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원우 기자] 한국 주식시장의 진정한 ‘밸류업’을 위해서는 상법 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다. 상법 제382조3항이 규정하고 있는 기업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까지 확대하자는 주장이 핵심이다. 많은 개인투자자(개미)들이 찬성하고 있는 개정 방향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재계의 우려는 이해가 된다. 상법 개정안이 위 내용대로 통과할 경우 배임죄 처벌이나 소송이 남발되면서 기업 경영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반론이다. 나라 경제든 주식시장이든 중심엔 기업이 있고, 기업이 신나게 경영할 수 있어야 만사가 형통하다는 것만큼은 언제나 진실이다. 문제는 그 방법론에 있겠다.
한국의 문제는 경영활동을 하는 기업인이나 그 기업인이 만든 회사에 투자하는 주주가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대신 어떻게 하면 서로의 돈을 가져올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주식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투자로 돈을 벌었다는 표현이 돈을 ‘땄다’는 말과 혼용된다. 새로운 부가 창출되기보다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기존의 부를 어떻게 제 것으로 가져올 수 있을지의 제로섬 게임이 투자라는 그럴 듯한 단어 안에 숨겨져 있다.
지난 달 데스크칼럼을 쓴 이후 한 달 사이 또 다른 배반의 목록이 추가돼 있음을 본다. 엠에스오토텍의 사례를 보자. 일각에선 ‘테슬라 테마주’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들의 자산가치만큼 실적을 올리는 저력의 코스닥 저평가 기업 중 하나다.
이들은 최근 최대주주이자 사실상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심원과의 합병을 추진한다고 알렸다. 문제는 그 방식이다. 엠에스오토텍의 합병가액은 주당 4360원으로 설정됐다. 그런데 만약 자산가치를 기준으로 합병가액을 계산했다면 주당 6314원이 나온다.
엠에스오토텍은 심원의 기존 주주들에게 1주당 71.2543주를 신주로 발행해 지급할 예정이다. 엠에스오토텍의 가치가 낮을수록 심원 주주들이 많은 주식을 받는 셈이다. 그런데 심원은 MS그룹 창업주 이양섭 회장의 아들 이태규 이사와 친인척들이 100% 지분을 보유한 가족회사다. 소액주주들은 엠에스오토텍의 주가가 그동안 왜 오르지 못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다음은 하나기술이다. 2차전지 장비주로 역시 좋은 회사로 알려져 있었다. 작년 6월27일 하나기술은 1724억짜리 수주계약을 따냈다며 공시를 냈다. 발주처는 아시아의 어느 2차전지 업체인데 사명은 밝히지 않았다. 다만 2022년 연매출의 1.5배에 해당하는 큰 계약이었으니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중국의 초대형 배터리 업체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조성됐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드들은 목표주가를 올려 잡느라 바빴다. 주가는 급등했고, 마치 정해진 순서처럼 한국 주식시장의 고질적 병폐인 전환사채(CB)들이 줄줄이 전환됐다. 그럼에도 계약만큼은 진짜일 거라고 주주들은 믿었다. 하지만 그 이후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결국 지난 20일 계약취소 공시가 나왔다. 뒤늦게 알려진 계약 대상은 아무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중국의 어느 회사였다.
주식시장에서 오래 머무른 어느 ‘고수’는 말한다. 한국 기업을 믿지 말라. 대주주도 믿지 말라. 그뿐인가? 그는 공시도 믿지 말라고 말한다. 대신 오로지 돈의 흐름을 믿으라는 게 그의 조언(?)이다. 공시도 못 믿는데 투자는 왜 하나? 실제로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는 주주들이 늘어났고, 그 결과가 미국 주식에 대한 압도적인 선호다.
미국 주식시장에도 사기는 있다. 상‧하한가가 없는 미국 작전주는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하게 움직인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미국을 선호하는 건 위법 행위가 적발됐을 때 처절한 응징이 기다리고 있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를 만들어낸 젠슨 황조차 자기가 가진 주식을 팔기 위해서는 몇 달 전부터 구체적으로 계획을 공시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가 계획을 그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제아무리 젠슨 황이라 해도 쇠고랑을 찰 것이며 또 그래야 한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다. 그래서 미국 주식시장에선 유상증자나 자사주 매도가 늘 악재는 아니며, 심지어 때로는 매수 사인이 되기도 한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 기업인들은 말한다.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신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업을 아무리 열심히 키운들 각종 규제와 상속세 폭탄이 두렵다는 그들의 주장에도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결국 상법개정안이나 밸류업, 금융투자소득세 같은 건 어차피 개별 사안에 불과할지 모른다. ‘신뢰 회복’이라는 궁극적 비전이 가장 먼저 시장에 공유될 필요가 있다. 대통령도 금융감독원장도 검사 출신인데, 많이 힘든 일일까?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