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실패 두려워 않는 야망가...대중문화로서의 ‘한류’ 확산 일으켜

1. 한류(韓流)에서 케이팝까지, 기원과 출발

   
▲ 남정욱 숭실대 교수
2014년 현재 한류(韓流)라는 단어는 ‘한국 대중문화가 국경을 넘어 순환되고 소비되는 현상’을 뜻한다. 초창기에는 폭이 다소 좁아 ‘한국 TV 드라마 열기’의 용례로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대중음악, 영화 등으로 확산된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그러나 한류라는 용어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보면 그 의미는 지금과 조금 다르다. 1990년대 한국의 문화관광부에서는 한국대중음악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 제작한 샘플러 시디에 ‘한류’라는 단어를 박아 넣었다.

‘팝’이라고 하는 단어의 중국어 번역어가 ‘유행’이었으니 한류의 원래 의미는 ‘한국유행(가歌)’의 줄임말이었던 것이다. 발명發名은 한국에서 했지만 이를 유통시킨 것은 중국 미디어였다. 중국 미디어를 통해 ‘한류’는 ‘한국 팝 음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통용되었다. 다소 모호하게 시작된 한류가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폭발한 것은 1999년 11월의 클론 공연과 2000년에 들어 연달아 개최된 H.O.T와 베이비복스의 베이징 공연이었다.

   
▲ 2000년 엔터테인먼트 업계 최초의 코스닥 상장을 이룩하며 에스엠을 한류의 중심에 서게 만든 이수만 회장.

그런데 왜 하필 중국에서 한류가 폭발한 것일까. 중국은 그때까지 자본주의적 문화 산업이 거의 발전하지 못한 ‘문화 개도국’이었고 당연히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품으로서의 음악’과 ‘상품으로서의 가수’를 처음 접했던 것이다. 이는 문화산업이 나름대로 그 기반을 가지고 있는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한국 음악이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했던 사실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한류가 처음부터 국내 업체의 진출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입까지 한류는 에이전시를 통해 소개되었다. 이 에이전시는 일종의 ‘문화 오퍼상’으로 한국 업체와 계약을 맺고 한국의 문화 상품을 작은 규모로 판매했다. 이때의 대표적인 중국 에이전시로는 ‘우전(宇田) 소프트’가 있으며 이들은 1998년 H.O.T의 중국판 음반을 시디로 배급했다.

반면 케이팝이라는 신(新)한류 혹은 한류 2.0을 뜻하는 용어는 1998년 일본에서 H.O.T의 음반이 발매되고 1개월 만에 5만 장을 판매한 무렵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이팝J-pop과 달리 케이팝은 우리가 붙인 이름이 아니다. 케이팝은 일본 음악 산업계에서 한국의 대중음악 전체가 아닌 해외로 수출되는 일부 한국 음악을 지칭한 것이다.

국제적으로만 통용되던 이 단어는 2005년에 들어와서 국내용 단어로 전환된다. 2009년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유인촌은 한국형 빌보드 차트를 만들겠다고 발표하면서 케이팝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2014년 현재 케이팝은 ‘저패니메이션’이라는 단어처럼 단지 지역적인 구분에 따라 명명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성이 있는 시장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2. 아이돌 그룹의 시대를 열다.

현진영의 모델이 바비 브라운이었다면 H.O.T의 벤치마킹 대상은 뉴 키즈 온 더 블록이었다. 1995년 3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이수만에게 확신을 주었다. 부모를 제치고 구매결정권을 행사하는 미국 청소년들이 지불하는 비용이 한 해 무려 96조원이라는 내용이었다. 여론조사기관에 설문을 의뢰해 나온 공식이 ‘고교생 그룹 + 춤 + 노래 + 새로운 변화’였고 그 결과물이 H.O.T였다.

   
▲ K-POP을 부르는 한국인 가수도 아닌 J-POP을 부르는 한국인 가수로서 아시아 스타가 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보아.

데뷔할 무렵의 H.O.T 멤버들은 고 1부터 고3 까지 모두 재학생이었다. 8개월간의 지옥 훈련이 끝나고 이들은 1996년 9월 데뷔 앨범을 발매한다. 앨범 타이틀은 ‘We hate all kinds of violence'였고 표지에는 양팔로 머리를 감싼 소년 한 명이 다리 사이에 머리를 묻고 있는 모습이 인쇄되어 있었다. 학교 폭력에 도전하는 힙합 전사들의 이미지로 H.O.T는 청소년들을 열광시켰다.

청소년들은 기꺼이 H.O.T를 서태지를 잇는 그들의 새로운 대변자로 받아들였고 후원군이 되었다. 이수만은 멤버들의 개성을 살려 다섯 명을 각기 다르게 포지셔닝했다. 문희준은 유머humor 가이, 강타는 핸썸handsome 가이, 장우혁은 터프tough 가이, 이재원은 샤이shy 가이, 토니 안은 무드 mood가이로 포장되었다, 폭넓은 성향의 팬들이 취향에 맞춰 골라잡을 수 있도록 다변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 전략은 시장에서 통했고 나중에 소녀시대의 창설 때에도 그대로 응용된다.

보이 그룹으로 시장을 타진한 이수만의 다음 프로젝트는 걸 그룹 조직이었다. H.O.T 때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은 프로젝트 시작부터 아시아 시장을 노렸다는 점이다. 한국어 담당 최성희, 영어 담당 김유진, 일본어 담당 유수영은 수천 명의 경쟁자들을 뚫고 선발되었다. 이수만은 중국어를 담당할 멤버까지 확보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도중하차하는 바람에 그 꿈은 다음으로 미뤄야했다.

이수만이 걸 그룹 결성 때부터 염두에 둔 것은 일본 시장 진출이었다. 이수만이 계약을 체결한 업체는 ‘스카이플래닝’이었다. 조건은 40개월에 2천 5백만 엔. S.E.S의 일본 활동은 활발했지만 생각만큼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포지셔닝에 문제가 있었다. 국내에서는 신비로운 요정의 이미지였지만 일본에서는 그것을 만들어 내지 못했고 그저 그런 걸 그룹 중 하나로 묻혀버린 것이다.

BoA(본명 권보아)는 대단히 특이한 한류다. 보아는 ‘케이팝을 부르는 한국인 가수’도 아니고 ‘제이팝을 부르는 일본인 가수’도 아니다. 보아는 ‘제이팝을 부르는 한국인 가수’다. 이수만의 전략이 그 영역까지 확대된 것이다. 그렇다고 100% 수출 상품도 아니다.

보아는 SM엔터테인먼트가 일본 굴지의 레코드 회사인 에이벡스Avex와 합작하여 생산한 합작품이다. 그것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S.E.S의 슈와는 또 다른 경우였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일본어를 현지인처럼 구사하려면 최소한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즉, 트레이너들에 의해 단련되는 시간 + 3년이다. 후보군을 초등학교 고학년 중에서 골라야 했던 이유다.

   
▲ 폭넓은 성향의 팬들이 취향에 맞춘 다변화 전략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소녀시대.

3. 케이팝 그리고 이수만 시대의 명암

‘아시아의 스타’ 지위를 획득한 보아와 비와 세븐은 한국의 빅 3인 SM, JYP, YG 소속으로 2000년대 중반 한국 대중음악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가수다. 이들 빅 3는 해외 진출에서 예전처럼 대행업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사를 설립하여 직접 현지를 공략하는 ‘트랜스내셔널’한 기업이라는 특징을 공유한다.

이 변화는 불과 10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한국은 경제의 압축 성장에 이어 음악 산업에서도 압축 성장을 기록한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경제성장의 문화적 버전이 지난 10년 간 한국 음악 산업이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압축적 ‘글로벌화’는 인터넷이라는 인프라(혹은 우리 삶의 기본 플랫폼)를 통해 달성될 수 있었는데 62만 명이 구독하는 YG엔터테인먼트의 유튜브 채널은 이에 대한 반증으로 적당하다.


경영 스타일로 빅 3를 비교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두견새를 통한 유명한 비유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3인에 대한 설명은 빅 3의 수장인 이수만, 박진영, 양현석에게도 유용해 보인다.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두견새를 죽여 버린다고 했다. 이수만 스타일이다. 그는 계약이 만료된 가수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두견새가 울도록 구슬려야 한다고 했다. 박진영 스타일이다. JYP 소속 가수들이 떠나면서 하는 말이 있다. “나만의 음악을 하고 싶어서.” 박진영은 소속 가수들의 스타일을 인정하지 않는다. JYP에는 오직 JYP 스타일만이 있을 뿐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두견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양현석 스타일이다. 그는 인재를 발굴하지만 소속 가수들이 끼와 개성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빅 3가 내세운 자신들의 음악 영토에 대한 명칭을 보면 이 차이가 명확해진다. SM는 ‘타운’이고 JYP는 ‘네이션’이고 YG는 ‘패밀리’다. 그들의 경영 스타일과 그 명칭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빅 3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합리적인 발상이 아니다. 이수만은 1세대로 봐야 하고 나머지 둘은 이수만을 보면서 배운 2세대로 보는 것이 맞다. 선발주자가 없었다면 둘은 같은 실수를 반복했을 것이다.

4. 이른 바 이수만 스타일

이수만은 그의 시대에,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는 무엇보다 변화에 민감한 인물이었다. 미국 유학 시절 이수만을 깨운 것은 MTV였다. 그는 MTV를 통해 음악의 미래를 읽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오락이었을 MTV가 그에게는 공부였고 교과서였다. 이수만은 트렌드를 잘 읽었다. 그는 스포츠 신문이 아니라 종합지를 정독하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예외적인 기획자였다.

그는 칭찬을 통해 내부의 결속과 아이디어를 끌어냈다. 직원들과 함께 했던 수많은 브레인스토밍은 연예기획사에서 아마도 처음 시도되었을 것이다. 이수만은 도전을 주저하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수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실패를 싫어하는 오기가 있었다.

빗나가고 어긋하고 나락으로 떨어질 때마다 그는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를 찾으라면 아마 와신상담과 절치부심일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수만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가장 큰 미덕은 야망이다. 그는 연예산업으로 코스닥 시장 등록 기록을 수립한 최초의 인물이다.

당시 딴따라 업종으로 코스닥 입성을 꿈꾸었던 사람은 아마 그가 유일했을 것이다. 2012년 6월 한국문화산업포럼이 충남 태안에서 개최한 ‘에너지와 문화콘텐츠 융합을 위한 지역 발전전략 대토론회’에서 들려준 이수만의 기조연설은 그의 꿈과 야망이 얼마나 지독하고 치열한지 보여준다.

“미래에는 누구나 두 개의 시민권을 갖고 태어납니다. 하나는 아날로그적 출생국의 시민권이고 다른 하나는 버추얼 네이션이라는 가상 국가의 시민권입니다. 버추얼 네이션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SM 타운입니다. 지난 해 파리에서 한 공연도 그곳에 사는 SM 타운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남미, 아랍에도 SM 타운 국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국은 5,000만 명이 아니라 수십억 명의 인구를 가진 대국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16일 자유경제원이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을 주제로 한 기업가연구회에서는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이수만과 그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