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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현장 역사 다시 쓴 울산…‘현대시’가 된 사연은?

2015-10-25 07:18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세상에 동일한 것은 없다. 동일한 사람도 없다. 외모, 성격, 능력, 감정, 의욕 등 모두 다 제각각이며, 이들이 만들어내는 산물 역시 모두 다 다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격차를 줄이자, 격차를 없애야 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하곤 한다. 과연 바람직한 현상인지, 격차를 인정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동일하게 만들려 하면 자연의 조화는 깨진다고 취지에서 자유경제원은 예술인들과 함께 22일 ‘격차, 그 지극한 자연스러움’ 예술인이 본 격차 제2차 세미나를 열었다. 아래 글은 세미나에서 발표자로 참석한 이근미 소설가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이근미 소설가

‘잘 살아보세’의 동인이 된 격차

격차는 최고의 모티베이션

세상에 격차가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환상은 깨지기 시작한다. 세상은 평등하지 않고 평등할 수도 없다는 것, 그 속에서 내 위치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삶은 다시 피어오른다. 격차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선택이다. 격차가 존재하는 세상을 향해 불만을 토로할 것인가, 차이가 나는 그곳을 향해 달려갈 것인가. 격차에 분노만 하고 있으면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만다. 나만의 무기를 만들어 하나씩 격파해나갈 때 격차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 격차는 오히려 좋은 동인이 되고 최고의 모티베이션(motivation)이 된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세상에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깨달았다. 조용한 산촌에서 어느 날 갑자기 울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눈의 비늘이 벗겨진 것이다. 자동차도 많지 않던 시절, 종일 소음이라곤 들어볼 수 없던 마을에서 대낮에 다이너마이트가 펑펑 터지는 곳으로의 이동은 열 살 여자아이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성경 마태복음에 불가능의 상징으로, 혹은 믿음의 척도로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라는 구절이 나온다.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에서 다리가 불편한 주인공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이 산을 들어 저산으로 옮긴다’는 말씀을 수없이 읊조린다. 소설에서는 끝내 다리 길이가 똑같아지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지만 나는 울산에서 ‘산을 여기서 저기로 옮긴다’는 말이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울산은 한마디로 역동 그 자체였다. 산을 다이너마이트로 터트린 아저씨들은 큰 돌을 바다로 던져 넣어 땅을 넓혀 갔다. 갑자기 산이 사라지고 바다가 좁아지는가 하면 엄청난 양의 건설자재를 쌓아올려 하루아침에 여러 개의 봉우리가 생기기도 했다.

다이너마이트 소리에 적응될 때쯤 더 크게 다가온 충격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아이들끼리의 명백한 격차였다. 고만고만하게 살던 산촌과 울산은 환경이 판이하게 달랐다. 1986년 포경이 금지되기 전까지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 정도로 풍요로웠던 울산 장생포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격차라는 것과 처음으로 맞닥뜨렸다.

   
▲ 1974년에 완공된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현대계열사들이 완공되면서 울산 인구는 더욱 늘어났다. 방어진을 중심으로 한 울산 땅의 반쪽에 현대 계열사가 들어서자 외국 지도에 울산이 ‘현대시’라고 표기됐을 정도이다. 사진은 현대·기아차 울산공장 수출선적 부두. /사진=현대기아자동차그룹 제공

포경선을 다섯 척이나 가진 선주의 아들인 우리 반 반장이 아파서 결석하자 담임이 우리를 끌고 병문안을 갔고, 반장 집에 들어서는 순간 모두들 입이 떡 벌어졌다. 고래를 잡는 선주집답게 고래등같은 기와집이었는데 마당이 학교 운동장만 했다. 그제야 장생포 앞바다에 줄지어 서있는 포경선마다 주인이 따로 있고, 그 포경선이 한척이 수십명을 먹여 살리는 도구라는 걸 깨달았다.

숱한 아이들이 결석을 했지만 병문안을 간 것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격차라는 단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담임이 ‘와이로’를 먹었을 거라고 말한 아이는 없지만 아마도 대부분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산업현장에서 역사를 쓰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회사 사택에 살면서 아버지 회사의 버스를 타고 등하교 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울산공업단지의 대기업 생산공장들은 출퇴근 버스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 버스 가운데 한두 대는 자녀들의 등하교용으로 사용되었다. 자가용이 상용화되지 않은 1970년대, 회사 버스를 타고 등하교하는 아이들은 만원버스에서 차장 언니에게 등짝을 맞아가며 버스를 오르는 아이들을 기죽일만큼 기름졌다.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사는 친구들이 집과 차를 무상으로 이용한다는 사실 앞에서 격차의 오묘함을 다시금 곱씹었다.

회사 사택단지는 공업화로 급팽창하면서 무허가 건물과 대충지은 건물이 난립하는 울산의 다른 주택단지와 확실히 달랐다. 넓은 대지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미국 드라마 <초원의 집>에 나오는 것 같은 단독주택은 현세와 내세의 중간쯤 되는 다른 세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과장급 이상에게 주어지는 회사 사택은 영원히 과장이 될 수 없는 고졸사원과 대졸사원을 가르는 차벽같은 것이기도 했다.

1970년대 울산은 용광로를 연상케 했다. 1962년 울산공업단지 지정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개발의 핵심 산업이었다. 최초로 들어선 산업체는 대한석유공사의 정유공장으로 1964년 5월에 준공되었다. 뒤이어 석유화학계열의 공장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울산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바닷가 마을들은 철거지역으로 지정되었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밀려들었다. 자고 나면 집과 공장이 들어섰고, 밤이면 공장마다 아황산가스로 뿜어내 온 도시의 하늘이 뿌옇게 될 정도였다.

1974년에 완공된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현대계열사들이 완공되면서 울산 인구는 더욱 늘어났다. 방어진을 중심으로 한 울산 땅의 반쪽에 현대 계열사가 들어서자 외국 지도에 울산이 ‘현대시’라고 표기됐을 정도이다. 현대계열사들은 대개 대형 공장이어서 많은 인력을 채용했다. 공장마다 수많은 협력업체를 거느리고 있어 엄청난 고용창출이 이루어졌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되었다.

부모들이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로 온 것은 ‘잘 살아 보겠다’는 일념에서였다. 내 자녀만큼은 공부를 시켜 나와 다르게 살도록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공업도시로 밀려든 것이다. 부모들은 내 자녀가 친구의 고래등같은 기와집과 회사버스 타고 등교하는 아이에게 주눅 들지 않도록 하는 길은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잘사는 이들을 질시하고 사회 구조를 원망하기보다 기회를 기다리던 아버지들의 판단은 주효했다. 산을 터트려 땅고르기를 하는, 일명 몸을 쓰는 ‘노가다’ 일로 시작한 아버지들은 얼마 안가 대기업 생산공장의 협력업체에 거의 대부분 취직됐다. 대기업 생산공장은 공업고등학교 졸업생들로 채워지고, 협력업체는 학벌 상관없이 사람들을 수시로 채용했다. 그래도 인력이 부족해 주부들의 일손까지 빌리는 업체들도 많았다. 살림을 완전히 놓을 수 없는 주부들도 언제든지 나가서 돈을 벌 수 있는 자투리 일이 즐비했다.

중산층 대열에 진입

1980년대만 해도 맞벌이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맞벌이를 하고 싶어도 여성들을 채용하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울산에서는 많은 어머니들이 산업현장에 나가서 일을 했다.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현찰이 들어오는 상황이 유혹적이기도 했지만, 자녀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일념에서 기꺼이 나갔던 것이다.

당시 부모들은 격차를 질시하거나 제도 따위를 탓하기보다 열심히 일해 내 자녀들에게는 다른 삶을 살게 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산업화로 인해 일자리가 많이 생기면서 열심히 일하면 누구든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덕택이다.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는데 울산의 경우 1970년대에도 부지런한 아이들은 아르바이트 했다. 요즘 아이들이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것과 달리 공장으로 간다는 게 좀 달랐지만. 설탕을 종이봉지에 넣는 일, 냉동된 생선을 고무호스로 물을 뿌려 녹이는 일, 건설현장에서 인부들을 돕는 것 따위의 일을 해서 점점 화려해지는 시내로 나가 옷도 사 입고 맛있는 것도 사먹었다.

우리나라는 1995년에 국민소득 1만 달러에 진입했는데 울산은 1980년대 초반에 1만 달러를 체감할 수 있었다. 주부도 취업을 하고 아이들도 용돈을 벌어서 썼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듯하다. 1980대 말, 대학에 진학하여 전국에서 모인 동기들과 대화를 나눠보고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아버지들조차 일거리가 없는 조용한 도시 출신 동기들은 엄마들까지 일을 한다는 얘기에 놀라기도 했다.

   
▲ 현대계열사들은 대개 대형 공장이어서 많은 인력을 채용했다. 공장마다 수많은 협력업체를 거느리고 있어 엄청난 고용창출이 이루어졌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되었다. /사진=현대중공업 제공

울산의 웬만한 가정은 1970년대부터 부산을 통해 들어오는 카메라나 시계같은 밀수품을 갖고 있었고 삼성전자가 TV와 냉장고, 세탁기를 대량생산할 때 일제히 구입했다. 또한 중동이나 일본에서 들여온 비디오, 카세트, 전축 등을 웬만하면 다들 갖고 있었다.

부모들의 피나는 노력에 의해 자녀들은 점차 친구들과의 격차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고래등같은 집은 아니고, 여전히 만원버스에 시달리지만 실생활에서 별달리 불편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의 맞벌이로 웬만한 건 가질 수 있었으니 선주의 아들과 사택에 사는 친구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서서히 포경이 금지 수순을 밟고 있는 데다 사택보다 훨씬 시설이 좋은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고 있었다. 부동산 투기 붐이 별로 일지 않아 내 집 마련이 크게 어렵지 않을 때였다. 산업화가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부가 열심히 일하면서 일찌감치 중산층의 삶을 누리게 된 것이다.

깔끔한 포기로 새 길 개척

무엇보다도 격차를 부각시켜 분노를 조장하는 부정적인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만족도가 컸을 것이다. 당시 어른들은 격차보다는 산업화 첫 수혜 세대가 되었다 것에 감사하며 만족감을 느꼈다. 지금처럼 모두가 대학에 진학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학생들도 압박감이 덜했다. 내신점수를 따지지 않을 때여서 고3 때 바짝 공부하여 학력고사를 잘 보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때였다. 한번쯤 실패하면 재수를 해서 다시 시험을 치고 그래도 점수가 안 나오면 깨끗이 포기했다. 사회를 탓하기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격차를 인정했던 것이다.

당시 울산에는 대학이 하나밖에 없어 진학을 하려면 타지로 나가야 했다. 타지에 있는 4년제 대학에 들어가는 비율이 높지 않았는데,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친구들은 격차를 수용하고 바로 자신의 길을 찾았다.

공고나 상고를 졸업하고 대기업 생산공장에 당당히 입사하는 것만으로 만족감이 컸다. 대기업 고졸사원만 되어도 임금 수준이 괜찮은 데다 상대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낮아 집을 마련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자동차를 생산하는 도시여서 아예 처음부터 대형차를 몰고 다니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격차를 인정하고 스스로 자신이 만든 기회를 활용하며 사는 일에 만족했던 것이다.

격차에 불평을 퍼붓기보다 격차를 오히려 동인으로 삼은 힘은 온몸을 부딪쳐 삶을 헤쳐나간 산업역군 아버지들의 사랑에서 기인한다. 또한 아버지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 산업화의 공로이다.

아버지 땀에 보답한 공장장 아들

나에게도 격차가 큰 문제는 아니었다. 시골 부농의 셋째아들이었던 나의 아버지는 나른한 시골생활이 싫어 대한민국의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가 울산에 정착했고, 아버지로 인해 낯선 도시에서 내가 처음으로 자각한 것은 세상에는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격차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하는 것을 어릴 때부터 생각했다.

초등학교 시절, 주눅 들어 지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5월에 전학을 갔는데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갑자기 몰려왔는지 내 번호가 장장 107번이었다. 좁은 교실에 100명이 넘는 아이를 몰아넣다보니 분단을 나누지 못해 화장실 가기도 힘들 정도였다. 콩나물시루에서 시달리는 것만 해도 힘든데 억센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이 나에게 “갱사 씨지 마라”며 협박을 일삼았다. 충청도 출신 부모의 영향으로 충청도말을 썼던 나의 당시 소망은 경상도말을 속성으로 배우는 것이었다. 기죽어 지내던 내가 글짓기 대회 때마다 상을 받으면서 조금씩 회복되었다.

소녀시절,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격차는 주로 부모들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을 깨닫고 내 삶을 내가 개척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격차라는 것에 구애받지 않고 나를 구현하는 것,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 소설가였다. 내가 잘하는 것을 통해 내 자리를 만들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부모들로 인해, 또한 우리끼리, 엄연히 존재하는 격차를 깨닫는 순간 나에게 강한 도전의식이 생겼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산업화 시대에 나의 처지를 원망하기보다 부모들처럼 개척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했다. 한참 다른 길로 가다가 소설을 써야겠다는 결심으로 뒤늦게 대학에 진학했고 결국 소설가가 되었다.

   
▲ 1971년 정주영 회장은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 몇 채가 선 초라한 백사장을 찍은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일본으로, 영국으로 배를 수주하러 돌아다녔다. 그로부터 현대중공업의 신화가 시작됐다. 사진은 현대그룹 故정주영 회장(1915~2001). /사진=현대그룹 홈페이지

어릴 때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공장장이라고 생각했다. 회장님과 사장님은 서울 본사에 있고 엄청나게 큰 울산공장에서는 공장장이 왕이었다. 누가 저렇게 큰 공장의 공장장이 될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초등학교 친구 가운데 한 명이 유명 화학공장의 공장장이 되었다. 그 친구의 아버지도 산업현장에서 열심히 일한 분이었고, 친구는 아버지의 뒷받침 덕분에 타지의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가장 들어가기 힘들다는 석유화학단지 내의 한 공장에 대졸신입사원으로 입사했고, 어느덧 공장장이 되었다. 내 아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산업현장에서 열심히 일한 아버지의 승리였다. 여러 친구가 의사, 대학교수, 초중고 교사, 약사, 대기업사원 등이 되어 아버지들의 땀에 보답했다.

격차가 인생을 가로 막는다고 생각하는 우울한 시대이다. 구조적 모순, 상대적 박탈감, 기회의 불평등 등을 외치며 노력도 하기 전에 격차에 치어 쓰러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원인이 내가 아닌 남에게 있다고 부추기는 세력에 속으면 안 된다. 격차를 동기부여의 기회로 삼고 격차에서 오히려 도전의식을 느껴 솟구쳐 오르는 이들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그런 세대가 계속 이어져야 우리 사회가 발전할 것이다. /이근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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