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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귀단장 고전특강(86)-민주정과 공화정을 지키려던 애국자들

2015-10-17 08:55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86)-키케로와 데모스테네스의 소신의 삶
플루타르코스(46년?~120년?)의 『두 정치연설가의 생애』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힘이 지배하던 시대인 고대기에 국가의 운명을 바꾼 위대한 인물들은 주로 군인들이 많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 역시 걸출한 장군들이 많이 배출되어 국가의 흥망을 좌우했다. 헤라클레스, 아킬레스, 테세우스 등 전설적 영웅을 차치하더라도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테바이의 에파메이논다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는 각각 국가의 패권을 이끌었다. 로마에는 술라,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스키피오 등이 각각 한 시대를 풍미했다. ​

그러나 장군들 못지않게 국가의 융성을 이끈 사람 가운데는 탁월한 정치가와 연설가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왕이나 장군들의 영예로운 이름에 가려 빛을 못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연설과 정치력으로 나라의 번영을 일구거나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해낸 역할을 한 사람들을 간과할 수 없다. ​

이런 대표적인 인물이 그리스의 데모스테네스와 로마의 키케로다. 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코스는 이 두 걸출한 정치인을 비교열전에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플루타르크 영웅전’으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역자가 두 사람의 열전 부분을 ‘비교열전’에서 따로 떼어내 단행본으로 번역한 이유는 이 두 인물을 보다 심도 있게 분석하기 위해서다. ​

그런 까닭에 ‘플루타르크 영웅전’ 가운데 소개되는 내용과 다른 특장이 풍부하다. 우선 역자가 두 인물을 비교한 장문의 해제도 읽어볼 만하다. 본문의 주요 부분 마다 각주로 실은 풍부한 해설이 돋보인다.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는 각각 자유와 민주정체를 지키고자 노력하다 정적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는 점에서 유사한 인생행로를 보여준다. 이들의 정적(政敵) 또한 세기의 인물들이다. 데모스테네스는 알렉산드로스, 키케로는 카이사르에 저항했다. ​

데모스테네스는 기원전 4세기말 그리스 전역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마케도니아의 패권전략에 맞서 점차 스러져가던 아테네의 운명을 되살리려 애썼다. 그는 그리스 전역을 차지하려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의 야욕을 간파하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반 마케도니아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대항할 것을 주장했다. 아테네와 테바이의 동맹을 촉구하고 마케도니아와 맞서 싸울 것을 시민들에게 분기(奮起)시켰다. ​

하지만 데모스테네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마케도니아 군대에게 패배함으로써 그리스 전역은 급속도로 필립포스의 지배권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데모스테네스는 필립포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에게도 도전했다. 그는 자신을 양들을 지키는 개로, 알렉산드로스는 ‘홀로 사는 늑대’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마케도니아의 팽창을 맞서 민중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려 분투했다. ​

   
▲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연설가, 데모스테네스 흉상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를 수호하기 위해 민중을 설득하고 주변국과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연설술을 활용했던 것이다. 그는 말의 위력을 일찍이 간파했다. 하지만 데모스테네스는 타고난 연설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어린 시절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신체 또한 병약하여 주변의 놀림을 받았다. 게다가 말은 매우 어눌했고, 혀 짧은 소리를 냈으니 대중을 상대로 그가 연설을 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플루타르코스의 지적은 데모스테네스의 초기 연설이 얼마나 엉성했는지 잘 말해준다. ​

“그는 목소리가 약하고 발음도 정확하지 않았으며 호흡도 짧아 주기를 이루는 문장들을 툭툭 끊어 발음하였기 때문에 연설 내용의 의미가 혼란스러워져 청중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

그런 그가 연설에 대한 열정을 갖고 이소크라테스, 이사이오스 등 연설가들의 수업을 받으면서 연설술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그는 부단한 연습을 통해 최고의 연설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그는 지하 연습실을 만들어놓고, 그곳에 빠짐없이 매일 내려가, 연기술을 다듬으며 철저한 발음 연습을 하였습니다. 그는 종종 두세 달을 계속 지내기도 했으며, 간절히 나가고 싶어도 창피해서 그럴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머리 한쪽 부분을 싹 깎기까지 했다.”​

데모스테네스는 피나는 연습을 통해 위대한 연설가로 성장했고, 아테네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정치철학을 연설에 담아 대중에게 전파하는 데 매진했다. 그러나 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퇴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는 한때 대중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아이스키네스 등 친 마케도니아 정파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아테네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데모스테네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재무관이었던 하르팔로스에게서 뇌물을 수수한 사건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청렴성을 의문 받았던 부분은 데모스테네스 일생의 최대의 오점이다. ​

그는 친(親) 마케도니아 세력이 아테네 정권을 잡고 자신을 죽이려하자 독약을 담은 갈대 펜을 입에 물고 자결한다. 그가 죽은 후 아테네 민중은 그에게 청동상을 세워주며 추모했다. 그의 동상에 새겨진 비문이 데모스테네스의 투쟁과 한계를 짚어준다.

“데모스테네스여, 만약 그대가 생각에 꼭 맞는 힘을 가졌더라면, 마케도니아의 아레스(필립포스 또는 알렉산드로스를 지칭)는 결코 헬라스 사람들을 지배할 수 없었으리라.”

​그렇다. 그는 아테네의 자유의 보존을 위해 말의 힘을 통해 대중을 설득하고 분기(奮起)시키려 했지만, 마케도니아의 강력한 군사력을 맞서 싸울 힘을 갖지 못해 그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

로마 최고의 연설가 키케로 역시 로마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등 걸출한 영웅들에 맞섰지만, 정적(政敵) 안토니우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키케로는 데모스테네스보다 더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하고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 또 로마공화정의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을 역임하고 킬리키아 속주의 총독을 맡기도 할 만큼 키케로는 나름 관운도 갖고 있었다. ​​

키케로 또한 스스로 피나는 노력을 통해 집정관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귀족이 아닌 기사계급 출신이 집정관이 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그리스 철학과 수사학을 통해 확고한 정치철학과 탁월한 연설 능력을 함양한 덕택이었다. 애국심에 있어서도 키케로는 데모스테네스 못지않았다. 그는 공화정의 안정을 흔드는 어떠한 도전에도 맞설 맹렬한 정치철학을 갖고 있었다.​

키케로가 집정관으로 재임하고 있던 시기에 카틸리나의 반란 음모를 발각하고 원로원 회의에서 카틸리나를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카틸리나에 동조하여 무력을 행사하려던 렌툴루스 등을 단호하게 역모로 처단했던 사례를 이를 잘 말해준다. ​

   
▲ 로마의 철학자이자, 교육자, 정치인이었던 키케로 흉상

키케로가 정치적 목숨을 걸고 도전했던 일은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등 황제정을 수립하려는 세력과의 대결이었다. 그는 카이사르를 로마공화정을 붕괴시킬 위험인물로 보았다. 이런 까닭에 키케로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벌인 내전에서 폼페이우스의 편에 서면서 카이사르와 적대적 관계가 되고 말았다. ​

원로원의 권위와 귀족정을 더 중시하던 그의 보수적 정치관은 병사들의 대중적 인기를 등에 업은 군벌 세력의 대중 영합적 정책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호의를 보내며 그를 포용하려 했지만 키케로는 끝내 합류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에도 정국의 주도권을 민중파에 빼앗긴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가 묵인한 가운데 안토니우스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고 만다. ​

키케로는 데모스테네스에 비해 명예욕이 넘쳤고, 정치권력에 대한 욕망 또한 컸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연설 능력은 갖추었지만,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려는 정치적 격변기에 그를 지지할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힘에 의해 희생당한 데모스테네스와 유사한 불운을 겪게 되었다. ​

플루타르코스는 과장과 유머를 섞은 파격적인 연설을 즐긴 키케로와 늘 엄격하고 진지한 격식의 연설을 구사한 데모스테네스의 차이점을 비교하고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말로부터 얻어지는 영광을 탐닉하고 그것에 안달하는 것은 저속한 일”이라며, 은근히 키케로의 지나친 공명심을 지적하면서, 데모스테네스가 더 의젓하고 품위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에 정통한 철학자 키케로의 진지했던 삶 전체를 놓고 볼 때, 성품의 차이에 대한 플루타르코스의 평가에 온전에게 동의하긴 힘들 것 같다.​

아무튼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적 변혁기에 활약했던 두 사람은 당대를 주름잡은 뛰어난 정치가이자 연설가였지만, 모두 시류의 큰 흐름에 저항하다 숨진 불운했던 사람들이다. 데모스테네스는 욱일승천하던 마케도니아의 힘과 그리스 자유정신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며 개인주의로 흐르던 그리스 세계의 필연적 퇴조를 읽지 못한 아둔한 사람일 수도 있다.

키케로 역시 궁벽한 도시 국가를 운영하던 로마 공화정 체제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영토를 확장한 거대한 제국 로마에 잘 맞지 않는 불편한 의복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 둔감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

이 두 사람은 시대와 불화하지 않고 변화의 기류에 재빠르게 편승하여 새로운 기회를 거머쥘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회주의자가 되기보다 원칙주의자의 길을 고수하여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각각 아테네의 민주정과 로마의 공화정을 지키는 길을 택했다. 어느 길이 올바른 길이었는지 역사와 후세가 어찌 평가하든 자신들의 소신에 맞는 길을 갈 수 있었던 그들은 진정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우리사회에는 대한민국의 헌법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걸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행정학 박사

   
▲ ☞ 추천도서: 『두 정치연설가의 생애』, 플루타르코스 지음, 김헌 주해, 한길사(2013),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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