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한 2국가론을 제기하고 ‘통일 지우기’에 나선 것은 사실 충격적이었다. 정부와 전문가들은 다양한 해석을 쏟아냈지만 남한의 진보 진영대로, 보수 진영대로 저절로 입이 벌어질 만한 일이었다. 그나마 한민족이란 명분으로 이어가던 대화가 완전히 단절될 것이란 암울한 전망, 또 도대체 김정은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통일 유훈마저 저버릴 수 있을지에 대한 의아함 때문이었다.
김정은은 자신의 지시가 헛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김일성의 유훈을 받들어 김정일이 세운 ‘조국통일 3대 헌장탑’을 철거했다.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등 대남기구를 없애는 것은 물론, 북한 전역에서 ‘통일’이란 글자가 들어간 김일성·김정일 교시까지 페인트로 지워댔다. 심지어 평양 지하철 노선도에서 ‘통일역’을 지우는가 하면, 북한 국가 1절 가사에 있는 ‘삼천리’를 ‘이 세상’으로 바꿨다.
황급하고도 신경질적으로 비쳐지는 김정은의 통일 지우기에 숨어 있는 노림수는 ‘핵보유국’인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은 지난해인 2023년 9월 개정한 헌법에 ‘핵보유국’을 명시했다. 북한은 1년 전 이미 핵무력정책을 법제화한 바 있다. 그리고 김정은은 지난해 연말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를 적대적이고 교전 중인 두 국가’로 규정했다. 그리고 북한은 이 시기 러시아와 무기거래로 밀착하기 시작했으며, 중국과 친선을 거듭 다짐하면서도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다.
어쩌면 김정은은 지난 2018년 세차례 남북정상회담 등을 통해 김정일 시대까지 북한이 주장해온 ‘민족의 핵’ 명분이 더 이상 남한에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핵보유국으로서 북한이 나아갈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기회로 삼아 전쟁을 이용한 신냉전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윤석열정부가 한미일 협력을 강화하고 나서자 북한은 북중러 연대를 모색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에 대해 러시아와 전혀 다른 입장일 것이다. 러시아로서는 당장 북한의 무기 지원이 필요하니까 북한에 위성 기술을 적절하게 지원하고, 정치적인 ‘립서비스’도 하고 있지만, 중국은 핵을 보유한 북한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이는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였던 태영호 전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김정은 집권 초기 중국이 김정은에게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한반도 비핵화를 존중하라고 압박한 적이 있다”고 밝힌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남한을 타격권으로 한 600㎜ 초대형 방사포 위력시위사격을 현지지도 했다고 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31일 보도했다. 2024.5.31./사진=뉴스1
태 전 의원은 15일 사단법인 플라자프로젝트가 개최한 ‘한국의 안보 상황과 북한 핵위협’ 세미나에서 “중국은 김정은이 집권한 직후인 2012~2013년 북한 핵보유를 막기 위해 최대한 압박했다”며 “하지만 북한은 ‘공산당에 큰 당과 작은 당은 있어도 높은 당과 낮은 당은 없다. 청나라도 이조왕실에 법을 바꾸라 한 적이 없다’는 말로 완강히 거부했다”고 전했다. 그는 “북한이 핵보유국을 선언한 이후 북중 간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했으니 사실상 중국도 북한의 핵보유를 묵인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를 볼 때 중국도 지금 김정은의 핵보유 의지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한의 핵보유를 중국도 반대하지만, 북한 역시 미국뿐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안전 확보를 위해 핵을 보유하려 한다는 것이 전문가 일각의 견해이다. 한설 예비역 육군준장은 “김정은이 집권 직후 고모부 장성택과 이복형 김정남을 처형하고 사살한 것은 중국이 이들의 배후였기 때문”이라며 “북한 입장에서 미국과는 평화협정을 통해서 안보를 확보할 수 있지만 중국은 그렇지도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김정은은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공개적으로 핵보유국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고, 마침 한미일 협력 강화에 나선 남한을 주적으로 돌려 남한 때문에 핵을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김정일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의 핵개발은 미국 때문이었지만 졸지에 북핵은 교전 중인 적대국가 남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둔갑했다. 북한은 경의선·동해선 육로 도로에 지뢰를 매설하고, 가로등을 철거하더니 최근 휴전선에 장벽을 세우고 북한 내부를 잇는 자체 전술도로를 건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고려연방제’와 ‘정치합작’ 등을 주장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중요 목표로 삼았던 것을 생각할 때 김정은의 통일 지우기가 어떤 결론을 만들어낼지 주목된다. 김정은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과 처음 마주앉았던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이끌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집권 13년차인 김정은의 2국가론은 과거 동독의 ‘2국가 2민족’ 주장과 비교되고 있다.
최근 국내 북한 전문가이자 관료 출신 인사로부터 전해들은 김정일의 통치술 얘기는 흥미로웠다. 김정일은 삼촌 김영주와 승계투쟁을 거치면서 나름의 정치력을 갖추었던 것 같다. ‘은둔의 지도자’로 평가받지만 김정일의 언변은 뛰어났다고 한다.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서 통치를 음악, 영화 등 예술과 접목시켜 독재를 유지한 점은 비상했다. 이 전문가는 김정은에 대해선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친다고 평가했다. 김정은의 자신감은 핵보유에서 기인한 것이다. 우리가 북한의 2국가론에 안이하게 대처해선 안될 이유이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