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총선은 끝났으나 정치권의 복기(復棋)는 진행형이다. 압승한 야권이나 참패한 여권 모두가 민심을 승패의 결정인자로 수렴했다.
100석을 겨우 넘긴 ‘국민의힘’은 민심을 외면한 윤석열 대통령의 불통을 용감히 지적한다. 또 민심을 모른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등 선거 지휘부의 무능을 질타한다. ‘더불어민주당’은 넉넉한 독자 과반의석 확보에 고무돼 민심의 승리를 선언했다. 한 걸음 들어가면 ‘비명횡사’ 공천에도 민심은 자신들의 선택했다는 자위적 평가와 만나게 된다.
정치권의 정언명령으로 자리 잡은 민심(民心)이란 과연 무엇일까? 지금 정치권은 민심을 제대로 읽어내고 있는가? 민심은 불변하는가?
성난 민심에 떠밀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물러났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대통령 참모진도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 의사를 밝혔다. 당장 대통령실 비서실장이 교체되고 내각 역시 대규모 개각이 예상된다. 그야말로 침통한 분위기다.
압승한 민주당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총선 전만 해도 여의도 주변에서는 “이재명 대표가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대표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유시민 작가 역시 방송 토론에서 선거 후 이 대표의 퇴진을 예상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가 압승으로 드러나자 당내 분위기는 “이재명으로 대선까지”로 급변했다. 잔칫집 분위기 속 누구도 반론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양 당의 분위기를 살피면 마치현재 정치지형이 영원불변할 듯하다. 하지만 민심은 단순하지 않다. 직선도 아니고 곡선이거나 심지어 나선형이다. 그러나 진실의 키워드는 곳곳에 심겨 있다. 투표로 말하는 민심은 숫자를 통해 본심을 드러낸다.
지난 4월 10일 지상파 방송3사의 출구조사 결과를 지켜보던 국민의힘 지도부가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사진=김상문기자
민주당이 당심(黨心)이 민심을 꺾었다고 환호작약하는 경기도 ‘수원 정선거구’를 보자. “이대생 성상납”을 시작으로 “수원 화성은 여성 가슴”을 거쳐 “퇴계 이황은 성관계 지존”이르기 까지 논란의 중심에 있던 민주당 김준혁 후보가 당선됐다. 끊임없이 터지는 저급한 과거 언변이 전국 판세를 흔들었다. 민주당 역시 선거레이스 도중임에도 사퇴시켜야 한다는 여론에 고심했으나 김준혁 후보는 역시 전국적 이슈였던 ‘대파 논쟁’의 주인공 국민의힘 이수정 후보를 눌렀다.
승리했다고 김 당선인과 민주당이 면죄부를 받았을까? 민심은 다른 말을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수원 정 선거구의 무효표는 4,696표다. 김 당선인과 2위를 차지한 국민의힘 이수정 후보의 득표 차인 2,377표와 비교하면 무효표가 2배(3.3%)로 급등한다. 이는 다른 지역구 무효표 평균 1,000여 표와 비교하면 4배에 달하는 높은 수치다. 그럼 수원 정 선거구 유권자들이 무지해서 이렇게 많은 무효표가 나온 것일까?
아니다. 수원 정선거구와 접한 단일 행정구역인 수원 갑선거구 무효표는 1,468표로 무효표 비율은 1% 정도에 불과하다. 수원 정선거구 유권자들이 국회의원 선거가 양자 대결로 선택이 제한되자 무효표로 민심을 드러냈다는 해석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정선거구가 포함된 영통구의 경우 조국혁신당의 득표율은 인근 수원시 팔달구, 권선구, 장안구 보다 평균 3%이상 높았다. 이는 비례대표 투표로 조국혁신당을 지지하고 국회의원 투표는 고의적으로 무효표를 양산했다는 분석이다.
'안산 갑선거구'의 경우도 2,308표의 무효표가 쏟아졌다. 전국평균 무효표의 2배로 심각한 이상징후를 나타냈다. 이곳은 ‘자녀 편법대출’로 선거 막판까지 논란을 빚은 민주당 양문석 후보가 당선된 지역이다. 무효표 비율은 2.2%로 수원 정선거구 보다 다소 낮았으나 이는 정선거구와 달리 제3의 후보가 존재한 탓이라는게 지역 민심이다.
민심은 국회의원 당선자 혹은 정치인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치밀하다. 민심은 당선자 숫자는 물론 득표율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고 웅변한다. 읽는 이들이 오독(誤讀)할 뿐이다. 민심은 민주당에 과반의석을 안기면서도 비상식적 공천에 대해 경고장을 보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22대 총선에서 압승한 민주당 지도부와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사진=김상문기자
민심은 참패한 여권에 더욱 무거운 얼굴로 다가선다. 집권이라는 결정적 이니셔티브를 민심을 거스르는데 남용한 공과를 추상같이 묻고 있다. 추동력을 상실한 여권은 침묵의 카오스에 빠진 듯 힘의 진공 사태만 노정하고 있다. 자극에 기계적 반응이라는 데드켓 바운스도 없이 침몰 중이다.
과거 역사는 패했을 때 더욱 역동적이던 정치인에게 기회와 미래를 담보했음을 우리는 체험했다. 대도무문을 갔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상인의 현실감각을 지녔던 김대중 전 대통령 모두 ‘재기 불가’라는 쓰라린 패배를 맛봤다. 하지만 이들은 패배를 자양분으로 승리 방정식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패배의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패배는 인정했으나 ‘미래지향적 어젠다’를 지렛대 삼아 새로운 정치현상을 촉발하는 주체가 됐다. 민심은 과거를 잊는 게 아니라 얽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패배한 정치가 과거를 붙들고 민심과 싸우려 할 때 문은 닫혔다.
윤 대통령은 54자의 짧은 소감을 비서실장을 통해 전하는 것으로 선거 결과에 실망감을 표출했다. 아직 3년 이상의 임기가 남은 대통령이라는 결기와 함께 퇴로를 찾지 못한 느낌이다. 레임덕에 이어 데드덕이 됐다는 세간의 평가에 갇혀 판을 뒤집지 못한다. 스스로 과거에 머물러 패배의식을 내재화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민심은 민심을 배척한 정치에 대해 혹독한 책임을 묻자 대통령 스스로 절망하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 집권당인 국민의힘 역시 무력감에 방향타없는 난파선처럼 표류 중이다.
민심은 야당의 편도, 여당의 편도 아닌 민심이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게 민심이다. 민심을 오해한 이들은 ‘냄비 근성’으로 비아냥거리나 민심은 변해야 할 시간에 정확하고 틀림없이 변화한다. 민심의 변화를 추이나 추세로 읽어내려는 정치공학적 접근이 민심을 저급한 것으로 비하할 뿐이다. 민심은 진심을 읽어내는 이들에게 열려있으며 오판하면 2년 후 지방선거와 3년 후 대선은 누구에게나 악몽이 될 수도 있다.
민심은 불편부당하다. 다만 오만과 독선 그리고 위선을 극히 멀리한다.
민심은 선거를 통해 여권에는 총체적 개혁을 요구했다. 야권에는 개헌선에 미달한 숫자로 합의정치 능력을 시험한다. 민심은 선거 승패를 악(惡)에 맞선 선(善)의 승리로 개념화하지 않는다. 또 누구도 영원불변의 악마로 낙인찍지 않는다.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 겸 주필
[미디어펜=김진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