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은 외교나 독립운동, 정치적 식견, 6‧25 당시의 전쟁 지도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경제나 산업 분야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승만은 젊은 시절부터 자유통상과 산업 양성이 인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주장했고, 그의 박사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하의 영세중립론>도 이 주제를 심화시킨 것이다.
자유통상과 산업 양성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통해 발현할 수 있으니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이 이를 신생국가의 핵심 가치관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 직후부터 건국을 대비하여 산업발전의 청사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1905년 도미하여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유학 과정에서 자신이 다니던 학교 근처에 있는 MIT를 보면서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이 필수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대통령 재임 시절 이승만은 하와이 교포회관을 매각한 대금을 ‘한국의 MIT’를 목표로 설립한 인하공대 설립자금으로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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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삼 경기콘텐츠진흥원 감사(오른쪽)는 14일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자유통상과 산업화의 초석을 다졌다고 강조했다. 이승만대통령은 철도와 비료 철강 비료 등 중화학은 물론 제당 모직 등 경공업육성에도 힘썼다.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일찌감치 원자력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대통령의 경제개발,산업화는 박정희대통령의 산업화와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하는 원동력이 됐다. 김용삼 감사 오른쪽은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
33년간의 해외 망명생활 탓에 국내 물정에 어두웠던 이승만은 경제인, 기업가, 기술자, 외국 유학생 출신 등을 돈암장에 초청하여 나라 발전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조언을 들었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국가발전은 광업에서부터’라는 청사진을 마련, 금과 중석, 석탄을 집중 개발했다.
광업 진흥을 위해서는 험산준령을 넘는 철도 건설이 시급했다. 그 결과 건국된 지 8개월 후인 1949년 4월 8일, 영주에서 태백 탄전지역인 철암까지를 연결하는 영암선 철도건설에 착공했다. 한 달 후인 1949년 5월 3일에는 중앙선 제천역에서 영월발전소를 연결하는 함백선을 착공했다. 영암선은 6‧25로 중단되었다가 휴전 후 공사가 재개되어 1955년 12월 31일에, 함백선은 1957년 3월 9일에 완전 개통되었다. 이승만 시절 기본적인 산업철도가 건설되었기에 박정희 시절 태백산 종합개발사업이 본격화될 수 있었다.
해방 당시 국내의 기업인은 경성방직의 김연수,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좌우익의 격돌, 정치적 무정부 상태, 건국과 남침 전쟁 등 혼란과 위기 속에서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박흥식, 김연수, 설경동, 정인욱, 전택보 등 훗날 거대기업을 일군 기업인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업인들은 물자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시작된 정크무역, 홍콩무역, 마카오무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고,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간 귀속재산을 불하받아 OB맥주(두산그룹), 조선유지(한화그룹), 선경직물(SK그룹), 해태제과 등 기업들이 탄생하게 된다. 또 전쟁터에서 고철과 탄피를 수집하여 수출하고, 생필품을 수입 판매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다.
전시(戰時)무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상인들이 공장을 지어 산업자본으로 탈바꿈하면서 우리나라에도 근대적 기업가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으로 거부(巨富)가 된 이병철이 그 효시다.
뒤를 이어 양말 공장으로 출발하여 섬유 왕이 된 정재호, 전시무역으로 번 돈을 시멘트공장에 투자한 대한양회의 이정림, 중석 수출과 밀가루 수입으로 돈을 벌어 대한전선을 설립한 설경동, 플라스틱 제품 제조로 금성사(LG전자의 전신)라는 거대기업을 일군 구인회 등이 등장하여 산업화의 초석이 다져지기 시작했다.
국가 차원의 산업화 전략이 추진되기 시작한 시기는 1953년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4월 4일 내각에 철강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의해 대통령령으로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를 국영기업으로 출범시키고, 파괴된 공장 복구를 위해 연산 5만 톤 규모의 평로(구식 용광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원조당국이 한국의 철강공장 건설계획에 반대하자 이 대통령은 자체보유불로 공장 건설을 강행했다. 그 결과 서독의 데마그 사가 공사를 수주하여 1956년 하반기 첫 출강식이 거행되었다. 압연공장 건설이 완료되어 1959년부터 철강제품 생산이 개시되었다. 공장 건설 과정에서 많은 기술자와 관리자들이 국비로 서독 유학을 가서 신기술을 익혔다. 바로 이들이 박정희 정부에서 포항제철 신화를 만드는 주인공이 되었다.
전후복구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공장 건설을 원했지만, 미국은 한국에서 빈곤과 질병의 해소가 목표였다. 미국은 한국에 원조를 제공하면서 농산물을 제외한 공산품과 비료, 시멘트 등은 일본 제품을 구매하도록 하여 일본의 경제부흥을 유도했다. 일본을 부흥시켜 동북아에서 공산주의의 방파제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한국에 공장 건설을 억제한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에 대해 이승만의 정치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는 “1달러로 2달러의 효과를 거두려는 정책”이라고 표현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정책에 맞서기 위해 자체보유불로 공장을 건설하거나 유엔한국재건위원회(운크라‧UNKRA)를 설득하여 운크라 자금으로 인천에 판유리공장, 문경에 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자 미국 정부도 할 수 없이 충주비료공장 건설에 동의하여 대규모 비료공장 건설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승만 시절 산업 각 분야에서 시장경제의 발전을 위한 초석들이 다져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원자력산업까지 시동을 걸었다. 1956년 2월 우리나라는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 간 협력 협정을 맺었고, 1957년 8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1958년 3월에 원자력법을 제정 공포하고 1959년 1월에 대통령 직속으로 원자력원을 설립했다. 미국으로부터 연구용 원자로(트리가 마크2)를 도입하여 기공식을 거행한 것이 1959년 7월 14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부는 체계적인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경제개발 7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이 계획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3개년계획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국무회의를 통과한 지 4일 후 4‧19가 터져 시행되지 못했다. 이것이 장면 정부 시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정되었으나 5‧16으로 사장되었다가,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2년 1월부터 본격 추진된 것이다.
해방과 건국, 전 세계적 차원의 냉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이승만은 미국 중심의 해양 동맹에 편승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라는 국가의 진로를 제시했다. 1948년 건국 이래 1960년 4‧19로 실각하기까지 이승만은 농지개혁, 교육혁명을 통해 우수 인재 배출 시스템을 만들었다. 또 산업화의 초석이 되는 철강, 비료, 시멘트, 판유리공장 등을 건설했고, 경제개발계획까지 수립하는 등 개발연대에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들을 마련했다.
말하자면 박정희 시절에 산업화, 근대화가 성공한 이유는 이승만 시대부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인자들이 준비되어 싹트기 시작했고, 근대화에 필요한 경험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한민국을 20-50클럽에 가입시키고, 세계 10위권의 수출대국에 오르는 원동력은 이승만 시절부터 시작된 산업화 덕분이라는 인식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김용삼 경기콘텐츠진흥원 감사
(이 글은 자유경제원이 14일 주최한 <8.15 건국의 의미:시장경제체제 도입>이란 정책토론회에서 김용삼 경기콘텐츠진흥원 감사(전 경기도 대변인)가 발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