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북한이 ‘통일 삭제’를 위한 헌법 개정을 하겠다고 예고한 11차 최고인민회의가 열렸지만 통일 표현 삭제나 영토 조항 신설 등이 발표되지 않았다. 앞서 김정은은 1월 15일 10차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통일’ ‘화해’ ‘동족’ 개념을 제거해야 한다며 헌법에서 ‘평화통일’ ‘자주’ 등 표현을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9월 북한은 헌법 개정을 위한 최고인민회의를 예고했다. 하지만 7~8일 열린 회의에 김정은은 참석하지 않았고, 노동신문은 헌법 개정과 관련해 노동나이, 선거나이를 수정했다고만 전했다.
처음 북한이 헌법에 통일 삭제와 영토 조항 신설을 해놓고 발표만 안했을 것이란 관측도 있었다. 최고인민회의 직후인 9일 총참모부가 “남북 간 영토를 철저히 분리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군사조치를 공포한다”며 “요새화 공사를 진행한다”고 밝혔기 때문에 영토 조항과 연결된 조치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선대의 유훈을 포기하는 통일 삭제로 인한 북한 내부 파장을 고려해 헌법 개정이 미뤄졌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통일연구원이 10일 이 주제로 토론한 결과 김정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당장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주민들의 눈치를 본다는 전문가 분석이 나왔다. 김정은의 지시가 있었으니 당 차원에선 준비를 끝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합리화시킬 명분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갑식 선임연구위원은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 개정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며 “소위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이밍 효과처럼 당분간 국가제일주의를 강조하고, 그간의 성과를 과시할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정권이 자신감을 더 보유했을 때 이 문제를 내세우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2국가론을 내세운 북한정권이 ‘2민족론’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북한정권이 통일과 민족 개념을 삭제하기 위해선 언어와 혈통 문제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 언어의 경우 ‘평양문화어보호법’을 통해 해결됐다고 보더라도 혈통을 부정할 순 없다. 북한정권 내부에서도 이와 관련한 고민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진단이다.
조한범 석좌연구위원도 “민족·통일 개념의 폐기를 선언한 순간은 김정은정권의 ‘끝의 시작이’라고 본다”면서 “영토 분리는 북한만을 영토로 규정하면 되는 것이어서 용이하지만, 민족과 통일 개념의 폐기는 다른 문제다. 주체사상의 핵심과 충돌하는 것이고, 곧 김정은 집권 명분의 삭제를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이 문제에 대해 북한정권 내부적으로 큰 고민을 했겠지만 이번에도 해결하지 못하고, 민족·통일 개념 삭제가 다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면서 “최근인 7일 김정은 연설에서 민족·통일 개념 폐기는 등장하지 않은 점을 주목해야 한다. 향후에도 이 민족·통일 개념 폐기를 명시화할지 불분명하다”고 했다.
또 “적대적 2국가론에 의거한 영토 분리는 유지한 채 통일과 민족 개념에 대해선 전략적 모호성을 취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번 최고인민회의에 조용원, 리일환 등 주요 당비서가 참석 안했다. 영토 및 통일 논의가 있었다면 선전선동 담당인 리일환이 참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오경섭 연구위원은 “헌법 개정이 지연되는 이유는 김정은정권이 두 국가 관계를 헌법 개정을 통해 제도적으로 완성하는 과정을 신중하고 점진적으로 처리한다고 봐야 한다”며 “충분한 시간을 두고 엘리트와 인민을 설득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김정은의 대남전략 노선 전환은 김정은의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위험한 노선 전환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노동당 창건 79주년을 기념하는 경축공연과 연회가 지난 10일 노동당 중앙간부학교에서 진행되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1일 보도했다. 2024.10.11./사진=연합뉴스
그는 “이렇게 내부 동의 과정을 거치면서 2024년 말이나 2025년 초에 헌법 개정을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만약 헌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는 김정은의 리더십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장철운 연구위원은 “헌법 개정이 마지막 절차를 밟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김정은의 리더십과 연관짓는 것에 완전히 동의하기 어렵다. 이전에도 김정은의 지시가 미완료되러나 이행되지 않은 사례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나용우 북한연구실장은 “북한이 2023년 형법 개정에서 통일 관련 조항을 삭제한 바 있다”고 설명했고, 김갑식 선임연구위원은 “이 형법 개정을 북한은 2023년 이전부터 준비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북한 총참모부가 이번에 선언한 ‘요새화’는 북러 밀착 관계가 군사동맹 차원까지 심화된 맥락으로 봐야 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현승수 부원장은 “최근 러시아에서 요새화 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김정은이 푸틴의 세계전략·국가전략에 상당히 동조하면서 벤치마킹한다고 본다”며 “푸틴은 러시아를 서방문명과 대결에서 하나의 요새로 만들고, 세계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중국과 북한의 갈등도 주목받고 있는데, 중국과 러시아는 ‘다극화’라는 목표에는 합의했지만 ‘세계화’에선 견해차가 있다. 중국은 경제를 중심으로 세계화가 이뤄져야 하고 그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러시아에게 세계화는 서방의 식민지화 전략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북한정권은 중국의 담론이나 인식을 수용할 수 없고, 푸틴도 중국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만, 현재 러시아가 처한 입장 때문에 중국과 노골적으로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뿐”이라고 분석했다.
현 부원장은 “결국 김정은이 민족과 통일 포기를 헌법에 명시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다”며 “김정은은 다시 미국이나 남한과 타협·교류·협력을 추진하기보다 영토의 요새화를 통해 러시아 중심의 진영 안에서 자기 역할을 키워가려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한범 석좌연구위원은 “다르게 생각한다. 왜냐면 러북 밀착이 심화됐는데도 북한경제에 미친 영향이 미약하다”고 지적하고, “지난해 북한의 대중국 교역 의존도가 98.3%로 사상 최고다. 달러 환욜과 쌀, 옥수수값도 최고 수준이다. 중국이 보유한 어마어마한 산업 제조 기반이 러시아에는 전무해 러북협력이 북한 인민경제시장에 미치는 효과가 미미하다. 러북관계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정은이 원하는 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다. 분명 미국 대선이 끝나면 현실론, 핵군축론, 핵동결론 입장으로 관계 개선을 추구할 것”이라면서 “푸틴은 사실상 출구가 없어서 강요된 세계전략일 수 있으나, 김정은은 미국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미래가 없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