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류준현 기자]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취임 후 은행장과 가진 첫 상견례 자리에서 은행권의 '고수익'을 언급하며 '이자장사' 행보를 비판하고 나섰다. 김 위원장은 "은행 스스로 왜 비판받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질타했는데, '성급한 금리인하' 발언으로 은행들의 금리인상을 주도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입장과 정면 대치된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장금리 하락세 속 패닉바잉 열풍이 한창인 가운데, 두 수장이 대출한도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외면한 채 금리로 알력다툼하는 꼴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금융노조도 당국의 엇박자 행보에 '적반하장'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취임 후 은행장과 가진 첫 상견례 자리에서 은행권의 '고수익'을 언급하며 '이자장사' 행보를 비판하고 나섰다. 김 위원장은 "은행 스스로 왜 비판받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질타했는데, '성급한 금리인하' 발언으로 은행들의 금리인상을 주도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입장과 정면 대치된다는 평가가 나온다. 사진 왼쪽부터 김병환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사진=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제공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지난 20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금융위원장·은행장 간담회'에서 "최근 은행 고수익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며 "은행권에 충분한 경쟁이 있는지, 은행이 일반 기업과 같이 치열하게 혁신을 해왔는지, 민생이 어려울 때 은행이 상생의지를 충분히 전달했는지 등 비판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의 발언은 고금리가 한창이던 지난해까지 유효하게 먹혀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2월 은행권의 '이자장사'를 공개 비판한 데 이어, 10월에는 '마치 은행에 종노릇 하는 것 같다'며 은행들의 높은 대출금리를 질타했다.
금융당국도 거들었다. 김주현 전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11월 "금융권의 역대급 이자수익 증대는 역대급 부담 증대를 의미한다"고 지적했고, 이복현 금감원장도 "은행이 어떤 혁신을 했길래 삼성·현대차·LG 등 4대 기업보다 많은 60조원의 이자 수익을 거둘 수 있는 건가"라며 이자수익을 비난했다. 은행들이 고금리에 편승해 이른바 '높은 예대마진(대출금리-예금금리)'의 과실을 누린다는 것.
DSR 입장변화 없이 금리만 훈수질
그러나 올들어 상황은 급변했다.
우선 미국발 금리인하가 가시화되면서 은행채 등 시장금리가 지속 하락하고 있다. 고정금리형(혼합형·주기형) 주담대의 준거금리인 은행채 5년물 금리는 지난 21일 3.239%에 불과했다. 이달 채권금리는 3.1~3.2%를 오르내리고 있는데, 지난 5일에는 3.101%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연중 최고치를 기록한 4월 25일 3.976%에 견주면 약 0.875%p 급락한 셈이다.
시장금리가 하락함에 따라 은행들의 예금·대출상품 금리도 거듭 하락하고 있다.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고정금리형 주담대 금리하단은 시장금리 하락세를 반영해 한때 2%대로 떨어지기도 했다. 예금상품 금리도 연 2.50~3.40%에 그쳐 기준금리 3.50%에도 못 미치고 있다. 종전대로라면 이 같은 은행들의 대출금리 인하를 반겨야 하는 셈이다.
하지만 끝을 모르던 집값 하락세가 '저점'을 찍었다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금리인하도 가시화되면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빚투(빚내서 투자)를 통한 '패닉바잉' 열풍이 불고 있다.
특히 올 7월 도입 예정이었던 스트레스 DSR 2단계 규제는 9월로 유예되면서, 가계대출 폭증의 '트리거(trigger)'가 됐다. 금리와 별개로 대출자의 대출한도를 결정짓는 강력한 규제라는 점에서 가계부채 관리의 최후 수단으로 꼽혔는데, 당국이 9월이라는 일종의 '데드라인'을 공표하면서 주택 매수행렬을 부추겼다.
대신 은행들은 대출금리 인상으로 가계부채 억제에 나서고 있다. 이복현 금감원장의 '금리인하 경계론'이 거듭 거론된 데 따른 행보다. 이 원장은 지난달 2일 열린 임원회의에서 "성급한 금리인하 기대와 국지적 주택가격 반등에 편승한 무리한 대출 확대는 안정화되던 가계부채 문제를 다시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밝힌 데 이어, 지난 1일에도 "과도한 금리인하 기대감을 경계하고, 주요 현안을 속도감 있게 처리해야 앞으로 다가올 성장 기회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이 원장의 지난달 발언 이후 하루 뒤인 3일, 금감원은 은행권을 긴급소집해 가계대출 속도조절을 당부했다. 이를 전후로 은행들은 가산금리 및 우대금리를 조정하는 식으로 대출금리를 거듭 인상하고 있다. 우리·신한·기업은행 등이 추가 금리인상을 공표한 것을 반영하면 두 달 새 약 20차례에 달한다. 이에 지난 20일 기준 5대 은행의 고정금리형(혼합형·주기형) 주담대 금리는 연 3.62~6.02%까지 치솟았다.
당국이 금리인상을 종용한다는 의혹에 대해 금감원은 거듭 "대출금리는 개별은행의 경영상황, 영업전략 등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항으로, 금리결정에 간여하거나 유도한 바 없다" "금감원이 은행의 대출금리 인상을 유도한다거나 금융위가 금감원의 가계대출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는 부분은 사실이 아니다"며 선을 긋고 있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 왜?"
하지만 현장에서는 당국의 구두개입에 따른 금리인상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미국발 금리인하가 다가온 만큼, 시장 논리대로라면 대출금리는 하락해야 하고, 대출자들도 금리인하 혜택을 누려야 할 때"라면서도 "지난달 은행권 부행장 긴급소집 이후 은행들이 가산금리 조정으로 대출금리를 인상하고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시장금리 하락으로 예대금리가 모두 하락할 수밖에 없는데, 은행들이 대출금리만 억지로 올리니 예대격차가 커지는 건 불가피하다"며 "이를 두고 느닷없이 '고수익' 탓을 하니 어이가 없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한때 대출금리가 높다는 대통령과 당국의 발언, 사회적 분위기 탓에 은행들이 대출금리 인하에 협조했고, 최근에는 가계부채 관리에 협조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고 있다"며 "정부와 당국이 하라는 대로 영업했는데, 왜 가계부채 문제를 은행만의 문제로 치부하느냐"고 밝혔다.
금융당국의 갈팡질팡 행보에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는 '적반하장'이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김형선 금융노조 위원장은 이날 성명서를 통해 "가계대출을 쉽게 허용하고, 정책의 일관성을 결여한 금융당국이야말로 문제의 원인이다"며 "2단계 스트레스 DSR 시행을 두 달 연기해 가계부채 문제는 더욱 커졌으며, 은행들에 금리를 올리라고 압박한 결과, 서민들은 더 높은 이자를 감당하게 됐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금융안정을 외치는 금융당국이 '예대마진과 내수시장에 의존하는 전통적 영업모델을 탈피'하라는 요구는 위험하다. '비이자수익 강조'는 과도한 규제 완화로 이어져 사모펀드 사태와 주가연계증권(ELS) 사태 같은 대형 금융사고를 초래했다"며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전통적 영업모델을 지키고, 가계부채를 적절히 규제해 금융산업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미디어펜=류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