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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대한민국의 국부가 될 수 없다

2015-09-17 12:01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김구 선생을 존경하는 지식인이나 정치인들 가운데는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기여한 ‘건국의 아버지’ 또는 ‘국부(國父)’라고 칭송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7권으로 된 『이승만과 김구』라는 역저를 출간한 손세일 선생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손 선생은 16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그의 저서 출간 홍보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국민국가를 창건한 정치지도자입니다. 김구는 ‘국부는 이승만 박사 한 사람뿐’이라고 겸양의 말을 했지만, 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민국을 만든 국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구 선생을 칭송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칭송하더라도 올바로 칭송해야 한다. 어떤 인물을 칭송함에 있어서 그의 행적과 일치하지 않게 칭송하는 것은 올바른 칭송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공자를 ‘불교의 비조’라고 칭송한다거나, 석가모니를 ‘중국의 장군’이라고 칭송한다거나, 예수를 ‘회교의 창시자’라고 칭송하는 것은 올바른 칭송이 아니다.

김구 선생을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나 ‘국부’라고 칭송하는 것은 앞에 열거한 사례들과 비등한 극히 올바르지 못한 칭송이다. 김구 선생을 대한민국의 국부라고 칭송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칭송이라는 점은 대한민국 건국에 관한 그의 행적을 알게 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김구 선생은 1947년 12월 중순까지는 이승만 박사의 대한민국 건국노력에 대해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가 12월 22일 돌연 “우리는 여하한 경우에든지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할 것이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박사의 대한민국 건국노선을 비판하는 세력은 그것을 ‘단독정부 수립노선’이라는 부정적 명칭으로 호칭했으므로, 김구 선생의 이런 성명은 곧 이 박사의 대한민국 건국노선에 대한 반대성명이다.

김구 선생이 이처럼 이 박사의 대한민국 건국노력에 대해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게 된 데는 제한된 지면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다. 이 박사에게 등을 돌린 김구 선생은 북한의 김일성이 설치해놓은 남북협상이라는 거미줄에 걸려들었다. 김구 선생은 1948년 1월 26일 유엔위원단을 면담하고 난 후 “미․소 양군이 철퇴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재 상태로서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으므로 양군이 철퇴한 후 남북요인회담을 하여 선거준비를 한 후에 총선거를 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남북요인회담은 남북협상을 의미한다.

   
▲ 박원순 서울시장과 서울시는 정부 주관의 광복 70주년 행사와 맞물려 박원순 시장의 정치성향으로 광복 70년 행사를 진행했다. 서울시는 광복 70년을 기념한다면서 서울시청 외벽에 ‘1948년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던 김구 선생을 전면으로 내세웠다./사진=미디어펜
김구 선생은 이처럼 이 박사의 건국노선에 반대하고 남북협상노선에 끌려들어가는 결정을 함에 있어서 자기가 이끌고 있는 한독당 내에서 공식적인 토론을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그렇게 했다. 한독당은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에 동조하는 성명을 발표하기 전 날 “소련 측이 [유엔위원단의] 북조선 입경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부득이 유엔감시 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라고 천명한 사실이 그것을 입증해준다.

김구 선생이 이처럼 대한민국 건국노선에서 이탈하여 남북협상 쪽으로 돌아서자 이 박사는 김구 선생을 끌어안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박사는 김구 선생과 몇 차례 회담을 가지면서 공산세력에 이용당하는 남북협상 추진을 그만두고 대한민국 건국 사업에 함께 노력하자고 호소했다. 심지어는 자기도 남북협상에 참여할 터이니 남북협상이 실패하면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함께 일하자고까지 호소했다. 김구 선생은 이 박사가 남북협상에 참여하는 것은 북한공산세력이 반대할 것이라면서 이 박사의 호소를 외면했다.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함께 일하자고 붙잡는 이 박사의 손을 뿌리친 김구 선생은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제목의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대한민국 건국세력에게 뼈아픈 타격을 가했다. 그 성명서의 주요 부분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미군주둔연장을 자기네의 생명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몰각한 도배들은 국가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없이 통일정부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조출하여서 단선 단정의 노선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유엔위원단을 미혹하게 하기에 전심력을 경주하고 있다.…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이북에 가고 싶다.”

   
▲ 백범 김구 선생의 66주기 추모식을 하루 앞둔 25일 서울 중구 남산공원에 설치된 김구 선생 동상./사진=연합뉴스
이 박사를 비롯한 대한민국 건국 세력을 ‘무지몰각한 도배’요 ‘박테리아’라고 매도한 이 감상적 성명은 내용이 잘못된 것임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그것이 발표된 시기마저도 매우 부적절했다.

내용 면에서 볼 때, 그 성명은 당시의 정세에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통일지상주의를 표방한 것이다. 당시의 한반도 정세는 북한을 공산화해놓은 소련군과 북한 공산세력이 남한 좌익세력과 협력하여 남한까지 공산화하여 통일하려 하고 있었으며, 그런 상황에서 공산화통일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남한에 조속이 정부를 수립하여 공산화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한 정부를 조속히 수립하려는 이 박사의 노력을 ‘통일을 두려워하는 것’이요 ‘일신의 안일을 위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통일지상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민족통일이라면 공산화통일이라도 좋다’는 결론으로 연결될 수 있는 위험한 짓이었다.

시기 면에서 볼 때도 그 성명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남한의 좌익세력은 2월 7일부터 남한선거 반대를 위해 소위 ‘2․7구국투쟁’을 시작했는데, 김구 선생은 좌익의 폭력적 투쟁이 한창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 성명을 발표하여 김구 선생이 마치 좌익의 2.7구국투쟁을 성원하는 꼴이 되었다. 이 2․7 구국투쟁은 좌익들의 무장 빨치산 투쟁으로 연결되었고, 그런 현상이 가장 큰 규모로 나타난 것이 제주도에서 발생한 4․3폭동이다.

1948년 2월 26일 유엔소총회가 소련의 반대로 북한에서의 선거가 불가능하므로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라고 결의하자, 김구 선생은 ‘나는 남조선 선거에 불참할 것이며, 남조선 선거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구 선생의 입장은 ‘나는 남조선 선거에는 불참하겠으나 남조선 선거는 반대하지 않겠다’는 김규식 박사의 입장보다 더욱 강경한 것이었다. 남한 선거에 반대하는 김구 선생의 입장이 중간파를 넘어서 좌익의 입장과 유사해졌음을 시사한다.

1948년 3월에 접어들면서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건국세력은 좌익세력과 격렬하게 싸우면서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남한에서의 선거를 준비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바로 그 시점에 김구 선생은 좌익과 공동보조를 취하여 남한선거를 저지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남북협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을 거쳐 김구 선생은 마침내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협상회의에 참석했다. 평양의 남북협상회의 진행일정과 의제 등은 김일성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었으며, 그와 관련하여 김구 선생은 아무런 사전협의도 요청 받지 않았다.

   
▲ 지난 4일 재개관식이 열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백범 김구 선생 집무실./사진=연합뉴스
김구 선생이 참여한 남북협상회의는 남북한의 모든 유력한 정당과 사회단체의 대표들이 참여한 회의가 아니라, 남한선거를 반대하는 남북한의 정당과 사회단체의 대표들만 참여한 회의였다. 다시 말해서 남한선거에 반대하는 남북한의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만이 참여한 회의였다. 그 회의에서는 남북한 정당·사회단체 대표들 간에 아무런 협상도 진행되지 않았다. 회의는 오로지 북한 공산세력이 사전에 만들어 놓은 각본대로 진행되었으며, 그들이 만들어놓은 각종 문서들을 채택했다.

그 회의에서 채택된 문서들은 해방 후 북한에서 행해진 일들은 모두 찬양하고 남한에서 행해진 일들은 모두 비판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실시될 5․10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남북한의 공산세력과 남한의 친공 중도파 및 김구 선생 추종세력들이 공동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그 문서들의 내용은 남한의 선거를 저지하고 남한에서도 북한에서 행해진 일들이 행해지도록 결의한 것,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공산화통일을 간접적인 표현법으로 결의한 것과 다름없다.

그러한 남북협상회의의 결과를 보면 김구 선생의 남북협상참여는 김일성의 공산세력 주도 남북통일노선을 본의 아니게 지원해주는 꼴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통일지상주의를 표방하는 감상적 민족주의자들은 공산당의 통일전선전술에 걸려들면 본의와는 상관없이 공산화통일을 도와주는 협력자로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김구 선생은 이처럼 남한 좌익세력 및 북한 공산정권과 연대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는 투쟁을 전개한 것에 멈추지 않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에도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48년 8월 15일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데 대해 김구 선생은 ‘오직 비통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뒤이어 김구 선생은 김규식 박사를 수석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총회에 파견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봉쇄하려고 시도했다(그 시도는 김규식 박사가 파리 여행을 회피함으로써 미수에 그쳤다).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한 김구 선생의 행적에 비추어 볼 때, 김구 선생을 대한민국의 국부라고 칭송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칭송이다. 그러한 칭송은 임신한 여인이 유산하도록 배를 차는 등의 폭행을 가했던 사람을 아기의 아버지처럼 아기를 사랑한 사람이라고 칭송하는 것과 같다. 그러한 올바르지 않은 칭송은 대한민국과 김구 선생을 다 같이 욕되게 하는 짓이다.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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