱅킹 가입'을 유도했다.
수차례 앱에서 공지하는 '고위험'이라는 팝업문구는 '희망하는 상품가입'이라는 목표에 묻혀, 끄고 넘기기에 바빴다. 설문에서 '부적합'이 한 차례 뜨자 투자성향 선택지를 수정하기도 했다. 과잉 친절(?)의 은행원은 "가입이 조금 까다롭죠"라며 멋쩍은 듯 웃으면서도, 해당 상품을 가입할 수 있도록 열심히 코칭해줬다. 도움에 힘입어 가입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은행원은 '자신도 사실 이 상품에 매달 넣고 있다'며 귀뜸해줬다. '좋은 투자였다'는 나의 믿음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돌이켜보면 상품가입 절차는 까다로웠던 것 같다. 한편으로 꼼수(?)만 잘 부린다면 위험도를 막론하고 상품 가입이 수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이 '형식'에 불과한 상품가입 적합도를 검증하는 까닭이다. 상품에 가입하면서 '진지하게 이 상품의 구성을 살펴봤느냐'고 묻는다면 차마 '그렇다'라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누구나 알고 있는 믿을 수 있는 금융 브랜드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해외주식 종목들을 묶어 기획했고, 높은 수익률을 기록해서다. 사실상 '믿고 가입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겠다.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사태가 세간의 화제다. 퇴직연금을 가입하던 당시 상황이 불현듯 떠올랐다. 과거 파생결합펀드(DLF)·라임·디스커버리 등의 펀드사태가 잠잠해진지 채 얼마되지도 않아 은행권에서 이 같은 금융사고가 또 발생했다. 상품설계부터 사기성이 농후해 문제가 많았던 과거의 펀드사태와 달리, 홍콩ELS 사태는 홍콩 H지수에 따라 수익 또는 손실로 이어진다.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다만 상품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은행권과 소비자 간 '불완전판매' 논란은 과거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은행권은 "고객이 '자기책임원칙'에 따라 투자했으니 소비자 책임도 있다" "상품을 판매할 때 주의사항을 모두 고지했다"로 일관하는 반면, '피해자'격인 '소비자'는 "오랜 기간 거래해온 은행을 믿은 결과가 원금손실이다" "팀장이라는 사람이 VIP방으로 이끌어 상품가입을 유도했다" "은행원이 '나라(기업)가 망하지 않는 한 절대 손실날 일이 없다'고 했다" 등의 피해를 호소한다.
상품만 달라졌을 뿐, 양측의 입장은 토시 하나 바뀌지 않았다. 물론 이들 사이에 끼어있는 금융감독원도 급진적 대규모 조사, 배상비율 중재 외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례에 따라 고무줄처럼 움직이는 배상비율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같은 금융사고가 재발되어선 안 된다. 그동안 많은 문제점 분석과 해법들이 나왔다. 특히 금융소비자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은행권에서는 '과거보다 상품 가입과정이 훨씬 까다로워졌다'고 강조한다.
기자는 연이은 불완전판매 논란 원인을 '법·규제의 부재'가 아닌 '개인의 행동양식'에서 찾고자 한다. △빨리빨리 문화 속 원리원칙의 실종 △후진적 금융교육 등이 대표적이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11일 홍콩 ELS 분쟁 조정 기준안에서 기본배상비율 및 공통배상비율을 판매사의 적합성 원칙, 설명의무, 부당권유 금지 등 판매원칙 위반 여부에 따라 23~50%로 정했다. 여기에 판매사 가중치 3~10%, 투자자 요소 ±45%포인트(p), 조정요인 ±10%p 등 가·감산 요소를 반영한다./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과연 은행권과 소비자는 각자의 위치에서 '원리원칙'에 집중했을까. 은행권은 자체 내부통제 방침과 금감원의 가이드라인대로 소비자의 상품 가입을 유도했는지 궁금하다. 은행 단골이나 VIP라면 단순 통장개설이나 예적금 상품가입을 사실상 행원이 대신 해준다는 말을 심심찮게 접한다.
그런가하면 기자의 퇴직연금 가입 사례처럼 고객 요구에 못 이겨 원리원칙을 어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효율성' 내지 '융통성' 문제로 치부하겠지만, 금융소비자보호법 제정 배경을 고려할 때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 아닐까.
아울러 금감원 조사에서도 드러난 일부 KPI 향상을 위한 실적경쟁 사례는 은행만 바라보고 거액의 자금을 신탁(信託)하는 소비자를 기망한 행위다. 고객과의 상담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고객의 투자성향에 맞지 않음에도, 은행권이 신의성실에 따라 행동했는지 되묻고 싶다.
또 DLF 사태 이후 은행권과 금감원이 후속조치로 도입한 은행 비예금상품위원회는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이사회에 단 한 건의 특별사례도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영업부서의 종횡을 견제·감시해야 할 위원회가 홍콩 H지수 급락에도 위험성을 감지하지 못한 점은 자성해야 한다.
반대로 소비자는 상품 가입 당시 서류에 기재된 문구나 위험도를 제대로 숙지했는지 묻고 싶다. 상품에 대한 이해는 소비자의 기본적 의무이다. 미성년자가 아닌 법적 성인이 원금보장형도 아닌 상품에 거액의 자금을 맡기면서 "은행원의 말만 믿고 가입했으니 책임이 없다"고 회피하는 건 다소 부적절하지 않을까.
특히 "H지수가 높아서 이익이 날 때 가만히 있다가 지수가 하락하면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니 이제서야 '불완전판매'라며 모든 은행원을 범죄인 취급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당위성을 가지고 맞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이익은 '나의 영리한 투자관 덕', 손실은 '은행 탓'으로 몰고 가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런 점에서 양측 모두 '빨리빨리 실적쌓기' '빨리빨리 가입하기'에 치중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봤으면 한다. 외국인이 놀란다는 K-은행업무의 진행속도 내지 효율성은 세계 최일류급이지만, 원리원칙을 등한시하는 데서 발생하는 금융사고도 그동안 너무 빈번했다. 은행에서 입출금통장 및 체크카드 개설·수령을 당일 해결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할 것이다.
아울러 이번 사태는 금융교육의 부재가 누적된 결과물이라는 의구심도 생긴다. 최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23년 전 국민 경제이해력 조사'에서 드러났듯 우리 국민의 경제이해력 평균점수는 58점대에 불과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연령대별 평균점수는 20~50대 청장년층이 60대 이상 고령층보다 높았고, 70대가 46.8점으로 가장 낮았다.
특히 금융분야 정답률이 극히 낮았는데, '기준금리의 파급 효과'가 35.3%, '정기예금'이 37.1%에 불과했다. 또 경제교육에 대한 의견조사에서, 경제를 이해하는 정도는 경제를 '모른다'고 답한 국민이 33.1%로 '안다'의 17.1%보다 2배 가량 많았다.
애석하게도 이런 국가에서 '조'단위 피해가 예상되는 홍콩 ELS사태가 터졌다. 일부 피해자들은 "안전한 상품만 판매해야 할 은행이 왜 고위험상품을 판매하느냐"고 비판하지만, 안전한 여·수신 상품을 집중 판매하다 '이자장사'로 호된 질책을 받았던 게 얼마 전 일이다.
낮은 수익률의 정기예금이 있음에도 위험도가 따르는 ELS 상품을 택한 건 피눈물 같은 자금을 맡긴 소비자들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더욱이 금융당국은 은행권의 비이자사업 확대를 유도하기 위해 수년 전 투자·신탁상품 판매를 허용했다. 은행은 곧 '안전'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손실은 무조건 용납할 수 없다' '은행은 안전한 상품만 팔아야 한다'는 집단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금융당국의 은행 선진화 내지 질적성장 바람은 공염불이다.
'원금배상'을 주장하는 소비자와 '최소 20%의 기본배상도 버겁다'는 은행 간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다. 은행들은 곧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앞두고 있어, 쉽사리 선제적 배상에 나설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모두가 이복현 금감원장의 입을 주목하는 가운데, 사고원인에 대한 분석은 다소 소홀해지는 모습이다. 반복되는 불완전판매 논란의 근본적 원인을 되돌아봤으면 한다.
[미디어펜=류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