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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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조 경희대 교수 |
시장경제는 필연적으로 격차를 수반한다. 교환이 시장경제의 작동원리인 한 다른 사람에게 제공할 것이 적은 사람은 당연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적을 수밖에 없다.
대개의 사람은 우리의 생김새가 다르듯이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수용한다. 또한 업적 혹은 성과에 따라 보상이 달라야 한다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모든 격차를 당연시하지는 않는다. 기회의 평등은 결과의 불평등 혹은 격차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격차를 문제로 삼는다.
이 글은 이러한 불만이 광범하게 확산될 경우 시장경제체제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우선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는 격차를 수용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격차에 불만을 가지는가?’는 질문에 해답을 구하고 그 바탕 위에서 격차에 대한 불만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탐색하는 조그마한 시도이다.
한국인의 격차관: 몇 가지 가정
논의에 앞서 몇 가지 가정을 한다. 관련한 경험적 연구가 충분하지 않아 ‘가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적어도 일상 속에서 관찰되는 인상적인 증거와 언론에서 다루는 쟁점에 비추어 현실에 가까운 (realistic)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 1: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장경제가 다른 경제체제보다는 우월하다고 믿는다. 특히 총량성장에 있어서는 현실의 다른 체제보다 낫다고 믿고 있다.
단 분배 면에서는 시장경제의 역사적 실적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가정 2: 대부분의 사람들은 업적이나 기여에 따라 보상이 다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공산주의다. 내가 남보다 열심히 일하는데 왜 남보다 더 많이 받고 더 잘 살 수 없어야 하는가?” 이런 식의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남보다 더 잘하고 더 노력하고 더 중요한 일을 하면 이에 상응하는 차별적인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큰 격차는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평사원의 임금과 대비한 CEO의 임금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작음에도 불구하고 언론 등에서는 이를 지나치다고 보도하고 일반인들도 이에 동조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가정 3: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회의 평등’을 받아들인다. 자신의 능력이 닫는 한 그리고 원하는 한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받을 평등한 기회가 부여되어야 하고 사회적 배경이나 출신학교와 관계없이 오로지 능력만으로 취업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처럼 평균적인 한국인은 시장경제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수용하며 격차의 필연성도 인정한다. 사회적 다위니즘이 정착한 나라(예컨대 미국)에 비해 좀더 평등주의적인 공정성의 관념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엄격한 (예컨대 소득의) 평등을 옹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극단적인 평등주의자조차도 시간을 어떻게 쓸지 등에 대해서 개인이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소득과 일에 관련해 더 많은 소득을 얻기 위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기보다는 보수가 적더라도 즐거운 일을 택할 수도 있고 더 많은 일을 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시간을 더 많이 갖는 선택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선택의 결과로 빚어지는 소득의 격차는 거의 모든 사람이 받아들인다. 업적주의의 원칙에도 대체로 동의하고 ‘기회의 평등’도 대개는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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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차(隔差) 불만 해소’를 주제로 발표하고 있는 이영조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기회의 평등 혹은 불평등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회에 격차가 있는지의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 평등한 무엇(equal X)과 무엇을 얻을 기회의 평등(equal opportunity for X)은 엄청나게 다르다. 평등이 달성되었다는 혹은 격차가 없다는 주장은 무엇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실례(observation) 하나로도 부정될(falsify) 수 있지만 기회의 평등이 달성되었다는 주장은 그로써 부정되지 않는다. 기회의 평등은 결과의 불평등을 처음부터 인정하기 때문이다.
기회의 평등은 독립적으로 재기 어렵다. 경험적인 연구를 한다고 치면 결국은 기회가 아닌 결과를 놓고 아주 정교한 분석기법을 동원해야 한다. 개인이나 집단 사이의 다른 모든 관련된 차이들을 고려하고 통제했을 때 기회가 평등하다면 동일한 평균적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역으로, 다른 모든 변수들을 통제했을 때 결과가 불평등하다면 이것은 기회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을 계량하고 통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는 다른 모든 변수들이 결코 평등하거나 동일하지 않다. 한마디로 ‘기회의 평등’이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검은 상자인 한 실제에 있어서는 ‘기회의 불평등’일 가능성이 엄존한다.
특성 중립적 기회의 평등과 특성 비중립적 기회의 평등
흔히 우리가 뭉뚱그려서 얘기하지만 기회의 평등에는 두 가지 상이한 종류가 있다.
첫째는 특성 중립적 기회의 평등이다. 로또, 빙고, 추첨, 동전 던지기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이것들의 공통된 특징은 참여하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특성, 자질 등과는 결과가 무관하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특정한 결과가 나올 확률이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둘째는 특성 비중립적 기회의 평등이다. 대부분의 운동경기가 좋은 사례이다. 공통된 일정한 규칙이 있고 장비의 규격 등에 대해서도 세밀한 규정이 있다. 능력에 따라 결과의 차이가 드러나게 이론적으로는 평등한 ‘수단’을 제공한다. 동일한 수단 내지는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불평등한 결과는 재능 혹은 노력의 결과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이 경우도 세밀한 규정이나 규격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재능이나 노력 못지않게 장비와 같은 제3의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봅슬레이의 예를 들자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훈련을 많이 하더라도 좋은 장비가 없이는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스포츠는 과학’이라는 말이 예시하듯이 아무리 평등한 경쟁기회를 부여하더라도 훈련의 방식과 장비의 우열 때문에 성공할 전망 혹은 확률은 처음부터 다르다. 우리가 일상에서 벌이는 경쟁은 대부분 개인적 특성에 비중립적일 뿐 아니라 성취의 전망(prospect)이 개인 외적인 요소에 크게 좌우된다.
가족적 배경과 기회
언론기사나 사람들의 일상적인 의견 표명을 근거로 해서 추정한다면 한국에서 기회의 평등과 관련해 가장 흔히 문제가 되는 것은 가족적 배경과 이것이 교육 및 직업(취업), 나아가 소득에 미치는 영향일 것이다. “교육의 대물림,” “아버지의 능력이 나의 스펙,” “부의 대물림” 등. 이와 관련한 불만의 소재를 확인하기 위해 중요한 요인들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 아래의 그림에서 보는 모형이다.
이른바 ‘좋은’ 직장에 취업하거나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름난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바람직한 소양과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고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적 혹은 학습 능력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어쩌면 타고난 유전형질이 더 중요할 수도 있지만 신기하게도 유전형질의 차이를 가지고 문제 삼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유전적인 요인을 문제 삼지 않는 경향은 공부 이외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분야에 따라서는 타고난 체격이나 체질이나 외모가 결정적일 수도 있지만, 이런 유전적 차이는 자신이 물려준 것이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이를 언급하는 것은 결국은 누워서 침을 뱉는 격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부 스타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이 엄청난 소득과 명성을 누려도 이것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 삼는 것은 위 그림의 아랫부분이다. 한국의 경우, 취업이나 교육의 기회는 분명히 열려 있다. 부잣집 출신이든 가난한 집 출신이든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취업의 문도 공식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이 같은 ‘기회의 평등’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회에 커다란 격차가 있다고 생각하고 문제 삼고 있다.
돈 있는 집 애들은 과외도 받고 그래서 높은 수능점수를 받는데 나는 못해주니 불만이다. 입시사정관제도를 통해서 좋은 대학을 가던데 형편이 되지 않아 요구되는 스펙을 맞춰줄 방법이 없으니 속 터진다. 있는 집 애들은 조기유학도 가고 해외로 영어연수도 1~2년 씩 다녀오는데 그거 못해줘서 취업 면접 때마다 영어 때문에 떨어지니 참으로 안타깝다.
최근에는 좋은 회사들이 비즈니스 기회를 염두에 두고 돈 있고 지위 있는 집 자녀들을 특별고려해 선발한다고 하니 서민들은 어쩌란 말이냐. 이러한 것들이 시장경제체제와 업적주의 그리고 기회의 평등을 수용하는 평균적인 한국인들의 불만이다.
무엇이 필요한가?
이 같은 불만을 줄이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의 몇 가지 조치들이 필요하다. 첫째는 평준화 폐지 내지는 수정이다. 사실 과외가 중요해진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평준화이다. 학습능력이 다른 학생들을 같은 교실에 몰아넣은 결과 교사가 어느 한 수준에 맞춰 가르치면 나머지 다른 수준에 있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울려야 배울 수가 없다.
과거 평준화 이전 시절에는 학생들의 과외에 대한 의존도 지금보다 크게 낮았던 것이 학교에서 자기 수준에 맞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준화의 전면적 폐지가 어려우면 수준별 반편성이라도 해야 한다.
둘째, 영어의 제2공용어화이다. 통계에 의하면 가계의 사교육비에서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것이 영어 사교육비다. 제2공용어화한다는 것은 공교육에서 영어교육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가구의 소득과 관계없이 영어를 배울 수 있게 할 수 있다. 세계어로서의 영어의 중요성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영어 학습이 사실상 가정의 책임이 되면 영어는 조선시대의 한문이 지적 능력의 미명 하에 사실상 사회적 차별의 도구로 기능했던 것과 비슷해 질 것이다.
셋째, 대학 입시에서 사실상 부모의 능력(경제적, 시간적, 지적, 그리고 정보 능력)에 의해 성패가 좌우되는 각종 이상한 전형들을 없애고 전형방법을 단순화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단 한 번의 시험만 치르는 과거의 전형방법을 부활시키는 것이 좋다. 당연히 수행평가를 포함하는 고교내신제 같은 것도 폐지해야 한다. 일상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과를 내야 할 경우 가정형편이 중요한 결정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 기업은 가족적 배경을 고려해 채용하는 관행을 없애야 한다. 회사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겠지만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빚는다는 점에서 버려할 관행이다. 회사들이 자발적으로 이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공무원 채용에서 채택하고 있는 블라인드 인터뷰 방식 같은 것을 법제화할 필요도 있다. /이영조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이 글은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에서 개최한 ‘격차(隔差) 불만 해소’를 주제로 이영조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발표한 내용입니다.)