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정신의 관점에서 본 소득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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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국 강원대 교수 |
1. 문제의 제기
우리는 분업과 교환이 원시 부족사회에서부터 지역이나 국가전체로까지, 심지어 범세계적으로까지 확장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런 사회의 특징은 사유재산 자유경제 일부일처제 법치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점이다.
그런 자본주의는 폭발적인 성장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다. 이는 마르크스까지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체제는 소득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고 재분배 과세 또는 규제를 통해서 그런 격차를 교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압도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불평등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이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한 사람의 소득 증가는 타인을 희생시킨 결과라는 믿음이다. 두 번째는 상속 선천적 재능 등과 같이 소득의 상당부분은 받아 마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는 그런 소득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가난한 사람은 항상 가난하고 부자는 항상 부자가 되는 현상, 즉 ‘빈익빈 부익부’를 의미하는 양극화 현상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시장경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적 논리로 등장했다. 그런 비판은 시장경제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다.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자본주의는 엘리트 특권이 지배하는 봉건사회나 다름이 없다.
주목할 문제는 그런 세 가지 이유가 타당한가이다.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우리가 염두에 둘 것은 우리의 인식 대상이 ‘시장경제’라는 것이다. 그 원동력은 ‘인지적 기민성’을 의미하는 기업가정신과 경쟁이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 두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시장이론과 철학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은 경제사상사가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분배에 대한 규범적 이론적 비판이 타당한가의 문제는 기업가정신(그리고 경쟁)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제3장에서는 인지이론을 기업가정신과 연결하여 경쟁과 기업가정신이 어떻게 시장경제에서 불평등을 야기하면서 동시에 그런 불평등을 줄이고 빈익빈 부익부를 막아내는가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제4장에서는 기업가정신을 기초로 한 소유자격론을 설명하고자 한다. 기업가 정신이야말로 견고한 소유자격을 정당화하여 자유주의 분배사상의 도덕적 공백을 채워주고 있다는 걸 보여줄 것이다. 제5장에서는 기업가정신이 활성화되어 빈익빈 부익부와 같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배의 불평등을 억제할 자유의 정책을 설명할 것이다
따라서 우선 자본주의는 소득격차 또는 부익부 빈익빈을 의미하는 양극화를 야기하고 따라서 평등정책이 필요하다는 소득격차론의 결함을 설명할 것이다
2. 소득격차론의 치명적 오류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불평등의 원인은 한 사람의 소득증가는 타인을 희생시킨 결과라는 믿음과 자본주의는 불평등만을 야기하고 특히 빈익빈 부익부를 부른다는 주장의 타당성문제이다. 소득의 상당부분은 받아 마땅하지 않다는 주장은 제4장에서 다룰 것이다.
석기시대의 정신과 소득격차
한 사람의 소득증가는 타인을 희생시킨 결과라는 믿음이 타당한가? 그런 믿음의 원천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코스미데스 투비 그리고 특히 러빈 등이 개발한 진화심리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정신적 성향은 생물학적 진화사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인간정신이란 그런 환경의 결과라는 진화심리학적 인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의 소득증가는 타인을 희생시킨 결과라는 주장은 현대인의 본능에 남아 있는 석기시대의 정신, 하이에크가 발하는 부족사회의 정신구조를 가지고 현대사회를 평가한 결과이다. 인류의 본능과 심리구조를 형성하던 환경은 제로 섬 사회였다. 원시인들은 주어진 것으로부터 얻었다. 한 사람이 더 가지면 다른 사람이 적게 갖는 척박한 삶이었다. 열매도 어느 한사람이 많이 따 가면 나머지 사람들이 따 갈 게 줄어든다. 생산이란 개념이 없었다.
따라서 가진 것의 격차는 용서할 수 없었다. 이윤을 챙기는 것은 훔치거나 빼앗고 기만하는 결과로 이해했다. 부의 축적은 착취나 권력의 남용에 기인한 것이라는 믿음도 그런 본능의 소산이다
수렵채취의 원시사회는 일부다처제였다. 여자를 많이 거느린 부자는 여자가 없는 다른 남자의 유전적 존립을 박탈했다. 지배자를 제한했더라면 나머지 남자들에게 이익이 매우 컸을 것이다. 오늘날 부자에 대한 반감이 생긴 것도 그런 연유이다.
바스티아(F. Bastiat)가 주장하듯이 흔히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을 중시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성향은 원시사회의 ‘진화적 적응환경'에서 습득한 심리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당시에는 얼굴과 이름 생각을 서로가 아는 사람들끼리의 관계였다.
인류가 형성되는 기간 동안 외인의 침입으로 인간 그룹들이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그 결과 외인에 대한 공포심이 생겼고 이것이 보호무역의 인류학적 논리이다. 수입자유화는 공동체에게 피해를 준다는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대기업에 대한 반감을 가진 것도 수렵채취 사회의 유물이다. 낯선 큰 그룹보다는 아는 사람들과 관계를 가는 게 마음이 편하고 안전하게 여긴다.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을 더 크게 생각하는 것도 척박한 수렵채취 시대를 반영한 것이다.
오늘날 좌파지식인들이나 학자 또는 정치가들이 집단주의, 연대감, 유대감을 중시하는 것, 감성에 호소하는 것, 책임을 사회에 돌리는 것, 경쟁을 싫어하는 것 등은 원시사회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복지국가, 분배정의, 국민연금제도, 의료독점제도, 민족주의에 따른 보호주의는 모두 본능적 욕구를 인간 이성에 의해 실현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원시사회에 대한 향수와 합리주의적 구성주의가 결합한 결과이다.
주목할 것은 석기시대의 정신으로는 현대의 열린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경쟁 기업가정신이라는 개념도 석기시대의 정신에게는 생소한 것이다. 그런 개념은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근대적 산물이다. 부족사회의 정신구조를 가지고 소득의 불평등을 비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이에크가 자신의 논문 <인간가치의 세 가지 원천>에서 설명하듯이 시장경제와 자유주의는 ‘자연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자산소유와 소득격차
양극화론과 관련된 문헌을 보면, 소득격차를 설명하는 이론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비롯하여 신고전파의 균형이론, 프랭크의 승자독식, 칼도어의 부자의 저축과 자본축적, 머톤의 마태효과 등 다양하다. 자본주의의 분배격차를 설명하는 이론들을 상세히 분석하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러나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것은 최영백이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소득분배를 결정하는 요인이 노동 자본 원료 등, 자산소유이다.
예를 들면 신고전파 균형이론을 보면 주지하다시피 투입요소로서 자원(노동 자본 원료), 생산방법, 생산할 재화도 주어져 있다. 소득분배란 그런 주어진 틀에서 주어진 재화를 생산하는 활동의 기능적 부산물이다.
이런 균형이론에서 자산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욱 더 부자가 된다. 그래서 더구나 갖지 못한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자원이 많은 사람일수록 양질의 교육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빈자는 기술습득도 어렵다.
좌파는 노동능력 자본 등 시장이전의 일차적 분배를 의심한다. 그런 의심에서 재분배를 강조한 인물이 정치철학자 존 롤스 또는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이다.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여 저소득층의 교육을 담당하거나 서민층의 재산증식을 위한 정책을 펼칠 것을 주장하는 것도 신고전파의 균형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랭크(R. H. Frank) 등의 승자 독식에서도 부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요인이 능력과 같은 자원을 든다. 가수 패션모델 배우 운동선수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능력의 작은 격차가 소득의 큰 격차를 초래한다는 게 승자독식의 핵심이다. 능력향상을 위한 경쟁은 비효율적이고 따라서 경쟁을 억제하기 위한 재분배가 효율적이라는 게 승자독식의 인식이다.
자본수익이 경제성장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그래서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이유도 스스로 증식하는 자본의 힘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도 자산소유가 부의 격차를 야기하는 요인이라는 종래의 자산소유 소득격차론의 이론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 혹은 자본 혹은 기술 등 자산소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부유해지고 가진 게 적으면 빈곤해진다는 게 자원소유 소득격차론이다. 부의 축적에도 한계가 없다. 갖지 않은 자는 부자가 될 수도 없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사회적 이동성도 없다.
그러나 그런 소득격차론은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그 두 가지이다. 첫째로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득격차론은 ‘기업가’가 없는 모델이다 시장경제를 다루면서도 시장을 구성하는 원리로서 기업가정신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다.
자산소유 소득격차론은 신고전파의 정태이론을 닮았다. 이 기업가정신이 분배격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둘째로 시장의 경쟁과정이 없는 모델이다. 어떻게 인간들의 행동이 상호작용하여 견제와 조정이 이루어지는가를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3.기업가정신과 소득격차
우리가 경쟁과 기업가정신을 고려하면 소득격차와 관련하여 어떤 인식을 얻을 수 있는가?
기업가정신은 새로운 것, 타인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기회를 포착하는 기민성이다. 따라서 첫째로 기업가정신은 앞서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부의 격차를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기업가정신은 혁신경쟁과 모방경쟁을 통해서 기존 부자의 자산을 줄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둘째로 미제스가 강조하듯이 기업가정신의 실현은 교육도 커즈너가 주장하듯이 재산도 불필요하다. 최영백이 주장하듯이 이윤기회를 포착하는 실패한 자의 의 인지 전략이 유연하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사회적 이동성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셋째로 기업가정신은 사치품이 보편적 상품으로 전환되어 소비패턴의 평등화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그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부자. 따라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가져 오는 게 시장경제라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현상을 억제하는 강력한 힘이 작동한다. 그리고 시장경제가 오로지 분배의 격차만을 야기한다고 볼 수도 없다. 시장경제는 빈부격차를 줄이는 강력한 힘이 작동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시장의 경쟁은 경제력의 생성과 소멸과정이라는 프라이브르크학파의 창시자 발터 오이켄(W. Eucken)의 주장은 소득격차에 적용한다면 시장경제는 부를 창출하면서 동시에 부를 줄이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부의 축적은 무제한이 아니다. 시장의 경쟁과정을 통해서 끊임없이 견제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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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4일 열린 자유경제원 주최 '경제살리기는 기업가 정신으로부터' 토론회. |
기업가정신: 문화적 진화의 선물
이윤기회의 기민성이란 어떻게 유기체가 세상을 이해하고 파악하는가,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자연적 사회적 환경에 관한 지식을 얻는가의 인지 이론적 문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따라서 기업가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지문제를 다루는 게 중요하다.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 환경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해석할 정신적 도구가 필요하다. 하이에크는 그의 유명한 『감각적 질서』에서 그런 도구를 분류도구 인지 틀이라고 말한다. 그게 우리의 정신인데 이는 이론(포퍼) 범주(칸트) 규칙(하이에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을 통해서 환경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물리화학적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신경질서의 산물인 그런 정신적 수단은 생물학적 그리고 문화적 진화를 통해 습득한다. 주어진 인지 틀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만 반복적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인지 틀은 변동된다.
소규모의 집단생활을 특징으로 하는 원시 사회에서는 그런 인지 틀이 생물학적으로 형성되었고 사람들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관점과 해석이 동일했다는 게 과학철학자 라트니츠키(G. Radnitzky)의 주장이다.
진화심리학자 코스미데스(L. Cosmides)가 주장하듯이 인간들은 환경에 대해 유사하게 인지하면서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그룹 내에서 협력하며 살았다. 수렵과 채취하면서 살던 시기에 본능이 형성되고 고착되었다. 환경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인지 도구 정신적 연장들이 유사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업가정신이란 타인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이윤기회의 포착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인지가 동일한 소규모 원시사회에선 의미가 없다. 진화심리학이 말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뿌리를 형성했던 환경 즉 ‘진화적 적응환경’에서는 기업가정신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오히려 앞서나가는 걸 적대시했다. 튀는 행동 혁신적 행동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했다. 경쟁도 없었다. 연대와 유대감이 그룹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런 사회를 극복하면서 개인들의 경험과 학습이 점차 이질적으로 변동되면서 개인들의 인지 틀도 개인 각자에 고유하게 변동되기 시작했다.
동일한 환경에 대하여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해석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사물과 세상을 해석하고 인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런 인지와 해석은 창조적이고 혁신적이다. 남이 알아차리지 못한 이윤기회를 발견하는 것, 이런 기업가정신은 사람들이 세상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모든 인간의 인지가 동일하다면 기업가정신이 설 자리가 없다. 튀는 사람, 앞서나가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주목할 것은 기업가정신은 원시부족사회 공동체사회에서 현대적인 사회로 넘어오면서 새로이 등장한 인간적 요소이다. 그것은 이기심, 경쟁과 함께 문화적 진화의 결과로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기업가정신과 경쟁: 경쟁의 기능
진화적인 시장경제의 구성 원리는 경쟁이다. 1970년대 이후 프라이브르크학파를 이끈 호프만(E. Hoppmann)이는 구분하듯이 경쟁과정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수요자와 공급자의 교환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의 욕구 충족에 성공한 기업이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소비자의 구매력 획득에 실패한 기업은 부가 줄어든다.
다른 하나는 평행과정이다. 수요자를 향한 기업들의 경쟁이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 경쟁과정이 등장한다. 하나는 혁신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모방과정이다. 이 평행과정에서 부를 새로이 창출하는 과정과 함께 기존 부자의 부를 축소하는 과정이 등장한다.
어느 한 기업가가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여 수요자들의 새로운 욕구를 충족하는 등 새로운 이윤기회를 발견한다면 그런 기업가의 혁신으로 그는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여타의 것이 일정하다면 그런 성공으로 시장의 분배격차는 벌어질 것이다. 실패한 경쟁자들의 부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성공한 기업가의 부는 증가할 것이다. 사업도 확장하고 사업 분야도 늘릴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의 증가가 무한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새로운 경쟁자들이 등장하고 기존의 실패한 경쟁자들의 전열을 갖추어 경쟁에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체상품을 개발하거나 생산비용을 낮추는 기술개발을 통해서 싼 값으로 공급하면 원래의 혁신기업가의 삶이 더 이상 쉽지가 않다. 그의 기업가치가 줄어든다. 시장에서 모든 기업들은 그런 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현재의 부자도 늘 경쟁자들의 혁신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 성공한 기업가는 그 혁신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부자의 기업 가치를 줄인다. 그 결과 원래의 부자는 부의 순위에서 하락할 것이다. 그 대신에 그 창업자는 새로운 부자가 된다.
그 혁신적 기업가도 다른 경쟁자들의 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하이에크가 『자유의 헌법』에서 강조하듯이 성공적인 기업가를 모방하는 경쟁이 발생한다. 이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이를 검증하여 습득한 지식은 처음에는 소수의 그룹이 먼저 이용하게 마련이다. 경제발전과정이나 모든 부문의 발전과정에는 그 발전을 먼저 향유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혁신의 성과가 점차 확산되어 시간적으로 뒤따라 이를 향유하는 그룹도 있게 마련이다. 이런 확산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그 새로운 지식을 학습하고 모방하는 과정이다. 이런 모방과정을 거처 점진적으로 그 새로운 지식들이 확산되어 사회의 대부분이 이용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사회에서는 한편으로는 불평등을 야기하는 요소가 작동한다. 그것이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이용하는 선도그룹의 형성이다. 이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모방과정을 통해서 원래의 혁신적 기업가의 이윤이 줄어들고 그 대신에 모방자들의 이윤이 증가하여 커즈너가 강조하듯이 부의 사회화과정이 야기된다.
이 모든 것은 부의 축적을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는 부의 축적과 불평등을 야기하지만 혁신경쟁과 모방경쟁을 통해서 그런 부의 축척과 불평등의 확대가 억제한다.
따라서 경쟁을 경제력의 형성과 소멸과정이라는 프라이브르크학파의 창시자 오이켄의 주장은 바로 시장은 부의 축적과 억제의 상호작용과정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과학사회학자 머튼(R. Merton)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태복음 25장 29절)는 구절에 붙인 ‘마태효과“는 작은 과학이 큰 과학에 손을 든다는 뜻인데 이는 단기에나 적용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게 머튼의 주장이다.
시장 지배적 기업이 기술적 혁신의 산실이고 그래서 부의 분배가 부자의 손에 집중된다는 슘페터의 주장도 옳지 않다. 기술혁신의 원천이 대기업만이 아니라 중소기업이라는 게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업인들이 가진 부의 순위가 바뀌는 것도 부의 축적은 무한적이 아니라 시장의 경쟁을 통해서 견제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업가가 없는 신고전파의 균형이론도 기존의 부자의 부가 감소되어 상류층에서 중산층으로의 전락을 전혀 설명할 수 없다. 음악의 장르들이 다양하여 서로 경쟁하기에 승자독식이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음악의 리더들이 자주 변동된다는 것도 그 말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프롤레타리아와 기업가정신
기업가정신은 유익한 기회, 새로운 지식의 발견이라고 한다면 부자가 이윤 기회를 실현하는데 이점이 있는가? 부자, 즉 가진 자가 빈자, 즉 갖지 않은 자보다 부의 축적에서 유리한가? 이윤 기회를 발견할 능력개발을 위해서는 교육도 필요한 게 아닌가? 그렇다면 재산도 없고 양질의 교육받을 돈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기는 이미 틀린 게 아닌가? 앞에서 설명한 양극화론이 타당한 게 아닌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건 세 가지이다 커즈너의 생각, 미제스의 생각 최영백의 생각이다
(1)커즈너: 기업가정신은 재산 소유와 아무 관련이 없다. 물론 그 기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불가분 자본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김이석이 이미 밝혀내듯이 슘페터 홀컴 살레르노 등은 이윤획득은 실제로 자원 투입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커즈너의 기업가정신은 불완전하다고 주장한다. 로스바드도 자원소유를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저렴한 필요자원을 발견하는 것 그 자체도 기업가정신의 소관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같은 자원 소유가 기업가정신의 전제조건일 수 없다.
(2)미제스는 기업가정신에는 교육도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기업가는 시장에서 사고파는 생산요소로서 경영과도 관련이 없다.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경영대학을 기업가정신은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것이기에 알려진 것을 가르치는 교육과 무관하다. 경영학교육은 경영자가 되는 교육일 뿐이다. 경영자의 보수가 노임의 성격을 갖는 이유다. 날카로운 비판 예측 판단을 위해서 특수 훈련도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기업가정신은 자금이나 교육을 전제한 것이 아니기에 돈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사회적 이동성, 즉 가난한자가 부자가 될 수 있는 것도 기업가정신 때문이다. 무산자 프롤레타리아도 부자가 될 있고 또한 현재의 부자가 부를 축적하는데 필연적인 이점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배우지 못했어도 거부가 된 자수성가들이 아주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고 정주영 회장이 대표적이다. 미국의 스타트업 관련 전문기관이 시대를 대표하는 세계 각국 100명의 빌리어네어를 분석했더니 이 가운데 자수성가한 인물은 73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아주 가난한 집 출신에 대학도 나오지 않은 ‘고도 자수성가형’ 부호는 총 8명이었다.
(3)최영백은 현재의 부자가 기업가정신에서 큰 이점이 없다는 걸 인지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특정의 사업방식으로 성공했으면 그들은 그런 일반적인 방식에 서 이탈하려고 하지 않는 성향이 있다는 게 최영백의 인식이다. 그래서 유익한 기회를 간과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실패한 사람 덜 성공적인 사람은 다양한 접근법들을 찾아서 실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게 최영백의 주장이다. 그래서 그들이 학교 중퇴자 소수파 이민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부자로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기존의 부자들이 부를 사냥하는 미모의 여인들에게 취약한 이유도 슘페터가 지적하듯이 성공한 기업가가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결과, 그런 부자들의 부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 되는 사회적 이동성이 큰 게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미국의 연방 준비은행이 1975~1991년 기간 동안 조사한 것을 보면 1975년에 가난했던 사람들 중 대부분이 1991년에 더 가난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가 되었다.
1975년 하위 20%에 속해 있던 사람들 중에 5%만이 1991년에도 여전히 가난했고 나머지 95%는 사다리 위쪽으로 이동했다. 1975년 하위 20%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80%가 1991년에는 중산층이 되었거나 아니면 상류층으로 승격되었다. 거의 1/3이 상위 20%로 승격되었다.
자본은 빈익빈 부익부의 원흉이라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은 돈이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되도록 하는 기업가 정신을 고려하지 못했기에 쓸모없는 책이 되었다. 더구나 기업가 정신은 한편으로는 부를 창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쟁자들의 부를 줄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부의 축적이 무한적이라는 토마 피케티의 주장은 틀렸다.
기업가정신과 소비패턴의 평준화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시장사회에는 소득의 불평등을 억제하려는 힘이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런 힘은 소득의 분배에서만 그런 힘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계층과 부유한 계층이 이용하는 재화들의 질적 또는 기능적 차이도 적어진다.
자본주의에는 소비의 불평등을 억제하는 힘도 작용한다. 과거에는 임금님 수라상과 하층민의 식탁은 완전히 달랐다. 오늘날에는 청와대 식탁이나 서민층의 식탁사이에는 차이가 별로 없다. 시장경제가 발달할수록 이런 평등화의 힘이 강력해지고 평등화의 시간적 갭도 더욱 더 단축된다.
어떻게 이런 과정이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용 가능한 재화와 서비스의 범위와 질을 확대하는 힘이 생겨난다. 제품가격의 인하와 품질개선을 통해서다. 생산기술의 발전을 통한 대체재의 개발, 대량생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즉, 상품이 처음으로 개발되어 시장에 공급할 경우 값이 비싸다. 이런 비싼 상품은 아무나 구입하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구매자는 상류층에 속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모든 상품은 사치품이다. 그런데 상류층의 호응을 받으면 그 상품은 한편으로는 혁신자 자신이 더 많이 더 싼 값으로 공급한다.
다른 한편 모방하려는 경쟁자가 등장하여 대체 상품, 또는 유사상품을 개발한다. 이로써 상품가격이 하락한다. 경쟁자들은 상품의 질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상품의 가격도 싸지고 품질도 훌륭해진다. 이제는 상품의 수요계층이 상류층에서 중산층으로 그리고 하류층으로 점차 확대된다.
이런 확대과정이 상류층의 독점물이었던 재화가 일반대중이 사용할 수 있는 상품으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공급자들이 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과정의 자동적인 산물이다. 상품의 대중화 과정을 신속하게 하는 메커니즘도 시장경제의 내부로부터 형성된다. 상품과 서비스에 관한 정보전달 기술과 그들의 유통 기술의 발달이 그것이다. 자유시장경제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상류층의 독점물이었던 상품이 일반대중의 상품으로 된 예를 들면 라디오, TV, 컴퓨터, 자동차 등이 그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농산물의 경우, 과거에는 상류층만이 겨울에 수박이나 참외와 같은 여름과일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일반대중도 이런 과일을 겨울에도 소비할 수 있다.
상류층의 전유물이던 궁중음악, 상류층의 전유물이던 오페라가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재화가 된지 오래다. 이들만이 아니다. 교통 및 통신수단, 오락 등, 각종 편의품들도 처음에는 한정된 소량만이 생산 가능했다. 약품과 치료방법의 대중화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을 더욱 가난하게 만든다는 것, 이것은 삶의 패턴의 관점에서도 옳지 않은 말이다. 자본주의야말로 소비패턴의 평준화를 가져오는 현상이다.
이런 소비의 평준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평준화의 위력이 아닌가? 봉건사회에서와는 전혀 다른 것이 자본주의 사회이다. 봉건사회에서는 하류층은 고작해야 상류층이 쓰고 버린 것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소비생활, 삶의 질이 영원히 불평등하다. 봉건사회만이 아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적 권력자와 그리고 그 주변의 소비패턴과 하류층으로서 피지배자의 소비패턴은 영구적으로 불평등하다. 그러나 소비생활과 그리고 삶의 형태를 평준화시키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이다. 그것도 상향평준화이다. 자유사회의 지혜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일반 대중은 상류층이 구입하던 값보다 싼 값으로 공급받을 뿐만 아니라 전보다 훨씬 더 개선된 양질의 제품을 이용할 수 있다. 상류층에게는 열악한 품질의 재화를 비싸게 사게 했다가 나중에는 하류층에게는 고품질의 상품을 싸게 사게 만드는 것, 이것도 일종의 평준화 아닌가! 빈곤층이 품질 좋은 상품을 값싸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부자가 희생한 덕택이다.
요컨대 소득의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삶의 스타일까지도 불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소득분배에서처럼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재화에 대한 접근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소비의 평준화란 넓게 말해서 삶의 양식이 상류층이나 하류층이나 유사해져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도 역시 평준화를 의미한다. 이것이 공개된 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사회의 지혜이다.
불평등의 사회적 기능: 부자들의 역할
각종 편의 품들은 처음에는 한정된 소량의 생산만이 가능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 품목들 그리고 유사품종들이 적은 비용으로 공급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 결과 보다 많은 다수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자본주의는 소비의 평준화를 야기한다.
이런 주제는 이미 밀턴 프리드먼도 그의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의 제10장 “소득분배”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이런 상품의 대중화를 “진보와 발전이 가져다준 주된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유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는가의 문제는 답하지 않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 인물이 하이에크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자유의 헌법』제3장 “발전의 기본 팩트”에서 불평등과 발전의 관계, 그리고 상품의 대중화와 불평등의 관계를 설명하고 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그 관계를 보면 매우 흥미롭다
초기단계에서 생산할 줄은 알지만 그러나 생산 비용이 너무 높은 재화나 서비스들이 많다. 사회구성원들의 개인소득이 균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그 비용은 다수의 소득을 합한 액수의 몇 배에 해당될 수도 있다.
그런 상품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이것은 생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배가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부유한 상위계층을 상대로 생산하고 성능과 품질을 테스트할 수 있다. 그런 상품은 값이 비쌀 것이기 때문에 소수의 선택된 엘리트의 기호품일 수밖에 없다.
이런 테스트를 거처 성공하면 값을 내려 다음단계의 소득계층에게 접근이 가능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하여 새로운 물건들은 일정기간동안 소수의 사치재였기 때문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소득이 평등하게 분배된다면 새로운 것들이 점차 확산되는 과정이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물건들이 상류층에서 점차 하류층으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서 품질도 더 개선되고 값도 더 싸진다. 하류층은 시간적으로 뒤늦기는 하지만 가장 싼 값으로 가장 좋은 품질의 물건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부자가 수행하는 일종의 봉사다.
오늘날 빈곤자들이 향유하는 대중화된 물건들의 대부분은 부자들의 봉사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자는 하류층이 아직 도달하지 않은 발전 단계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험한다. 이런 실험이 없다면 빈곤층의 발전은 훨씬 늦거나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불평등의 이런 사회적 기능 또는 부유층의 무의도적인 기능은 발전의 원동력이다. 불평등이 발전과 번영의 원천이다.
4. 기업가정신과 소유자격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소득의 상당부분은 불로소득이라는 의미에서 받아 마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는 그런 소득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왜 내가 X라는 대상을 소유해야 하는가, 왜 그것을 소유해도 되는가, 즉 소유자격(entitlement)과 관련된 문제이다.
자본주의에는 소유자격과 관련된 도덕적 진공상태가 존재한다는 게 좌파의 지적이다. 그런 좌파의 지적을 설명하면서 기업가정신, 즉 기업가적 발견이야말로 소유자격을 부여하는 도덕적 요소라는 것을 밝힐 것이다. 좌파의 비판이 전제하는 것은 리카도 헨리 조지 롤스 피케티로 이어지는 리카도의 지대론의 전통이다.
기업가정신과 타고난 재주
타고난 재주 출신배경에 의해 형성된 소득 재산의 개인소유는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 심지어 노력 인내심까지도 타고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본주의 불평등을 개탄했던 인물이 존 롤스이다. 그러나 영국 좌파의 법철학자 드워킨은 시장경제는 개인이 자신의 노력에 따라 살겠다는 뜻을 잘 반영한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체제이지만 타고난 능력 같은 운에 의한 분배를 막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은 노력 없이도 자동적으로 경제적 성공과 연결되는 게 아니기에 운은 성공의 필수요건이 아니라고 비판한 인물이 ‘기업가 정신’으로 경제학자 커즈너이다. 운이 가져다준 그런 기회의 포착 개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업가정신이기에 이 정신이 중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은반의 여왕이었지만 은퇴한 김연아 선수는 자신의 재능이 애초부터 알려져 자동적으로 성공한 게 아니라 그 재주를 알아내고 개발하고 시장성을 찾는 기업가정신의 탓이라는 뜻이다. 그런 정신이 소득 재산을 그의 권리로 만드는 도덕적 요소임에도 그걸 간과한 게 좌파의 치명적 오류라고 커즈너는 목소리를 높인다.
데이비드 플로츠의 『천재공장』이 선천적 재주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수한 두뇌의 정자를 IQ 160이상의 여성에게만 공급하는 소위 <노벨상 정자은행>을 통해 태어난 217명 가운데 30명을 추적한 그들의 삶이 신통하지 않았다. 플로츠가 내린 결론은 아이들이 평균 이상의 능력을 보이는 것은 단순히 좋은 정자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후천성 때문이라는 걸 발견했다
따라서 인간은 원래부터 불평등하다는 플라톤의 ‘자연적 불평등론’보다 철학자도 짐꾼과 근본적 차이가 없다는 애덤 스미스의 ‘자연적 평등론’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기업가정신과 토지 자본수익의 소유자격
토지에서 생겨나는 것은 불로소득이라는 이유에서 100% 과세를 주장한 인물이 주지하다시피 헨리 조지(Henry George)이다 그런 주장에는 토지는 농지, 건축용, 공장용 등, 이미 그 용도가 애초부터 객관적으로 정해져 있어서 누가 토지의 주인이 되든지, 정해진 대로 쓰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토지를 이용하여 번 소득은 불로소득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토지의 용도와 그리고 관리방법은 인간의 고유한 선견지명을 통해서 비로소 발견․창조된다. 이런 창조적 발견은 기업가적 과정이다. 창조적 발견을 뜻하는 기업가 정신을 간과한 것이 조지의 재산권이론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토지소득은 결코 불로소득이 아니라 창조적 발견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다. 힘센 지주가 번영의 결실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노동의 처지는 점차 불리해진다는 조지의 예측도 틀렸다. 노동소득의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는 반면에 토지소득의 비율은 거의 변동이 없다는 통계가 입증한다.
과실나무에 저절로 열매가 맺듯 인간행동이 없이도 항상 자동적으로 수익을 가져다준다는 게 피케티의 자본관이다. 그러니까 자본소득은 불로소득이다
그러나 피케티의 자본인식은 틀렸다. 자본이 스스로 수익을 버는 게 아니다. 그 수익은 자본을 생산적으로 이용하려는 기업가적 착상 능력 노력의 산물이다. 자본축적도 자동적인 게 아니다. 이는 현재를 미래보다 더 중시한다는 뜻의 ‘시간선호’를 반영한 인간행동 결과이다. 자본가가 결실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노동의 처지는 불리해진다는 그의 예측도 틀릴 수밖에 없다.
어쨌든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커즈너의 발견자 소유자의 원칙에 따라 흔히 지본 소득과 토지소득을 가질 자격은 분명하다.
노동의 소유자격과 발견의 소유자격
노동을 소유 자격으로 파악하는 이론이 지배적이다. 자본주의 철학의 원조라고 여기는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는 주인 없는 대상에 노동을 혼합한 결과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을 소유와 연결시킴으로써 기업가적 발견을 간과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누구나 자기 스스로가 생산한 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노동의 소유자격론도 마르크스의 착취이론과 똑같이 생산 그 자체의 발견을 간과하고 있다. 프리드먼은 균형이론을 전제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의 발견과 연결된 이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노동가치론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런 노동의 소유자격이론에 대하여 칸트는 그의 저서 『윤리의 형이상학』에서 아주 적절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느 한 사물의 최초의 습득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서 노동에 의해 개간하거나 변형하는 것은 이미 그 사물을 습득하여 소유했다는 사실을 밖으로 보여주는 신호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칸트의 이런 주장은 노동 그 자체는 습득행위와는 거의 무관한 것이라는 뜻이다.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거나 이를 개간하는 등, 물리적 행동이전에 무엇인가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노동을 혼합할 대상 자체의 ‘발견’과 관련된 전체과정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적 재산권 사상의 역사를 연구한 슐래터도 “어느 한 대상을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것은 그 대상과 노동의 혼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에 자신의 의지를 조종하는 작동, 특히 물리적인 것을 초월한 작동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업가적 발견을 중시하고 이를 이론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인물이 커즈너이다. 발견자가 소유자라는 원칙을 ‘발견자-소유자 규칙“(finders-keepers rule)이라고 부르고 있다.
운(運)의 철학
경제적 성공을 위해, 다시 말하면 수요자들에게 유익한 결과를 공급하기 위해서 능력과 노력, 성실성 등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그 같은 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기업가적 노력 착상만으로 성공이 보장된 게 아니다. 그런 성공도 예측 불가한 상황(운)에 좌우된다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 지적으로 나약한 인간의 삶에 운은 필연적이다. 이를 부정하는 건 지적 자만이다. 따라서 경제적 성공이 기업가적 실력뿐만 아니라 운에 따라 좌우되기에 시장경제는 실력사회가 아니라는, 그래서 한때는 보수·기독교단체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던 게 하이에크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 같은 비판에 대하여 커즈너는 시장게임은 도박처럼 거친 운이 작용하는 게 아니라고 응수한다.
운만이 지배하는 사회는 성실 노력은 의미가 없고 냉소 운명론이 만연하여 퇴폐적이다. 실력만이 지배하는 세계도 불안정하다. 성공한 사람들의 지적 자만이 만연할 것이고 실패한 자들은 자괴감으로 실패를 견뎌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능하고 게으르고 둔하다는 사회적 낙인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시장경제는 그런 퇴행적이고 불안한 세계로 진화하지 않았다. 따라서 실패를 자신은 물론이요 우연의 탓에 돌릴 수 있기에 시장사회에서 패자는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 타인들도 인격적 낙인보다 ‘너는 능력도 있고 열심히 했지만 운이 없어 실패한 거야, 더 분발해!’라는 식으로 패자를 위로할 여지도 있다. 실력보다도 우연 때문에 생겨나는 불평등은 참아내기가 더 쉽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성공 실패가 운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책임이 감소하는 게 아니다. 스스로 책임진다는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자유의지 때문이 아니라 운에만 기대지 말고 신중하게 투자를 선택하고 자기 일에 열정을 쏟도록 하는 교육적 기능 때문이다. 뇌과학이 밝히듯이 그리고 하이에크가 설명하듯이 자유의지는 없다
개인의 성공 중에서 얼마나 실력 또는 운의 탓인가를 알 수 없다는 게 자유사회에서 부자 권세가는 거드름 부리지 말고 늘 겸손해야 할 이유다. 그렇다고 부자에게 재분배의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5. 맺는 말
시장경제의 소득격차 문제를 접근할 경우 능력 재주 자산 소유 등에 접근할 것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원리로서 경쟁과 기업가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시장경제엔 소극격차를 늘리면서 동시에 이를 제한하는 힘이 존재하는 데 그게 기업가정신이라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 기업가정신을 통해서 번영이 가능하다. 자본주의가 번영을 안겨주면서 동시에 분배의 격차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기업가정신 때문이다. 더욱 더 흥미로운 건 기업가정신을 위해서는 특별한 교육도 필요하지 않다.
유익한 기회의 실현에는 반듯이 재산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기업가정신을 통해서 값싼 자금을 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산을 가진 사람이 항상 승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실패한 사람, 덜 성공한 사람은 다양한 접근법들을 찾아서 실험하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하여 성공한 부자는 성공을 가져온 일반적인 방식에서 이탈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한 부자는 실패한 자들에 의해 용이하게 추격당한다.
더구나 시장경제는 기업가정신의 활성화로 소비 패턴의 평준화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사치품이 값싸고 질 좋은 보편적 재화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그런 과정에서 부자는 값비싼 신상품의 테스트를 위한 시험지이다. 부자가 없고 소득이 평등화되면 그런 테스트를 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시장경제가 기업가의 이윤기회 발견 활동에 의해서 부의 축적을 견제한다. 그런 견제는 기업가들의 경쟁과정이다 그런 자유경쟁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 추상적 그리고 확실성을 갖춘 법의 집행이 필요하다.
(이 글은 16일 자유경제원이 ‘격차(隔差)’를 주제로 한 자유주의연구회에서 민경국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가 발표한 <기업가 정신의 관점에서 본 소득격차> 전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