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상일 기자] 애간장을 녹여내고 구곡간장이 끊기는 아픔이 이보다 더 할까? 수십년간을 기다려 2박3일의 짧은 만남을 뒤로 기약없이 돌아서는 이산가족 상봉단의 이별은 통곡의 울음바다였다. 첫 상봉 때 두 팔을 벌리며 반겼던 가족들. 그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헤어지는 순간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제 돌아가면 아버지 목소리 기억 못할 것 같으니 노래를 불러 달라”는 예순이 훌쩍 넘은 딸의 부탁에 여든여덟살의 아버지가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으로 이어지는 ‘애수의 소야곡’을 부르며 흐느꼈다. 한 곡으로는 슬픔을 덜어낼 수 없었음일까. 아버지는 이어 눈물배인 목소리로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로 시작되는 ‘꿈꾸는 백마강’을 흐느끼듯 불렀다.
▲ "또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 하나"…이산가족 상봉 작별장 '눈물바다'./사진=MBC 캡쳐 |
서울대 병원 간호사로 일하다가 인민군 후퇴 때 가족들과 이별하게 된 박용순씨는 남측의 남동생 3명을 만났다. 남과 북에서 서로 애타게 찾았다가 60여 년 만에 마침내 상봉이 이뤄졌다. 2박 3일 단 12시간의 만남은 이들에게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서로 등을 두드리며 이들이 마지막으로 나눈 말들은 “건강하시라, 우리 잊지 마라, 꼭 통일되면 다시 만나자”라는 기약없는 약속이었다.
돌쟁이 때 헤어진 아버지(손권근·북측)를 만난 아들은 두 손을 꼭 맞잡고 “아버지 건강하시고 오래 사셔야 다시 만나지 않겠느냐. 살아 계신지도 몰랐는데 이렇게 만난 것조차 감사하다”며 인사를 올리자 아버지는 눈물을 감추려고 차마 아들을 바로 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리한식(85) 할아버지는 남측의 동생들을 만나 경북 예천의 고향집 초가집 그림을 그리며 추억을 회상했다. 초가집 결이라든가 담벼락 등 어릴 때 살던 집 모습 그대로 재현해 동생에게 선물했다. 리한식 할아버지가 합격사실을 알고 집으로 오던 중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아들이 끌려 간 후 1주일 후 집으로 날아 온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든 아버지는 눈물을 쏟았다고 전했다. 막내 동생 이종인(55)씨의 부탁에 형은 옛 기억을 되살리며 ‘옛날 살던 집’을 그렸다. 리씨의 사촌동생 이천식(76)씨는 “예전부터 워낙 손재주가 좋으셨다. 북에서도 무슨 대회에 나가 2등도 하시고 그랬단다”고 전했다. 형제는 그림 한 점을 추억으로 이별 준비를 했다.
점심식사에서 차마 목이 메어 수저는 들지 못한 채 대동강맥주로 잔을 부딪친 북쪽의 형 김주성(85)씨와 남녘 동생 김주철(83)씨. “이렇게 고생만 해서 어떻게 해….”라는 동생의 말에 형은 손수건을 꺼내 들며 “건강해야 한다, 주철아.”라며 서로의 눈물을 닦았다. 1950년 형은 아파 누워 있는 동생한테 살구 3개를 건네며 “난 지금 간다. 밥 잘 먹고 있어라.”가 마지막 말이었다. 동생은 북녘 형의 딸에게 “아버지 잘 모시라”고 당부하며 “그래야 다시 보지….”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북쪽 남철순(82)씨는 남쪽 동생 남순옥(80)씨를 만난 자매는 손을 놓지 못했다. 희미해진 그 시절을 떠올리려는 듯 옛 사진들을 서로 돌려가며 보고 또 봤다. 벚꽃 사진을 보이며 동생 순옥씨는 “엄마야, 엄마”라고 외쳤고, 언니 철순씨는 흑백사진을 꺼내보이며 “결혼사진”이라고 소개했다. 언니는 한국전쟁 때 학교에 간다고 나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22일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는 상봉 종료를 예고하는 방송에 이어 “백두에서 한라로. 우린 하나의 겨레. 헤어져서 얼마나 눈물 또.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오 다시 만나요. 목 메여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가 울려 퍼졌다.
이별이 못내 아쉬운 듯 남측 가족들은 버스로 뛰어가 연신 "어딨어, 어딨어"라고 외치며 북측 가족의 마지막 모습을 찾았고 눈에는 고인 눈물이, 차창밖으로 맞잡은 손을 놓을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